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9월 25일 목요일

진민제 사마업(晉愍帝 司馬鄴, AD. 300~318년) : 서진의 마지막 황제(AD. 313~316년)

진민제 사마업(晉愍帝 司馬鄴, AD. 300~318) : 서진의 마지막 황제(AD. 313~316)

 
  • 이름 : 사마업(司馬鄴 또는 司馬業)
  • 시호(諡號) : 효민황제(孝愍皇帝) - 줄여서 민제(愍帝)
  • 출생 : 300
  • 사망 : 31827(향년 17~18)
  • 재위 : 31367~ 317
 

기원후 300출생

  • 사마업(司馬鄴)은 오왕(吳王) 사마안(司馬晏, 273-311)의 아들이자 진 무제(晉武帝)의 손자이며, 외할아버지는 순욱(荀勖, ?-289)이다.
  • ()는 언기(彥旗)이다.
  • 사마업은 먼저 숙부(叔父) 진왕(秦王) 사마간(司馬柬, 274-291)에게 입양되어 진왕(秦王)의 작위를 이었다.
 

기원후 308

  • 영가(永嘉) 2(308)에 그는 산기상시(散騎常侍)와 무군장군(撫軍將軍)에 봉해졌다.
 

기원후 311

  • 영가(永嘉) 5(311), 전조(前趙)의 군대가 낙양(洛陽)을 함락시키고 진회제(晉懷帝)를 사로잡았다. 이때 사마엽(司馬)의 생부인 사마안(司馬晏)과 형제들이 모두 죽임을 당했다.
  • 사마업(司馬鄴) 본인은 형양 밀현(密縣)의 행대(行臺)로 도망쳐 외숙부(外叔父)인 사공(司空) 순번(荀藩, ?-313)과 광록대부(光祿大夫) 순조(荀組, ?-315)에게 의탁했고, 그들의 옹립을 받았다. 밀현(密縣)이 적국인 한()나라와 가깝자, 그들은 행대와 함께 허창(許昌)으로 옮겨갔다.
  • 10, 예주자사(豫州刺史) 염정(閻鼎, ?-312)은 사마업(司馬鄴)을 받들어 관중(關中)으로 들어가 장안(長安)을 근거지로 삼아 사방을 호령하고자 했다. 하음령(河陰令) 부창(傅暢, ?-312)도 서신을 보내 설득했으나, 순번(荀藩), 순조(荀組), 사도좌장사(司徒左長史) 유추(劉疇, ?-312), 진군장사(鎮軍長史) 주예(周顗, 269-322), 사마(司馬) 이술(李述) 등을 포함한 지지자들과 군대들은 모두 산동(山東) 사람이었기에 서쪽으로 가는 것을 꺼려하여 도중에 뿔뿔이 흩어졌다. 유추(劉疇) 등은 도중에 반란을 꾀했지만, 염정(閻鼎)이 병사를 보내 추격했으나 붙잡지 못하고 유추(劉疇)와 중서령(中書令) 이경(李絙, ?-312) 등을 죽이며 난을 평정했다. 염정(閻鼎)은 사마업(司馬鄴)을 끼고 우거(牛車)를 타고 완성(宛城)에서 무관(武關)으로 갔으나, 상락(上洛)에서 도적을 만나 병사들이 흩어졌다. 남은 무리를 수습하여 남전(藍田)에 도착했고, 사람을 보내 옹주자사(雍州刺史) 가벽(賈疋, ?-312)에게 알리자, 가벽(賈疋)은 병사를 보내 마중했다. 12, 사마엽(司馬鄴) 등은 옹성(雍城)에 입성했고, 가벽(賈疋)은 보국장군(輔國將軍) 겸 풍익태수(扶風太守) 양종(梁綜)을 파견하여 병사들을 이끌고 수비하게 했다.
 

