2025년 9월 26일 금요일

진원제 사마예(晉元帝 司馬睿, AD. 276~323년) : 동진 1대 황제(AD. 317~323년)

진원제 사마예(晉元帝 司馬睿, AD. 276~323) : 동진 원제(AD. 317~323)

 
  • 이름 : 사마예(司馬睿)
  • 출생 : 276527
  • 사망 : 32313(향년 46)
  • 묘호 : 중종 (中宗)
  • 시호 : 원황제 (元皇帝)
  • 능호 : 건평릉 (建平陵)
  • 주요 칭호 및 지위
  • 낭야왕 (琅邪王)
    • 재위: 291~ 317
    • 전임 : 낭야공왕 사마근(琅邪恭王 司馬覲)
    • 후임 : 낭야효왕 사마부(琅邪孝王 司馬裒)
  • 진왕 (晉王)
    • 재위 : 3173~ 3183
    • 전임 : 진 민제(晉愍帝)
    • 후임 : 없음 (동진 개국)
  • 동진 황제 (東晉 皇帝)
    • 재위 : 317426~ 32313(5252)
    • 전임 : 진 민제(晉愍帝, 서진 마지막 황제)
    • 후임 : 진 명제(晉明帝)
  • 연호
    • 건무(建武): 3173~ 3183
    • 대흥(大興): 3183~ 3223
    • 영창(永昌): 3223~ 3231
 

기원후 276

  • 276527일 출생하였다. 자는 경문(景文)이며, 사마의(司馬懿)의 증손자이자, 낭야무왕 사마주(琅邪武王 司馬伷)의 손자이며, 낭야공왕 사마근(琅邪恭王 司馬覲)의 아들이고, 그의 어머니는 낭야왕비 하후광희(夏侯光姬)이다.
  • 사마예는 팔왕의 난(八王之亂) 기간 동안 정치적으로 동해왕 사마월(東海王 司馬越) 집단에 소속되어 있었다. 사마월이 하간왕 사마옹(河間王 司馬顒)을 서쪽으로 정벌할 때, 사마예는 하비(下邳)의 후방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았다.
 

기원후 290

  • 아버지 사마근(司馬覲)이 태희(太熙) 원년(290)에 세상을 떠난 후, 사마예는 이듬해 열다섯 살의 나이로 낭야왕(琅邪王)의 작위를 물려받았다.
  • 작위를 계승한 후 사마예는 팔왕의 난이 시작되면서 혼란스러운 정국을 마주하게 되었다. 이때 사마예는 재앙을 피하기 위해 겸손하고 사양하는 태도를 보였고, 행동을 극도로 조심해서 당시에는 그에게 많은 관심을 두는 사람이 없었다.
 

기원후 292

  • 원강(元康) 2(292), 사마예는 원외산기상시(員外散騎常侍)에 임명되었다.
 

기원후 304

  • 영안(永安) 원년(304)에는 이미 좌장군(左將軍)으로 승진하여 성도왕 사마영(成都王 司馬穎)을 토벌하는 당음 전투(蕩陰之戰)에 참전했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는 사마영이 승리했고, 친정을 이끌고 나섰던 진혜제(晉惠帝)가 포로로 잡혔으며, 전쟁 전에 사마영에게 투항을 권유했던 사마예의 숙부 동안왕 사마요(東安王 司馬繇)는 살해되었다. 사마예는 자신에게 화가 미칠까 두려워 낙양(洛陽, 지금의 하남성 낙양시)으로 도망쳐 어머니와 함께 봉국인 낭야로 돌아갔다.
 

기원후 305

  • 영흥(永興) 2(305), 동해왕 사마월이 장안(長安, 지금의 섬서성 서안)에서 황제를 끼고 정권을 장악했던 하간왕 사마옹을 토벌하기 위해 거병했는데, 이때 사마예에게 보국장군(輔國將軍)의 임시 직책을 주었다. 얼마 후 사마월은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진격하며 사마예를 평동장군(平東將軍) 겸 감서주제군사(監徐州諸軍事)로 승진시켜 하비에 주둔하게 했다. 하비에 머무는 동안 사마예는 과거 낙양에서 자신에게 봉국으로 돌아가라고 강력히 권했던 왕도(王導)를 자신의 사마(司馬)로 초빙하고, 그에게 자신을 위해 계책을 마련해 줄 것을 부탁했다.
 

