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의(司馬懿, AD. 179~251년) : 위나라의 정치가
- 이름 : 사마의(司馬懿) - 조위(曹魏)의 중신, 진(晉)의 초석
- 자(字) : 중달(仲達)
- 작위 : 무양후(舞陽侯) - 생전 봉작
- 시호 : 선황제(宣皇帝) - 사후 진나라에서 추존
- 묘호 : 고조(高祖) - 진나라 황실의 시조로 추존됨
- 출생 : 179년 / 한나라 하내군 온현(河南省 溫縣) 출생
- 사망 : 251년 9월 7일 / 낙양(洛陽)에서 사망
- 묘소 : 맹진현(孟津縣) 하남성(河南省)
【기원후 179년】
- 사마의(司馬懿)는 사마방(司馬防)의 둘째 아들로, 한(漢) 영제(漢靈帝) 광화(光和) 2년(179년)에 태어났다.
- 사마의(司馬懿)의 가문은 여러 대에 걸쳐 관직을 지낸 명문가이다. 그의 고조부 사마균(司馬鈞, 司馬鈞)은 한(漢) 안제(漢安帝) 시대의 정서장군(征西將軍)이었고, 증조부 사마량(司馬量, 司馬量)은 예장태수(豫章太守)를 지냈으며, 조부 사마준(司馬儁, 司馬儁)은 영천태수(潁川太守)였다. 그리고 아버지 사마방(司馬防, 司馬防)은 경조윤(京兆尹)을 역임했다. 사마방(司馬防)에게는 여덟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아들들의 자(字)에 모두 ‘달(達)’ 자가 들어가 있어, 당시에는 ‘사마팔달(司馬八達)’로 불렸다고 한다.
【어린 시절】
- 사마의(司馬懿)는 소년 시절부터 지략을 품고 있었다. 당시 동한(東漢) 말기는 혼란스러운 시대였고, 사마의(司馬懿)는 “늘 세상을 걱정하는 마음을 가슴에 품었다(常慨然有憂天下心)”고 전해진다. 상서(尚書) 최염(崔琰)은 사마의(司馬懿)의 형인 사마랑(司馬朗)과 친분이 있었는데, 사마랑(司馬朗)에게 “네 아우는 총명하고 사리에 밝으며, 일 처리가 과단성이 있고, 빼어난 기풍을 가지고 있어 네가 미치지 못할 존재이다”라고 평가했다.
【기원후 201년】
- 건안(建安) 6년(201년), 사마의(司馬懿)는 군(郡)에서 계연(計掾)으로 천거되었다. 당시 사공(司空)이었던 조조(曹操)는 그의 명성을 듣고 사람을 보내 자신의 관부에서 일할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사마의(司馬懿)는 한(漢)나라의 국운이 이미 쇠약해졌음을 보고, 조조(曹操) 밑에서 일하기를 원치 않았다. 그는 자신이 관절염인 ‘풍비(風痹)’에 걸려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핑계를 댔다. 조조(曹操)는 이를 믿지 않고 밤에 사람을 보내 탐문하게 했는데, 사마의(司馬懿)는 누워서 미동도 하지 않아 정말 풍비에 걸린 듯 보였다.
【기원후 208년】
- 건안(建安) 13년(208년), 조조(曹操)가 승상(丞相)이 된 후 강압적인 방법으로 사마의(司馬懿)를 문학연(文學掾)으로 등용했다. 조조(曹操)는 사신에게 “사마의(司馬懿)가 만약 계속 주저한다면 체포하라”고 일렀다. 사마의(司馬懿)는 두려움을 느껴 어쩔 수 없이 취임했다.
- 조조(曹操)는 사마의(司馬懿)를 태자(太子) 중서자(中庶子)로 삼아 조비(曹丕)를 보좌하게 했으며, 그를 공자들과 어울리도록 했다. 이후 그는 황문시랑(黃門侍郎), 의랑(議郎), 승상동조속(丞相東曹屬), 승상주부(丞相主簿) 등의 직책을 역임했다.
- 《위략(魏略)》에 따르면 등용 과정이 약간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사마의(司馬懿)가 학문을 좋아했는데, 조홍(曹洪, 曹洪)은 자신이 재주가 부족하다고 생각하여 사마의(司馬懿)에게 도움을 받으려 했다. 그러나 사마의(司馬懿)는 조홍(曹洪)과 어울리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병이 나서 지팡이를 짚을 정도로 아파 조홍(曹洪)을 만날 수 없다고 핑계를 댔다. 이에 조홍(曹洪)은 사마의(司馬懿)를 원망하여 조조(曹操)에게 고자질했고, 조조(曹操)가 사마의(司馬懿)를 소집하자 사마의(司馬懿)는 즉시 지팡이를 버리고 조조(曹操)를 만나 그를 위해 일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 《진서(晉書)》에는 조조(曹操)가 점차 사마의(司馬懿)가 “웅대한 뜻을 품고 있다(有雄豪志)”는 것을 알아차렸고, 또 그가 “늑대의 상(狼顧之相)”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하여 마음속으로 매우 꺼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 인해 조조(曹操)는 조비(曹丕)에게 “사마의(司馬懿)는 신하로서 만족할 사람이 아니니, 반드시 우리 가문의 일에 관여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조비(曹丕)와 사마의(司馬懿)의 관계가 워낙 좋았기에, 사마의(司馬懿)는 별 탈 없이 지낼 수 있었다.