기원후 312

  • 영가(永嘉) 6(312) 4, 가벽(賈疋)은 장안(長安)을 탈환하여 사마업(司馬鄴)을 맞이해 입성하게 했다. 당시 패수(霸水)에서는 옥거북(玉龜)이 나타났고, 성 남쪽에서는 신마(神馬)가 울부짖었다.
  • 9, 염정(閻鼎)과 가벽(賈疋)은 사마업(司馬鄴)을 황태자(皇太子)로 받들어 등단하여 섭정(攝政)을 선포하고 행대(行臺), 종묘(宗廟), 사직(社稷)을 건립했으며, 천하에 대사령(大赦令)을 내렸다. 염정(閻鼎)은 태자첨사(太子詹事)가 되어 백규(百揆, 실제적인 승상)를 총섭(總攝)했다. 가벽(賈疋)에게는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을 더하고, 진주자사(秦州刺史) 남양왕(南陽王) 사마보(司馬保, ?-320)는 대사마(大司馬)에 임명되었다. 순번(荀藩)에게는 멀고 가까운 일을 모두 독섭(督攝)하게 했고, 순조(荀組)는 사례교위(司隷校尉) 겸 행예주자사(行豫州刺史)를 맡아 순번(荀藩)과 함께 개봉(開封)을 지키게 했다.
  • 12, 가벽(賈疋)은 싸움에서 패해 살해되었고, 사람들은 시평태수(始平太守) 국윤(麴允, ?-312)을 추대하여 옹주자사(雍州刺史)를 맡게 했다. 같은 달, 염정(閻鼎)은 경조태수(京兆太守) 양종(梁綜)과 권력을 다투다가 양종(梁綜)을 죽였다. 국윤(麴允)은 무이호군(撫夷護軍) 색심(索綝, ?-316)과 풍익태수(馮翊太守) 양숙(梁肅)과 병력을 합쳐 염정(閻鼎)을 공격했고, 염정(閻鼎)은 도망치다가 살해되었다.
 

기원후 313

  • 영가(永嘉) 7(313), 진회제(晉懷帝)가 평양(平陽)에서 죽임을 당했다. 4월에 그 소식이 장안(長安)에 전해지자 사마업(司馬鄴)은 진회제(晉懷帝)를 위해 애도했고, 장안(長安)에서 황위에 즉위하여 연호를 건흥(建興)으로 고쳤으니, 이가 진민제(晉愍帝)이다.
  • 위장군(衛將軍) 양분(梁芬)은 사도(司徒)가 되었고, 국윤(麴允, ?-316)은 상서좌복야(尚書左僕射) 겸 녹상서사(錄尚書事)가 되었으며, 경조태수(京兆太守) 색심(索綝, ?-316)은 상서좌복야(尚書左僕射) 겸 영이부(領吏部), 경조윤(京兆尹)이 되었다.
  • 진민제(晉愍帝)가 즉위할 때, 서진(西晉)은 이미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능력이 없었다. 또한 장안(長安)에는 전조(前趙)와 싸울 만한 물자도 없었고, 인구는 백 호()에 미치지 못했으며, 수레는 겨우 네 대뿐이었다. 관복과 인신(印綬)도 부족했다. 진민제(晉愍帝)는 얼마 지나지 않아 색심(索綝)을 위장군(衛將軍) 겸 영태위(領太尉)로 삼았고, 군국의 대사는 국윤(麴允)과 색심(索綝) 두 장수가 주도했다. 4, (, 전조)의 중산왕(中山王) 유요(劉曜, ?-329)와 사예교위(司隷校尉) 교지명(喬智明, ?-313)은 평서장군(平西將軍) 조염(趙染, ?-314)과 합류하여 장안(長安)을 공격했고, 국윤(麴允)은 황백성(黃白城)에 주둔하여 방어에 나섰다.
  • 5, 진민제(晉愍帝)는 조서를 내려 사마보(司馬保, ?-320)를 우승상(右丞相) 겸 대도독(大都督)으로 삼아 섬서(陝西) 지방의 여러 군사들을 감독하게 했다. 강남(江南)과 그 인근의 광대한 지역을 장악한 낭야왕(琅邪王) 사마예(司馬睿, 276-322)를 좌승상(左丞相) 겸 대도독(大都督)으로 삼아 섬동(陝東) 지방의 여러 군사들을 감독하게 했다. 적들을 소탕하고 진회제(晉懷帝)의 자궁(梓宮, 황제의 관)을 받들어 모셔오라는 조서를 내렸다. (() 두 주()30만 병력을 동원하여 평양(平陽)을 공격하게 하고, 사마보(司馬保)에게는 진(((() 지역의 군사 30만 명을 이끌고 장안(長安)으로 오게 했으며, 사마예(司馬睿)에게는 그가 거느린 정예 병력 20만 명을 이끌고 낙양(洛陽)으로 와서 국왕을 구원하도록 했다. 하지만 사마보(司馬保)와 사마예(司馬睿)는 그에게 명목상의 충성만을 표했을 뿐, 실제적인 도움은 제공하지 않았다.
  • 6, 진민제(晉愍帝)는 전중도위(殿中都尉) 유촉(劉蜀)과 소마(蘇馬)를 보내 사마예(司馬睿)에게 제때 군을 진격시키도록 조서를 내렸다.
  • 8, 유촉(劉蜀)이 건강(建康)에 도착하자 사마예(司馬睿)는 막 강남을 평정하여 북벌에 힘쓸 여유가 없다는 핑계로 거절했다.
  • 9, 국윤(麴允)이 거듭 패하자 진민제(晉愍帝)는 조서를 내려 색심(索綝)을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으로 삼아 병력을 이끌고 지원하게 했다.
  • 10, 조염(趙染)이 유요(劉曜)에게 국윤(麴允)의 대군이 밖에 주둔하여 장안이 텅 비었다고 말하자, 유요(劉曜)는 조염(趙染)에게 정예 기병 5천을 이끌고 장안(長安)을 기습하게 했고, 그들은 외성(外城)으로 진입했다. 진민제(晉愍帝)는 사안루(射雁樓)로 달아났다. 조염(趙染)은 용미도(龍尾道)와 여러 진영을 불태우고, 1천여 명을 살해하고 약탈한 후 퇴각하여 소요원(逍遙園)에 주둔했다. 장군(將軍) 국감(麴鑒)5천 명을 이끌고 장안을 구원하러 나섰다가 조염(趙染)을 추격하여 영무(零武)에서 크게 패했다. 유요(劉曜)는 국윤(麴允)이 거듭 패했기에 적을 경시했지만, 오히려 국윤(麴允)의 야습에 패하여 퇴각했고, 교지명(喬智明)은 살해되었다.
 