기원후 307

  • 영가(永嘉) 원년(307), 사마예는 왕도와 동해왕비 배씨(裴氏)의 조언을 듣고 주둔지를 하비에서 동오(東吳)의 옛 수도 건업으로 옮겼고, 진회제(晉懷帝)로부터 가절(假節), 안동장군(安東將軍), 도독양주강남제군사(都督揚州江南諸軍事)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사마예가 처음 건업에 도착했을 때는 강남 사대부들의 예우를 받지 못했고, 한 달 내내 찾아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왕도와 왕돈의 도움으로 마침내 강남 사대부들 사이에서 명성을 쌓게 되었고, 사마예는 이로 인해 고영(顧榮), 하순(賀循) 등 강남 사대부의 수장들을 자신의 보좌관으로 선임하고, 왕도, 조협(刁協) 등 북쪽에서 건너온 사대부들과 협력하여 강동(江東)을 다스렸다. 사마예는 황족이었지만, 전적으로 왕도와 왕돈 덕분에 강동 사람들의 지지를 얻게 되었고,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그를 ()과 마()가 천하를 함께 다스린다라고 일컬었다.
 

기원후 310

  • 31011, 진동장군 주복(周馥)은 낙양이 위태롭다며 진회제에게 수춘(壽春, 지금의 안휘성 수현)으로 천도할 것을 상서로 청했다. 이 행동은 정권을 맡고 있던 태부 사마월에게 미리 묻지 않아 그를 크게 노하게 했다. 주복은 이전에 회남태수 배석(裴碩)에게 군사를 이끌고 사마월에게 가서 두 사람에 대한 징발에 응하게 했었다. 이때 배석은 사마월의 비밀 명령을 받았다고 주장하며, 독단적으로 명을 내린 주복을 토벌하고 수춘으로 공격 방향을 돌렸다. 배석은 주복에게 패하여 동성(東城)으로 물러나 수비를 하고 사마예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사마예는 양위장군 감탁(甘卓)과 건위장군 곽일(郭逸)을 파견하여 군사를 이끌고 수춘을 공격하게 했다.
  • 사마예(晉元帝 司馬睿)가 남쪽으로 거처를 옮긴 후 남방에서는 간혹 다음과 같은 난리가 일어났다. 310년 영가(永嘉) 4, 건위장군 전증(錢璯)이 양선현(陽羨縣)에서 난을 일으켰다.
 

기원후 311

  • 3111, 주복은 십 일 동안 지키다 패하여 항현(項縣)으로 도망쳤고, 신채왕 사마확(司馬確)에게 붙잡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근심과 분노 속에 죽었다.
  • 5월에는 다시 진동대장군(鎮東大將軍) 및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의 칭호를 받았다.
  • 하지만 6월에 영가(永嘉)의 난이 발생하여 낙양이 한조(漢趙)에게 함락되고 진회제가 포로로 잡혔다. 이때 사공 순번(荀藩)은 형양(滎陽)으로 도망쳐 천하에 격문을 보내 사마예를 맹주로 추대했다. 사마예는 맹주 자격으로 제도(承制)하여 강주(江州) 관원의 임명을 변경하려 했다. 하지만 평소 낙양의 진회제 정부가 아직 존재한다며 사마예의 명령을 받지 않았던 강주자사 화일(華軼)은 다시 불복했다. 사마예는 왕돈에게 감탁, 주방(周訪), 송전(宋典), 조유(趙誘) 등의 군사를 통솔하여 화일을 토벌하게 했다. 화일은 군사를 이끌고 적극적으로 저항했으나, 위전(衞展)과 주광(周廣)이 내응하면서 기습을 당했고, 전투에서 패하여 살해되었다.
 

기원후 312

  • 영가(永嘉) 6(312), 진회제가 한조의 도성 평양(平陽, 지금의 산서성 임분시)에서 살해되었다.
 

기원후 313

  • 이 소식이 건흥(建興) 원년(313) 4월에 장안(長安)에 전해진 후, 진민제가 황태자로서 즉위하여 황제가 되었다.
  • 5월 임진일(627)에는 사마예가 시중(侍中), 좌승상(左丞相), 대도독섬동제군사(大都督陝東諸軍事)로 승진했고, 대도독섬서제군사(大都督陝西諸軍事)인 우승상 남양왕 사마보(司馬保)와 함께 섬서와 섬동으로 나누어 통치했다.
  • 313년 건흥(建興) 원년에는 상주(湘州)에서 두도(杜弢)가 난을 일으켜 형주(荊州), 강주(江州), 상주(湘州) 세 주()에 영향을 미쳤으며, 아울러 경릉군(竟陵郡)에서는 두증(杜曾)이 난을 일으켰다.
 

기원후 315

  • 건흥(建興) 3(315)에는 승상(丞相), 대도독중외제군사(大都督中外諸軍事)의 지위에 올랐다.
  • 315년 건흥 3년에는 오흥태수(吳興太守) 원수(袁琇)를 살해한 서복(徐馥)이 나타났고, 선성군(宣城郡)에서 난을 일으킨 오()나라 말기 황제의 일족인 손필(孫弼)은 주협(周勰)의 복수 행동에 호응하고자 했다.
 