- 사마의(司馬懿)는 황문시랑(黃門侍郎), 의랑(議郎), 승상동조속(丞相東曹屬), 승상주부(丞相主簿) 등을 차례로 역임했으며, 조조(曹操)를 따라 장로(張魯)를 정벌했다. 사마의(司馬懿)는 유비(劉備)가 막 익주(益州)를 점령하여 기반이 튼튼하지 않음을 보고, 조조(曹操)에게 이어서 유비(劉備)를 공격할 것을 권했지만, 조조(曹操)는 이를 듣지 않았다. 조조(曹操)가 군대를 돌린 후 사마의(司馬懿)는 조조(曹操)를 따라 제2차 유수구(濡須口) 전투에 참전했다.
【기원후 215년】
- 건안(建安) 20년(215년), 조조(曹操)가 장로(張魯) 세력을 평정한 후, 사마의(司馬懿)와 유엽(劉曄)은 진언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유비(劉備)는 일시적으로 간사한 수단을 써서 유장(劉璋)의 땅을 빼앗았을 뿐이다. 촉(蜀)의 민심은 아직 그에게 돌아가지 않았고 또한 강릉(江陵)을 차지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지금이 바로 한중(漢中)으로 진군하기에 가장 적절한 시기이다. 반드시 익주(益州)의 민심을 동요시킬 수 있고, 이어서 그 세력을 와해시킬 수 있을 것이니, 절대로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뜻밖에도 조조(曹操)는 반박했다. “방금 농우(隴右)를 평정했는데 곧바로 촉(蜀)을 정벌하려 하는 것은 너무 진취적인 것이다.” 그리고 나서 대군은 퇴각했다.
- 후에 촉(蜀)에서 투항한 자가 밝히길 “한중(漢中)으로 진군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유비(劉備)의 군중은 인심이 불안해졌고, 참수형에 처한다 해도 안정시킬 수 없었다.” 이 기회를 놓친 후, 조조(曹操)는 2년 후에야 한중(漢中) 전투를 일으킬 수 있었는데, 이때 유비(劉備)의 군심은 이미 안정되어 있었고, 결국 한중(漢中)은 유비(劉備)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기원후 219년】
- 건안(建安) 24년(219년), 사마의(司馬懿)는 승상군사마(丞相軍司馬)로 임명되어 형주자사(荊州刺史) 호수(胡修)가 거칠고, 남향태수(南鄉太守) 부방(傅方)이 교만하고 사치스러워 모두 변방 수비를 맡길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지적했으나, 조조(曹操)는 이를 중시하지 않았다.
- 7월, 관우(關羽)가 형양(荊襄)을 공격하여 위(魏)의 장수 조인(曹仁)을 포위했고, 물을 이용해 우금(于禁)의 7군을 수몰시켰다. 호(胡)와 부(傅) 두 사람은 과연 기회를 틈타 유(劉)에게 투항했다.
- 한헌제(漢獻帝)가 허도(許都)에 있었는데, 번성(樊城)과 매우 가까워서 조조(曹操)는 위협을 느끼고, 관우(關羽)의 예봉을 피하기 위해 한때 하북(河北)으로 천도할 준비를 했다. 장제(蔣濟)와 사마의(司馬懿) 등은 당시 만류하며 말했다. “우금(于禁)은 홍수에 의해 수몰된 것이지, 전투에서 패배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국가의 대계는 손상되지 않았다. 지금 천도하는 것은 적에게 약점을 보이는 것이고, 또한 민심을 불안하게 한다. 유비(劉備)와 손권(孫權)은 겉으로는 친하지만 속으로는 서로 멀다. 지금 관우(關羽)가 득의양양하니, 손권(孫權)은 반드시 더욱 기분이 좋지 않을 것이다. 이 일을 손권(孫權)에게 알리면, 호랑이 싸움을 산에서 구경하는 격이 되어, 번성(樊城)의 포위는 저절로 풀릴 것이다.” 조조(曹操)는 그의 계책을 따랐고, 손권(孫權)은 과연 여몽(呂蒙)을 파견하여 강릉(江陵)을 습격하게 했다. 여몽(呂蒙)은 상선으로 위장한 계책을 써서 관우(關羽)가 설치한 봉화대를 연이어 무너뜨리고 많은 성읍을 점령했다. 관우(關羽)는 어쩔 수 없이 귀환하여 구원하게 되었고, 위(魏)군은 기회를 틈타 추격하여 관우(關羽)는 대량의 병력을 잃고, 결국 맥성(麥城) 부근에서 동오(東吳)의 매복에 걸려 패망했다. 조손(曹孫) 연맹이 승리하여 번성(樊城)의 위기는 해제되었다.
- 서황(徐晃)이 관우(關羽)를 물리친 후, 조조(曹操)는 형주(荊州)와 그 부근의 백성들을 싫어하여 그들을 모두 이주시키려 했다. 사마의(司馬懿)는 다음과 같이 생각했다. “형초(荊楚) 사람들은 경솔하고 방자하여 쉽게 동요하고 안정시키기 어렵다. 관우(關羽)가 새로 패배했으니, 악행을 저지른 자들은 숨어서 관망하고 있다. 지금 선량한 자들을 이주시키면, 그들의 마음을 상하게 할 뿐 아니라, 떠난 자들이 다시 돌아오지 못하게 될 것이다.” 조조(曹操)는 이를 따라 백성들을 이주시키지 않았다. 숨어 도망간 자들은 과연 모두 돌아와 귀화했다.