기원후 314

  • 건흥(建興) 2(314) 2, 진민제(晉愍帝)는 조서를 내려 사공(司空) 겸 유주자사(幽州刺史) 왕준(王浚, ?-314)을 대사마(大司馬)로 삼고, 위장군(衛將軍) 순조(荀組)를 사공(司空)으로 삼았다. 량주자사(涼州刺史) 장궤(張軌, 255-314)를 태위(太尉)로 삼고 서평군공(西平郡公)에 봉했으며, 병주자사(并州刺史) 유곤(劉琨, 271-318)을 대장군(大將軍)으로 삼았다. 장궤(張軌)는 나이가 많았으므로, 실제로는 그의 아들 장식(張寔, 276-320)이 일을 주관했다. 서진(西晉)은 특별히 부자사(副刺史) 직책을 두어 장식(張寔)이 담당하게 했다.
  • 4월 갑진일, 지진이 일어났다.
  • 5, (, 전조) 군대가 장안(長安)을 기습 공격했다.
  • 6, 유요(劉曜)와 조염(趙染)이 신풍(新豐)의 여러 현()을 침범했으나, 안동장군(安東將軍) 색심(索綝)에게 격파되었다.
  • 7, 유요(劉曜)와 조염(趙染) 등이 다시 장안(長安)을 압박했고, 영군장군(領軍將軍) 국윤(麴允)이 이들을 토벌하여 격파했다. 조염(趙染)은 흐르는 화살에 맞아 죽었다. (, 전조)의 공격은 실패했지만, 이는 진민제(晉愍帝) 정권의 미약한 자위 능력을 드러냈다. 장궤(張軌) 부자만이 때때로 소규모 병력과 보급품을 장안(長安)에 보냈다. 9, 선우(單于) 대공(代公) 탁발의려(拓跋猗盧, ?-316)가 사신을 보내 말을 헌상했다.
 