기원후 317

  • 건무(建武) 원년(317), 전년도에 한조(漢趙)가 진민제(晉愍帝)를 사로잡았다는 소식이 평동장군 송철(宋哲)을 통해 건강(建康)에 전해진 후, 송철은 민제(愍帝)의 조명(詔命)으로 사마예가 만기(萬機)를 총괄하라는 명이 있다고 선포했다. 서양왕 사마양(司馬羕)을 필두로 한 여러 관료들은 사마예에게 황위에 오르기를 청했다. 사마예가 거절하자 위()와 진() 두 왕조의 선례에 따라 진왕(晉王)으로 칭호를 바꾸었다. 그리고 건강에 백관을 갖추고 사직(社稷)을 세웠으며, 연호를 '건무'로 바꾸었다. 같은 해 진민제가 살해되었다.
 

기원후 318

  • 이 소식이 이듬해(318) 건강에 전해지자, 백관들이 즉위를 권했다. 이에 사마예가 황위에 올라 연호를 '태흥'으로 바꾸었다. 즉위 당시 백관들이 옆에 있었다. 사마예는 특히 강동(江東)으로 거점을 옮기는 것을 돕고 강남 사대부의 지지를 얻는 데 크게 기여한 왕도에게 자신과 함께 어좌에 앉기를 청했으나, 왕도는 사양했다.
 

기원후 322

  • 영창(永昌) 원년(322), 대장군 겸 형주목(荊州牧) 왕돈이 무창(武昌)에서 군사를 일으켜 유외(劉隗)를 처벌한다는 명분으로 건강을 공격했다. 사마예는 사실 왕돈을 일찍부터 경계했다. 특히 전년도에는 대연(戴淵)을 정서장군(征西將軍)으로 삼아 합비(合肥, 지금의 안휘성 합비시)에 주둔시키고, 유외를 진북장군(鎮北將軍)으로 삼아 회음(淮陰, 지금의 화이안시 화이음구)에 주둔시켜 외원(外援)으로 삼았다. 왕돈이 거병했다는 소식을 듣자 사마예는 이들을 불러 건강을 수비하게 하고, 왕도를 전봉대도독(前鋒大都督)으로 삼았다. 자신 역시 직접 갑옷을 입고 성 밖에서 육군(六軍)을 사열하며 적극적으로 저항했다. 그러나 왕돈의 군대가 건강에 이르자 곧바로 석두성(石頭城)을 공격했고, 성을 지키던 주찰(周札)이 성문을 열어 맞이했다. 이에 왕돈은 석두성을 장악했다. 사마예는 이어서 여러 군대를 동원하여 석두성을 공격하도록 명령했으나, 왕돈에게 패배했다. 사마예는 왕돈을 막을 힘이 없어 결국 타협할 수밖에 없었고, 왕돈은 스스로 승상(丞相)이 되어 정치를 주도했다.
 

기원후 323

  • 왕돈에게 강요당한 사마예는 근심과 두려움으로 병을 얻었고, 같은 해 윤 11월 기축일(32313)에 세상을 떠났다. 이때 나이 마흔일곱 살이었다. 그는 건평릉(建平陵)에 안장되었고, 묘호(廟號)는 중종(中宗), 시호(諡號)는 원황제(元皇帝)이다.
 

가족관계

  • 증조부 : 서진 추존황제 고조(高祖) 선황제(宣皇帝) 사마의(司馬懿)
  • 증조모 : 복부인(伏夫人)
  • 조부 : 낭야무왕(瑯邪武王) 사마주(司馬伷)
  • 조모 : 낭야왕비 제갈씨(諸葛氏)
  • 부친 : 낭야공왕 사마근(瑯邪恭王 司馬覲)
  • 모친 : 낭야왕비 하후씨(瑯邪王妃 夏侯氏)
  • 후비
    • 원경황후(元敬皇后) 우맹모(虞孟母, ? ~ 312)
    • 간문선황태후(簡文宣皇太后) 정아춘(鄭阿春, ? ~ 326)
    • 예장군군 순씨(豫章郡君 荀氏, ? ~ 335)
    • 첩여 석씨(婕妤 石氏)
    • 재인 왕씨(才人 王氏)
  • 황자
    • 황태자 사마소(司馬紹) - 예장군군 소생. 동진 제2대 황제 명제(明帝).
    • 낭야효왕(瑯邪孝王) 사마부(司馬裒, 301~ 318) - 예장군군 소생.
    • 동해애왕(東海哀王) 사마충(司馬沖, 311~ 341) - 첩여 석씨 소생.
    • 무릉위왕(武陵威王) 사마희(司馬晞, 316~ 381) - 재인 왕씨 소생.
    • 낭야도왕(瑯邪悼王) 사마환(司馬煥, 317~ 318) - 간문선황태후 소생.
    • 낭야왕(瑯邪王) 사마욱(司馬昱) - 간문선황태후 소생. 동진 제8대 황제 간문제(簡文帝).
  • 황녀
    • 심양공주(尋陽公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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