【기원후 220년】
- 조비(曹丕)가 위왕(魏王)의 자리에 오른 후, 사마의(司馬懿)를 하진정후(河津亭侯)에 봉하고, 승상장사(丞相長史)로 전임시켰다.
- 당시 손권(孫權)이 서쪽으로 군대를 이끌고 왔는데, 조정에서는 번성(樊城)과 양양(襄陽)에 곡식이 없어 방어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당시 양양(襄陽)을 진수하던 조인(曹仁)을 완(宛)으로 불러들이기를 요청했다. 사마의(司馬懿)는 이에 대해 “손권(孫權)이 최근 관우(關羽)를 격파했으므로, 이는 위(魏)와 친교를 맺고자 할 때이니 반드시 환란을 일으키지는 않을 것이다. 양양(襄陽)은 수륙의 요충지이자 도적을 막는 요해처이므로, 버려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조인(曹仁)은 번성(樊城)과 양양(襄陽)을 불태우고 버렸으나, 손권(孫權)은 과연 침범하지 않았고, 조비(曹丕)는 이를 후회했다.
- 조위(曹魏)가 한(漢)나라를 대신하여 건국된 후, 사마의(司馬懿)는 상서(尚書)가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독군(督軍)과 어사중승(御史中丞)으로 전임되었고, 안국향후(安國鄉侯)에 봉해졌다.
【기원후 221년】
- 황초(黃初) 2년(221년)에는 시중(侍中)과 상서우복야(尚書右僕射)로 승진했다.
【기원후 226년】
- 황초(黃初) 7년(226년), 조비(曹丕)가 세상을 떠났다. 손권(孫權)은 이 소식을 듣고 8월에 병사를 이끌고 위(魏)를 공격했다. 그는 오(吳)의 좌장군(左將軍) 제갈근(諸葛瑾) 부대에 명령하여 병력을 두 갈래로 나누어 양양(襄陽)을 공격하게 하고, 자신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강하군(江夏郡)을 공격했다. 손권(孫權)이 이끄는 군대는 위(魏)군에게 패하여 병력을 철수시켰다. 사마의(司馬懿)는 제갈근(諸葛瑾)을 격파하고, 오(吳)의 장수 장패(張霸)를 참살하며 천여 급의 목을 베었다. 같은 해 12월, 사마의(司馬懿)는 표기장군(驃騎將軍)으로 승진했다.
【기원후 227년】
- 위(魏) 태화(太和) 2년(227년), 사마의(司馬懿)는 완성(宛城)의 병력을 이끌고 맹달(孟達,)의 위(魏)에 대한 반란을 신속하게 평정하며 다시 한번 군사적 재략을 드러냈다. 맹달(孟達)은 원래 촉한(蜀漢)의 항복한 장수였는데, 조비(曹丕)는 그에게 신성(新城, 지금의 호북성 방현)을 지키게 했다. 조비(曹丕)가 죽자, 맹달(孟達)은 위(魏)에 반역하여 촉(蜀)으로 돌아가려 했다.
- 사마의(司馬懿)는 이 소식을 알아챈 후, 한편으로는 맹달(孟達)을 안심시키기 위해 서신을 보내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군대를 보내 토벌에 나섰고, 8일 만에 천2백 리를 행군했다. 맹달(孟達)은 제갈량(諸葛亮)에게 보낸 서신에서 사마의(司馬懿)가 군대를 이끌고 토벌하러 오려면 최소 한 달은 걸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사마의(司馬懿)가 20여 일이나 일찍 도착했을 때, 그의 반란 계획은 완전히 뒤죽박죽이 되었다. 사마의(司馬懿)는 총 16일 만에 상용(上庸)을 격파하고 맹달(孟達)을 참살했다.
【기원후 230년】
- 위(魏) 태화(太和) 4년(230년), 조위(曹魏)는 사마의(司馬懿)를 서성(西城)으로, 장합(張郃)을 자오도(子午道)로, 조진(曹真)을 사곡(斜谷)으로 보내 세 갈래 길로 한중(漢中)을 공격했다. 제갈량(諸葛亮)은 군대를 이끌고 서정(西征)을 나섰고, 이엄(李嚴)에게 2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한중(漢中)으로 가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한중(漢中) 합공은 비로 인해 중단되었다.