기원후 315

  • 건흥(建興) 3(315) 정월, 진민제(晉愍帝)는 시중(侍中) 송철(宋哲)을 평동장군(平東將軍)으로 삼아 화음(華陰)에 주둔시켰다.
  • 2, 사마예(司馬睿, 276-322)를 대도독(大都督) 겸 독중외제군사(督中外諸軍事)로 승진시켰다. 사마보(司馬保, ?-320)는 상국(相國)이 되었고, 순조(荀組, ?-315)는 태위(太尉)가 되었으며, 유곤(劉琨, 271-318)은 사공(司空)이 되었다. 탁발의려(拓跋猗盧, ?-316)를 대왕(代王)으로 봉했다.
  • 4, 대사면령을 내렸다.
  • 6, () 왕조의 패릉(霸陵), 두릉(杜陵) 및 박태후릉(薄太后陵)이 도굴당했는데, 셀 수 없이 많은 금옥과 채백(彩帛)이 파내졌다. 조정은 남은 것들을 수집하여 내부(內府)를 충실히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같은 달, 지진이 발생하자 진민제(晉愍帝)는 다시 대사면령을 내리고, 옹주(雍州)에 능묘를 수리하도록 칙령을 내렸다.
  • 9, 유요(劉曜, ?-329)가 북지군(北地郡)을 침범하자 진민제(晉愍帝)는 영군장군(領軍將軍) 국윤(麴允, ?-316)에게 방어하도록 명령했다. 진민제(晉愍帝)는 사마보(司馬保)에게 군사를 요청했다. 사마보(司馬保)의 측근들은 장사가 단완(壯士斷腕, 용사가 자신의 팔을 자르는 것)의 예를 들며 농도(隴道)를 끊어 변화를 지켜보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종사중랑(從事中郞) 배심(裴諶)"뱀이 머리를 물었는데, 머리를 자를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이에 사마보(司馬保)는 근왕(勤王)하기로 결정하고 진군장군(鎮軍將軍) 호숭(胡崧)을 전봉도독(前鋒都督)으로 삼아 여러 군대가 집결한 후 병력을 파견하기로 했지만, 결국 실행되지 않았다. 색심(索綝, ?-316)은 진민제(晉愍帝)가 사마보(司馬保)의 꼭두각시가 될 것을 우려하여 국윤(麴允)이 제안한 진민제(晉愍帝)를 모시고 사마보(司馬保)에게 의탁하자는 계획도 거절했다. 이로 인해 장안(長安) 서쪽 지역도 더 이상 조정에 공물을 바치지 않게 되었고, 백관들은 배가 고파 들판의 야생 곡물로 허기를 달랬다.
  • 10, 국윤(麴允)은 청백성(青白城)을 공격했다. 예주목(豫州牧) 겸 정동장군(征東將軍) 색심(索綝)을 상서복야(尚書僕射) 겸 도독궁성제군사(都督宮城諸軍事)로 삼았다. ()군이 풍익(馮翊)을 함락시키자 태수(太守) 양숙(梁肅)은 만년현(萬年縣)으로 도망쳤다.
  • 12, 량주(涼州)의 병사 장빙(張冰)이 옥새를 얻었는데, 그 위에는 '황제행새(皇帝行璽)'라고 새겨져 있었다. 그는 이를 량주자사(涼州刺史) 장식(張寔, 276-320)에게 보냈다. 장식(張寔)은 이것이 신하가 가질 물건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12월에 사자를 보내 장안(長安)으로 보냈다.
 