【기원후 231년】
- 위(魏) 태화(太和) 5년(231년) 봄, 제갈량(諸葛亮)은 네 번째 북벌(北伐)을 시작했다. 위 명제(魏明帝)는 사마의(司馬懿)에게 장안(長安)에 주둔하도록 했다. 제갈량(諸葛亮)은 먼저 기산(祁山)을 포위하고, 선비족 가비능(軻比能, 軻比能)을 끌어들여 호응하게 했다. 사마의(司馬懿)는 비요(費曜), 대령(戴淩) 등에게 4천 명의 병력을 남겨 상규(上邽)를 지키게 하고, 나머지 병력은 모두 기산(祁山)으로 구원하러 보냈으며, 자신은 대군을 이끌고 유미(隃麋)로 향했다. 사마의(司馬懿)가 제갈량(諸葛亮)이 기산(祁山)을 주력으로 공격할 것이라고 생각할 때, 뜻밖에도 제갈량(諸葛亮)은 반대로 행동했다. 사마의(司馬懿)의 대군이 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병력을 나누어 기산(祁山) 공격을 계속하게 하고, 자신은 주력을 이끌고 기습적으로 상규(上邽)를 공격하여 사마의(司馬懿)를 맞이했다. 곽회(郭淮), 비요(費曜) 등이 제갈량(諸葛亮)을 공격했으나, 제갈량(諸葛亮)에게 크게 패했다. 사마의(司馬懿)는 상규(上邽) 동쪽에서 제갈량(諸葛亮)과 마주쳤고, 제갈량(諸葛亮)은 계속 후퇴하며 사마의(司馬懿)를 노성(鹵城)과 기산(祁山)으로 유인했다. 사마의(司馬懿)가 도착하자 산에 올라 진을 치고 싸우려 하지 않았다. 군장수들이 여러 번 전투를 요청했지만, 사마의(司馬懿)는 허락하지 않았고, “공은 촉을 호랑이처럼 두려워하는데, 천하의 비웃음을 어떻게 감당하겠는가!”라는 비웃음을 들었다. 장수들의 거듭된 요청에 따라 5월 18일, 사마의(司馬懿)는 촉(蜀) 장수 왕평(王平)의 부대를 습격하도록 명령했으나, 제갈량(諸葛亮)의 역습을 받아 위(魏)군은 위연(魏延), 고상(高翔), 오반(吳班) 등에 의해 격파되고, 영채로 후퇴하여 지키게 되었다.
- 6월, 제갈량(諸葛亮)이 한중(漢中)으로 철수하자, 사마의(司馬懿)는 장합(張郃)에게 군대를 이끌고 추격하도록 명령했고, 장합(張郃)은 화살에 맞아 사망했다.
【기원후 234년】
- 위(魏) 청룡(青龍) 2년(234년) 4월, 제갈량(諸葛亮)은 위수(渭水) 남쪽 무공(武功) 오장원(五丈原)에 주둔하여 위수(渭水)를 건너 북쪽으로 가려 했으나, 대장(大將) 곽회(郭淮)의 저지로 실패했다. 제갈량(諸葛亮)은 위수(渭水) 남쪽에서 위(魏)의 대도독(大都督) 사마의(司馬懿)와 대치할 수밖에 없었다. 전술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사마의(司馬懿)는 험준한 곳에 의지하여 굳게 지켰고, 백여 일간 대치한 후 촉군(蜀軍)은 식량이 다 떨어져 스스로 철수했다. 제갈량(諸葛亮)은 여러 차례 사마의(司馬懿)에게 싸움을 걸었고, 심지어 한번은 사마의(司馬懿)에게 여장을 선물하며 도발하기도 했다. 사마의(司馬懿)는 이로 인해 화가 나서 상소를 올려 위 명제(魏明帝)에게 출전을 요청했으나, 명제(明帝)는 출전을 불허하고 위위(衛尉) 신비(辛毗)를 보내 부절(符節)을 가지고 위(魏)군을 제지하게 했다.
- 강유(姜維)는 제갈량(諸葛亮)에게 “신좌치(辛佐治)가 부절을 가지고 왔으니, 적이 다시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제갈량(諸葛亮)은 “저들은 본래 싸울 마음이 없었다. 굳이 싸우기를 청한 것은 병사들에게 무력을 보여주기 위함일 뿐이다. 장수가 군대에 있으면 군주의 명령이라도 받지 않을 때가 있는데, 만약 나를 제압할 수 있다면 어찌 천 리를 가서 싸우기를 청하겠는가!”라고 말했다. 제갈량(諸葛亮)은 다시 사마의(司馬懿) 군대에 사자를 보냈고, 사마의(司馬懿)는 촉(蜀)의 사자에게 제갈량(諸葛亮)의 식사량과 정무를 처리하는 번잡함만을 물을 뿐, 군사에 관해서는 묻지 않았다. 제갈량(諸葛亮)의 사자가 사마의(司馬懿)에게 “제갈 공께서는 아침 일찍부터 밤늦도록 일하시고, 20대 이상의 형벌도 모두 직접 살피셨습니다. 식사량은 3되도 되지 않습니다”라고 전했다. 사마의(司馬懿)는 “제갈량(諸葛亮)은 식사량이 적고 할 일이 많으니, 곧 죽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 후 두 군대는 백여 일간 대치했다.
- 제갈량(諸葛亮)의 북벌(北伐)은 모두 실패로 끝났다. 8월, 제갈량(諸葛亮)은 결국 병이 들었다. 유선(劉禪)은 상서복야(尚書僕射) 이복(李福)을 전선으로 보내 병문안을 가게 했고, 이복(李福)이 성도(成都)로 돌아왔을 때 제갈량(諸葛亮)은 오장원(五丈原) 전선에서 병사했다. 향년 54세였다.
- 양의(楊儀) 등이 군대를 정비하여 철수할 때, 사마의(司馬懿)는 촉한(蜀漢)군이 철수하는 것을 알고 직접 병력을 이끌고 추격했다. 강유(姜維)는 사마의(司馬懿)가 추격해오는 것을 보고 깃발을 뒤집어 세우고 북을 울렸다. 사마의(司馬懿)는 제갈량(諸葛亮)이 죽은 것을 알지 못하고 추격을 중지하라고 명령하며 전군을 철수시켰다. 이에 양의(楊儀)는 진영을 갖추고 유유히 사곡(斜谷)으로 퇴각했고, 백성들 사이에는 “죽은 제갈량이 산 중달(仲達, 사마의의 자)을 놀라게 하여 도망치게 했다”는 속담이 전해졌다. 사마의(司馬懿)는 이 말을 듣고 “나는 살아있는 사람을 헤아릴 수 있었지만, 죽은 사람을 헤아릴 수는 없었다(吾能料生,不便料死也)”고 말했다.
- 사마의(司馬懿)는 제갈량(諸葛亮)이 주둔했던 영채를 살펴보며 “참으로 천하의 기재(奇才)로다!”라고 감탄했다. 적안(赤岸)까지 추격했지만 촉군(蜀軍)을 따라잡지 못해 철수했다.
- 이후 사마의(司馬懿)는 조위(曹魏) 정권의 중추가 되었고, 그의 지위는 날이 갈수록 높아졌다.
【기원후 235년】
- 정월 무자일(235년 2월 13일)에 태위(太尉)로 승진했다.
【기원후 237년】
- 청룡(青龍) 5년(237년), 원래 위(魏)의 요동태수(遼東太守)였던 공손연(公孫淵)은 스스로 연왕(燕王)이라 칭하고 백관을 두어 조정에 대항했다. 경초(景初) 2년(238년) 정월, 위 명제(魏明帝) 조예(曹叡)는 59세의 사마의(司馬懿)에게 4만 명의 군대를 주어 토벌에 나서도록 했다. 도중에 사마의(司馬懿)는 고향인 온현(溫縣)을 지나면서 어르신들과 고향 사람들을 만나 만감이 교차하는 감회를 느끼며 시 한 수를 지었다 : “천지가 개벽하고 해와 달이 다시 빛나는 때를 만났으니, 이 머나먼 곳에서 전력을 다하네. 모든 더러움을 쓸어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며, 만 리를 깨끗이 정비하고 팔방을 하나로 만들리라. 성공을 고하고 늙어 물러나, 무양(舞陽)에서 죄를 기다리리라.”
- 6월에 요수(遼水)에 도착했다.
- 공손연(公孫淵)은 급히 대장군 비연(卑衍)과 양조(楊祚) 등을 시켜 보병과 기병 수만 명을 이끌고 요수(遼水)를 따라 20여 리에 걸쳐 참호를 둘러싸고, 견고한 성벽과 높은 보루를 쌓아 위(魏)군을 저지하게 했다. 사마의(司馬懿)는 성동격서(聲東擊西)의 계책을 사용하여, 참호를 거짓으로 공격하는 한편 주력 부대는 은밀히 요수(遼水)를 건너 공손연(公孫淵)의 근거지인 양평(襄平)을 곧바로 공략했다. 이는 적군이 참호 방어를 포기하고 양평(襄平)을 구원하기 위해 회군하도록 강제하는 것이었다. 사마의(司馬懿)는 군대를 독려하여 수산(首山)으로 돌아가 적의 지원군과 맞서 세 번 모두 승리했고, 여세를 몰아 양평(襄平)을 포위했다.
- 애초에 공손연(公孫淵)은 위(魏)군이 공격해온다는 소식을 듣고 손권(孫權)에게 구원을 요청했으며, 손권(孫權)도 군사를 내어 성원하면서 공손연(公孫淵)에게 편지를 보내 “사마의(司馬懿)는 병법에 능하여 가는 곳마다 거침이 없으니, 아우를 심히 걱정한다”라고 말했다.
- 마침 연이어 큰비가 내려 요수(遼水)가 불어나 평지가 수척이나 잠기자, 위(魏)군은 두려워했고 여러 장수들은 진영을 옮길 것을 생각했다. 사마의(司馬懿)는 진영을 옮길 것을 말하는 자는 참수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도독령사(都督令史) 장정(張靜)이 명령을 어겨 참수당하자 군심은 비로소 안정되었다. 공손연(公孫淵) 군이 비를 틈타 성을 나섰을 때, 위(魏)의 장수들은 출격을 요청했지만 사마의(司馬懿)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 달여 후 비가 그치고 물이 점차 빠지자, 위(魏)군은 양평(襄平)에 대한 포위를 완성하고 흙산을 쌓고 땅굴을 파고 누차(樓車), 구제(鉤梯) 등 공성 기구를 만들어 밤낮으로 맹공을 퍼부었다. 수비군의 식량이 다 떨어지고 군심이 동요하자, 양조(楊祚) 등이 먼저 항복했다.
- 8월, 양평(襄平) 성이 함락되자, 공손연(公孫淵)은 수백 명의 기병을 이끌고 포위를 뚫고 탈출하려 했으나, 양수(梁水)에서 살해당했다. 사마의(司馬懿)는 양평(襄平) 성 내의 15세 이상 남자 평민 7천여 명과 공손연(公孫淵) 정권의 관원 및 장군 등 2천여 명을 모두 살해하고, 시체를 쌓아 올려 ‘경관(京觀)’이라 칭했다. 요동(遼東)의 4군은 위(魏)의 수중에 들어갔다.
【기원후 239년】
- 명제(明帝)가 붕어하자 어린 황제 조방(曹芳, 曹芳)을 사마의(司馬懿)와 조상(曹爽)에게 부탁했다. 조방(曹芳)이 즉위한 후 사마의(司馬懿)와 조상(曹爽)은 모두 상서사(尚書事)를 맡았다.