기원후 316

  • 건흥(建興) 4(316) 4, 장식(張寔)은 보기(步騎) 5천 명을 수도()로 보냈다.
  • 6월에는 큰 메뚜기 재해가 발생했다.
  • 7, 유요(劉曜)는 다시 군대를 일으켜 장안(長安)을 공격했고, 북지군(北地郡)을 공격했다. 국윤(麴允)은 보기(步騎) 3만 명을 이끌고 구원에 나섰으나, 유요(劉曜)에게 격퇴당했으며, 북지군(北地郡)이 함락되자 태수(太守) 국창(麴昌)은 장안(長安)으로 도망쳤다. 유요(劉曜)는 경양(涇陽)까지 진격했고, 관중(關中) 위북(渭北) 지역의 서진(西晉) 통치 하에 있던 여러 성읍들이 모두 무너졌다. 건위장군(建威將軍) 노충(魯充), 산기상시(散騎常侍) 양위(梁緯), 소부(少府) 황보양(皇甫陽)이 모두 살해되었다.
  • 8, 유요(劉曜)는 장안(長安)을 포위 공격하며 장안(長安)의 식량 보급로를 끊었고, 장안(長安) 안팎이 단절되었다.
  • 9, 안정태수(安定太守) 초숭(焦嵩), 신평태수(新平太守) 죽회(竺恢), 홍농태수(弘農太守) 송철(宋哲)이 원군을 이끌고 도착했다. 산기상시(散騎常侍) 화집(華輯)은 경조(京兆), 풍익(馮翊), 홍농(弘農), 상락(上洛)의 네 군()의 병력을 감독하며 파상(霸上)에 주둔했지만, 모두 망설이며 유요(劉曜)와 교전하려 하지 않았다. 국윤(麴允)과 공경(公卿)들은 할 수 없이 작은 성(小城)으로 물러나 수비했다. 사마보(司馬保)가 파견한 호숭(胡崧)은 원군을 이끌고 유요(劉曜)를 격파했다. 그러나 그는 조정이 다시 부흥하면 국윤(麴允)과 색심(索綝)의 세력이 더욱 커질 것을 우려하여, 성 서쪽의 여러 군 병력을 이끌고 위수(渭水) 북쪽 차마교(遮馬橋)에 주둔하며 진격하지 않고, 회리(槐里)로 회군했다.
  • 10, 장안(長安)에 기근이 들어 성 안에서는 쌀 한 말의 가격이 금 두 냥에 이르렀고, 사람들은 서로를 잡아먹어 죽은 사람이 태반이었다. 도망치는 사람들을 막을 수 없었고, 오직 량주(涼州)의 원군 천 명만이 굳건히 수비했다. 국윤(麴允)은 태창(太倉)에서 술 빚는 데 쓰는 곡병(麴餅) 수십 개를 찾아내 죽을 만들어 진민제(晉愍帝)에게 바쳤고, 진민제(晉愍帝) 또한 모두 먹었다.
  • 11, 진민제(晉愍帝)는 울면서 국윤(麴允)에게 말했다. "궁지에 몰려 이토록 외부에 구원도 없으니, 비록 사직(社稷)을 위해 죽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지만, 나는 치욕을 참고 항복하여 백성들을 살리기로 결정했다." 그는 탄식하기를 "내 일을 망친 자는 국() 공과 색() 공 두 사람이다!"라고 했다. 그는 시중(侍中) 종창(宗敞)을 파견하여 항복 표문을 올렸다. 건흥(建興) 41111(3161211), 진민제(晉愍帝)는 양거(羊車)를 타고 몸에 옷을 벗고 옥으로 된 구슬을 물고 관()을 든 채 동문으로 나아가 항복했다. 신하들은 울면서 수레에 올라 그의 손을 잡았고, 모두 비통함을 금치 못했다. 어사중승(御史中丞) 길랑(吉朗)은 자신의 잘못을 자책하고, 그를 따라가는 것을 차마 하지 못하고 한()나라를 섬기는 것을 치욕으로 여겨 자살했다. 진민제(晉愍帝) 즉위 초에 "천자는 어디에 있는가, 콩밭 속에 있네"라는 동요가 있었다. 건흥(建興) 4, 진민제(晉愍帝)가 유요(劉曜)에게 항복할 때, 그는 성 동쪽의 콩밭 벽 속에 있었다. 유요(劉曜)는 관()을 태우고 항복을 받아들였다. 유요(劉曜)는 종창(宗敞)을 시켜 진민제(晉愍帝)를 모시고 궁으로 돌아가게 했으며, 이틀 후 진민제(晉愍帝)와 공경(公卿)들을 군영으로 옮겼다가 이후 한()나라의 도성 평양(平陽)으로 보냈다. 상서(尚書) 양윤(梁允), 시중(侍中) 양준(梁浚), 산기상시(散騎常侍) 엄돈(嚴敦), 좌승(左丞) 장진(臧振), 황문시랑(黃門侍郎) 임파(任播), 장위(張偉), 두만(杜曼) 및 여러 군수(郡守)들이 모두 유요(劉曜)에게 살해되었고, 화집(華輯)은 남산(南山)으로 도망쳤다.
  • 12, 사마예(司馬睿)는 장안(長安)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출병하고 사방에 격문(檄文)을 전하여 북벌(北伐) 날짜를 정했다.
  • 진민제(晉愍帝)는 장안(長安)에 도읍을 정한 이래로, 패망할 때까지 교묘(郊廟)를 건립하지 못했다. 건흥(建興) 4, 양분(梁芬)은 진민제(晉愍帝)의 생부(生父) 사마안(司馬晏)을 추존할 것을 논의했지만, 진민제(晉愍帝)는 따르지 않았다. 색심(索綝) 등 또한 조위(曹魏)의 제도를 인용하여 불가하다고 보았으므로, 사마안(司馬晏)은 다만 태보(太保)로 추증되었다.
 