- 조방(曹芳)이 즉위한 초기에 조상(曹爽)은 사마의(司馬懿)의 덕망이 높음을 존중하여 아버지처럼 대하며 감히 독단적으로 행동하지 못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조상(曹爽)은 심복 정밀(丁謐)의 계책을 듣고 사마의(司馬懿)를 배척하기 시작했다. 그는 사마의(司馬懿)를 실권이 없는 최고 명예직인 태부(太傅)로 승진시키는 명목으로 실권을 빼앗았고, 자신은 홀로 조정을 전횡했다.
【기원후 241년】
- 정시(正始) 2년(241년) 여름 4월, 동오(東吳)는 위장군(衛將軍) 전종(全琮, 全琮)을 파견하여 회남(淮南)을 공격하게 하고, 동흥(東興) 둑을 막아 위군(魏軍)을 물로 공격하며, 안성(安城)의 창고를 불태우고 현지 백성들을 거두어 들였다. 위북장군(威北將軍) 제갈각(諸葛恪,)은 육안(六安)을 공격했고, 전종(全琮)은 작피(芍陂)에서 왕릉(王凌, 王凌)과 대전하여 오(吳)의 오영중랑장(五營中郎將) 진황(秦晃) 등 십여 명이 전사했다. 거기장군(車騎將軍) 주연(朱然)과 손륜(孫倫) 등 5만 명의 병력이 번성(樊城)을 포위했으며, 대장군(大將軍) 제갈근(諸葛瑾)은 사중(柤中)을 점령했다. 전종(全琮)은 왕릉(王凌)과 작피(芍陂)의 저수지를 두고 다투었고, 여러 날 격렬하게 싸웠으나 전종(全琮)은 왕릉(王凌)에게 패하여 격퇴되었다. 전종(全琮)이 패주하고 번성(樊城)의 포위가 위급해지자, 사마의(司馬懿)는 “사중(柤中)의 백성 십만 명이 물 건너 남쪽에 격리되어 주인을 잃고 유랑하고 있는데, 번성(樊城)이 공격당한 지 여러 달이 되어도 풀리지 않으니, 이는 위급한 일입니다. 제가 직접 토벌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의논하는 자들은 “오(吳)군이 멀리 번성(樊城)을 포위하고 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견고한 성 아래에서 좌절하고 있으니, 스스로 패할 기세입니다. 긴 안목으로 방어해야 합니다”라고 만류했다. 사마의(司馬懿)는 반박하며 말했다. “병법서에 이르기를: 장수가 능력이 있어 통제하면 이는 군사를 묶는 것이고, 능력이 없으면서 맡기면 이는 군사를 망치는 것이다. 지금 변경이 소란하고 백성들의 마음이 의심스러워 하니, 이는 사직(社稷)의 큰 걱정이다.”
- 6월, 그는 제군(諸軍)을 독려하여 남쪽으로 정벌에 나섰고, 위 황제는 친히 진양성(津陽城) 문밖까지 그를 배웅했다. 사마의(司馬懿)는 남방이 덥고 습하여 오래 머물기 부적합하다고 판단하고, 경기병을 보내 도발하게 했으나, 주연(朱然)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에 사마의(司馬懿)는 제군에게 휴식을 취하고 목욕을 하게 하며 정예 병력을 선발하고, 선봉에 설 용사들을 모집하며, 명령을 신중히 내리고 필히 공격할 기세를 보였다. 주연(朱然) 등이 이 소식을 듣고는 밤에 도망쳤다. 삼주구(三州口)까지 추격하여 대승을 거두어 만여 명을 참획했다.
- 6월 신축일, 사마의(司馬懿)는 번성(樊城)을 구원한 후 철수했다.
【기원후 242년】
- 정시(正始) 3년(242년) 봄, 위 황제는 사마의(司馬懿)의 아버지 사마방(司馬防)을 무양성후(舞陽成侯)로 추봉했다.
- 3월, 사마의(司馬懿)는 조거(漕渠)를 확장하고 하수(河水)를 변수(汴水)로 끌어들여 동남방의 여러 큰 호수들을 소통하고, 회수(淮水) 북쪽에서 대규모 둔전(屯田)을 실시할 것을 상주했다. 오(吳)나라는 제갈각(諸葛恪)을 보내 완성(皖城)에 주둔하게 하여 변경 지역 백성들이 심한 고통을 겪었다. 사마의(司馬懿)는 군대를 이끌고 그를 공격하려 했으나, 조정 신하들은 제갈각(諸葛恪)이 견고한 성을 점거하고 있고 식량도 많으며, 고립된 병력으로 멀리 공격하면 구원병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여겼다. 사마의(司馬懿)는 반박하며 오(吳)군이 잘하는 것은 수전(水戰)이지 육전(陸戰)이 아니라고 말했다. 호수의 물이 겨울에는 얕아 배가 다닐 수 없으므로, 구원병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와서 구원해야 할 것이고, 육전에서 적을 격파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라고 보았다.
【기원후 243년】
- 정시(正始) 4년(243년) 9월 가을, 사마의(司馬懿)는 군대를 이끌고 제갈각(諸葛恪)을 정벌하러 나섰고, 위 황제는 진양문(津陽門) 밖까지 그를 배웅했다. 군대가 서성(舒城)에 도착하자, 제갈각(諸葛恪)은 과연 쌓아둔 것을 불태우고 성을 버리고 도주했다. 사마의(司馬懿)는 오(吳)군을 막는 요점은 식량 비축에 있다고 생각하여, 등애(鄧艾)를 진(陳), 항(項)의 동쪽으로 보내 수춘(壽春) 일대에서 대규모 둔전(屯田)을 크게 일으키게 했다. 또한 회양(淮陽)과 백척(百尺)의 두 수로를 크게 열고, 영수(潁水)의 남북에 여러 둑을 수축하여 만여 경의 땅을 개간했다. 이때부터 회수(淮水) 북쪽에는 창고가 서로 연결되었고, 수춘(壽春)에서 경사(京師)까지 농업 관리와 둔전 병사들이 연달아 이어졌다.
【기원후 244년】
- 정시(正始) 5년(244년), 상서(尚書) 등양(鄧颺)과 이승(李勝) 등이 조상(曹爽)이 공명(功名)을 세우기를 원하여 출병하여 촉한(蜀漢)을 공격하도록 힘껏 권했으나, 사마의(司馬懿)는 이를 만류했지만 조상(曹爽)은 듣지 않았다.
- 같은 해 조상(曹爽)은 장안(長安)에서 육칠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낙곡(駱谷)을 통해 남하했지만, 군수 물자 수송에 어려움이 발생하여 소, 말, 노새 등이 많이 죽었다. 계곡으로 수백 리를 행군했지만 촉군(蜀軍)이 험준한 산악 지형을 굳게 지키고 있어 위군(魏軍)은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참군(參軍) 양위(楊偉)는 조상(曹爽)에게 상황의 위험성을 역설하며 즉시 철군할 것을 권했다. 다른 한편으로 사마의(司馬懿)는 하후현(夏侯玄, 夏侯玄)에게 “옛날 위 무제(魏武帝)께서 한중(漢中)을 공격했을 때 거의 대패할 뻔했던 것을 그대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지금 흥평(興平)으로 가는 길은 지극히 험난한데 촉군(蜀軍)은 이미 미리 험지에 의지하여 굳게 지키고 있다. 만약 위군(魏軍)이 진격하여 오랫동안 적과 교전할 수 없다면, 그때 퇴각하려 해도 변방이 멀고 물자가 고갈되어 군대는 반드시 궤멸할 것이다. 그대가 어떻게 그 책임을 감당하겠는가!”라고 분석했다.
- 하후현(夏侯玄)은 이 말을 듣고 두려움을 느끼고 조상(曹爽)에게 즉시 철군할 것을 권했지만, 조상(曹爽)은 불쾌하게도 철수했다. 불행히도 비위(費禕)가 군대를 이끌고 삼령(三嶺)에 진격하여 가로막았고, 격렬한 전투 끝에 간신히 탈출했지만 병사들의 사상자는 매우 심했다.
【기원후 245년】
- 정시(正始) 6년(245년) 8월, 조상(曹爽)은 중루영(中壘營)과 중견영(中堅營)을 폐지하고, 두 영(營)의 병사들을 모두 자신의 동생 조희(曹羲)에게 통솔하게 했다. 사마의(司馬懿)는 선제(先帝)의 옛 제도를 인용하여 이를 제지했으나 조상(曹爽)은 듣지 않았다.
【기원후 246년】
- 정시(正始) 7년(246년) 정월, 오(吳)군이 사중(柤中)을 침입하여 만여 가구의 백성들이 오(吳)군을 피해 면수(沔水)를 건너 북쪽으로 피난했다. 사마의(司馬懿)는 면수(沔水) 남쪽이 적과 너무 가깝고, 만약 백성들이 되돌아가려 한다면 오(吳)군을 불러들일 것이므로 그들을 당분간 북쪽에 머물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조상(曹爽)은 이에 동의하지 않고 “지금 면수(沔水) 남쪽에 성을 쌓고 땅을 지킬 수 없다 하여 백성을 면수(沔水) 북쪽에 머물게 하는 것은 장기적인 계책이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 사마의(司马懿)는 반박하며 “안전한 곳에 두면 안전하고, 위험한 곳에 두면 위험하니, 사람과 사물이 모두 그렇습니다. 그래서 병서에 ‘성패는 형세에 달려 있고, 안위는 형세에 달려 있다’고 했습니다. 형세는 사람들을 다스리는 핵심이니 신중하게 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만약 오(吳)군이 2만 명으로 면수(沔水)를 방어하고, 3만 명으로 면수(沔水) 남쪽의 우리 군과 대치하고, 1만 명으로 사중(柤中)을 맹공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 조상(曹爽)은 듣지 않고 백성들을 남쪽으로 되돌려 보냈다. 오(吳)군은 과연 사중(柤中)을 격파했고, 수만 명의 백성들이 실종되었다.
【기원후 249년】
- 정시(正始) 10년(249년), 사마의(司馬懿)는 조상(曹爽)이 조방(曹芳)을 모시고 낙양을 떠나 고평릉(高平陵)으로 성묘를 간 틈을 타 정변을 일으켜 수도를 장악했다. 그는 조상(曹爽) 형제의 병권을 빼앗을 것이며, 저항을 포기하도록 유도한 후, 모반죄를 밝힌다는 명목으로 조상(曹爽)과 그 심복 일당을 삼족을 멸했다. 이때부터 조위(曹魏)의 군정 대권은 사마씨(司馬氏)의 손에 들어갔으며, 이를 역사에서는 고평릉지변(高平陵之變), 혹은 정시지변(正始之變)이라고 부른다. 당시 사마의(司馬懿)의 나이는 70세였다.