()나라에 포로로 잡힌 후

  • ()나라 황제 유총(劉聰, ?-318)이 광극전(光極殿)에 행차하자, 진민제(晉愍帝)는 그 앞에 엎드려 절했다. 국윤(麴允, ?-316)은 땅에 엎드려 통곡하며 부축을 받고도 일어서지 못했다. 유총(劉聰)은 분노하여 그를 가두었고, 국윤(麴允)은 자살했다. 색심(索綝, ?-316) 또한 한()나라 군대에 투항하여 관직을 얻으려 했던 이유로 유총(劉聰)에게 진실(晉室)에 충성하지 않았다고 여겨져 동시(東市)에서 살해되었다. 유총(劉聰)은 진민제(晉愍帝)를 광록대부(光祿大夫)로 삼고 회안후(懷安侯)에 봉했다.
 

기원후 317

  • 건흥(建興) 5(317) 정월 경자일(庚子), 세 개의 태양이 함께 나타났고 무지개가 하늘 가득했다. 태양에는 겹무리(重暈)가 있었고 좌우에 양이(兩珥)가 나타났다. 점술가들은 백홍(白虹)은 병란(兵亂)의 징조이며, 여러 태양이 나타나는 것은 천하에 병화(兵禍)가 있을 징조라고 말했다. 30일이 지나지 않아 제후들이 다투어 황제가 되고, 태양에 겹무리가 나타나면 천하에 왕이 황제를 칭하고, 겹무리에 태양 이()가 있으면 천하에 제후가 황제를 칭할 것이라고 했다. 천문학자 진탁(陳卓)은 천하가 셋으로 나뉨(三分)을 예언했다.
  • 2, 송철(宋哲)은 건강(建康)으로 도망쳐 진민제(晉愍帝)의 조명을 받아 사마예(司馬睿, 276-322)가 만기(萬機)를 통섭(統攝)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 3, 사마예(司馬睿)는 진왕(晉王)이라 칭하고 제정(制政)을 이어받아 연호를 건무(建武)로 개원했다. ()나라 황제 유총(劉聰)과 성한(成漢) 황제 이웅(李雄, 274-334)도 삼국시대 조위(曹魏)와 촉한(蜀漢)의 강역을 얻게 되자, 연이어 교전했다.
  • 11, 유총(劉聰)은 진민제(晉愍帝)에게 거기장군(車騎將軍)의 직무를 대신하게 하여, 융복(戎服)을 입고 극창(戟矛)을 손에 든 채 앞에서 길을 열게 했다. 백성들이 길가에 모여 구경하며 어떤 사람은 그를 가리키며 "이 사람이 옛 장안(長安)의 천자(天子)이다"라고 말했다. 일부 서진(西晉)의 옛 유민(遺民)들은 옛 군주가 굴욕을 당하는 것을 보고 슬피 울거나 눈물을 흘렸다. 유총(劉聰)은 이를 듣고 매우 싫어했다.
  • 태자(太子) 유찬(劉粲, ?-318)은 진민제(晉愍帝)를 죽여 후환을 없애야 한다고 건의했다. 유총(劉聰)은 건흥(建興) 원년에 막 유민(庾珉)을 죽였는데, 또 사람을 죽일 수는 없다며 다시 지켜보자고 말했다.
  • 12, 유총(劉聰)은 광극전(光極殿)에서 연회를 열어 진민제(晉愍帝)에게 술을 따르고 술잔을 씻게 했다. 심지어 화장실에 갈 때에는 변기 뚜껑을 들게 했다. 자리에 있던 옛 서진(西晉)의 대신들 대부분은 소리 내어 울었고, 상서랑(尚書郎) 신빈(辛賓)은 일어나 진민제(晉愍帝)를 안고 통곡하다가 유총(劉聰)의 명령으로 끌려나가 참살당했다. ()나라 장수 조고(趙固)는 진()나라에 투항하여 유찬(劉粲)을 사로잡아 진민제(晉愍帝)와 교환하겠다고 공언했다. 유찬(劉粲)은 진민제(晉愍帝)가 죽어야 백성들이 바랄 것이 없어 이모(李矩)나 조고(趙固)에게 이용되지 않을 것이라는 상소를 올렸다.
 

기원후 318

  • 건흥(建興) 51220(31827), 진민제(晉愍帝)는 평양(平陽)에서 살해되었다. (일설에는 진민제(晉愍帝)7월에 살해되었다고 한다.)
 

기원후 319

  • 다음 해 3, 이 비보가 건강(建康)에 전해지자 사마예(司馬睿)는 여러 사람들의 권유를 받아 즉위하여 동진(東晉)을 건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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