- 사건 후, 사마의(司馬懿)는 승상(丞相)으로 책봉되었고, 안평군공(安平郡公)에 진작되었으며, 식읍 만호가 더해졌고, 신하들이 상주할 때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10여 차례 상소를 올려 사양했으므로 그의 관직은 여전히 태부(太傅), 무양후(舞陽侯)였다. 조정에서 그에게 구석(九錫)을 더했으나 여전히 사양하여 받지 않았다. 권력을 장악한 후 사마의(司馬懿)는 병을 핑계로 황제 조방(曹芳)도 알현하지 않았고, 국사가 발생하면 황제 조방(曹芳)이 오히려 사마의(司馬懿)의 집에 찾아가 친히 물어야 했다.
【기원후 250년】
- 가평(嘉平) 2년(250년), 황제 조방(曹芳)은 조위(曹魏)의 수도 낙양(洛陽)에 사마의(司馬懿)의 가묘(家廟)를 세우라는 조서를 내렸다.
【기원후 251년】
- 가평(嘉平) 3년(251년), 태위(太尉) 왕릉(王淩, 王淩)은 외조카 연주자사(兗州刺史) 영호우(令狐愚)와 비밀리에 폐립(廢立)을 모의하여 조조(曹操)의 아들 조표(曹彪)를 황제로 옹립하려 했다. 음모가 발각되자 사마의(司馬懿)는 왕릉(王淩), 영호우(令狐愚)의 삼족을 멸하고, 57세의 조표(曹彪)에게는 죽음을 내렸는데, 이는 역사에 기록된 수춘삼반(壽春三叛) 중 하나이다. 그 후 사마의(司馬懿)는 조위(曹魏)의 종실(宗室)들을 읍(鄴)으로 옮겨 감시하며 다른 사람들과 교유하지 못하도록 했다.
- 가평(嘉平) 3년(251년), 사마의(司馬懿)는 낙양(洛陽)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향년 72세였다. 그는 유언에 따라 군공(郡公)과 특별한 예우를 사양했으며, 묘비와 봉분을 세우지 않고, 명기(明器)를 두지 않고 수양산(首陽山)에 묻혔다. 시호는 문(文)이었으나 (무양문후), 나중에 선문(宣文, 무양선문후)으로 개칭되었다.
【기원후 264년】
- 264년, 아들 사마소(司馬昭)가 진왕(晉王)에 봉해지자, 곧바로 사마의(司馬懿)를 진왕(晉王)으로 추존하고, 시호는 선왕(宣王)이었다.
【기원후 265년】
- 265년, 손자 사마염(司馬炎)이 제위에 올라 서진(西晉)을 건국하면서, 사마의(司馬懿)를 황제로 추존하고, 묘호는 고조(高祖), 시호는 선황제(宣皇帝)였다.
【가족 관계】
- 부친 : 사마방(司馬防)
- 형제(兄弟)
- 형 : 사마랑(司馬朗) - 백달(伯達)
- 동생 : 사마부(司馬孚) - 숙달(叔達)
- 동생 : 사마규(司馬馗) - 계달(季達)
- 동생 : 사마순(司馬恂) - 현달(顯達)
- 동생 : 사마진(司馬進) - 혜달(惠達)
- 동생 : 사마통(司馬通) - 아달(雅達)
- 동생 : 사마민(司馬敏) - 유달(幼達)
- 아내 및 첩 (妻妾)
- 정실 : 장춘화(張春華) - 시호 : 선목비(宣穆妃)
- 첩 : 장부인(張夫人)
- 첩 : 복부인(伏夫人) - 시호 : 부풍국 태비(扶風國太妃)
- 첩 : 백부인(柏夫人)
- 아들 (兒子)
- 사마사(司馬師, ?–251) - 자(없음), 생모(장춘화) : 조위 승상, 시호 충무왕(忠武王), 진 경문제(景文帝)로 추존
- 사마소(司馬昭, 211–265) - 자(없음), 생모(장춘화) : 진나라 태조 문황제(文皇帝)로 추존
- 사마량(司馬亮, ?–291) - 자(子翼), 생모(복부인) : 서진의 팔왕 중 한 명
- 사마주(司馬伷, 227–283) - 자(子將), 생모(복부인) : 진 원제의 조부
- 사마경(司馬京, ?–?) - 자(子佐), 생모(복부인)
- 사마간(司馬榦, 232–311) - 자(子良), 생모(장춘화)
- 사마준(司馬駿, 232–286) - 자(子臧), 생모(복부인)
- 사마융(司馬肜, ?–302) - 자(子徽), 생모(장부인)
- 사마륜(司馬倫, 240–301) - 자(子彝), 생모(백부인) : 서진의 황제(建始 연호), 팔왕의 난 중 한 명
- 딸 (女兒)
- 남양공주(南陽公主) : 생모(장춘화), 순휘(荀霬)에게 출가, 아들 순개(荀愷)를 둠
- 고륙공주(高陸公主) : 생모(미상), 두예(杜預)에게 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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