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회제 사마치(晉懷帝 司馬熾, AD. 284~313년) : 진나라 3대 황제(AD. 307~313년)
- 이름 : 사마치(司馬熾)
- 묘호 : 없음(서진 황제는 일반적으로 묘호를 사용하지 않음)
- 시호(諡號) : 효회황제(孝懷皇帝) - 줄여서 회제(懷帝)라고 함
- 출생 : 284년
- 사망 : 313년 3월 14일 (향년 28~29세)
- 재위 : 307년 1월 11일 ~ 313년 3월 14일
【기원후 284년】
- 사마치(司馬熾)는 태강(太康) 5년(284년)에 사마염(司馬炎)의 스물다섯 번째 아들로 태어났고, 생모는 진 무제(晉武帝)의 중재인(中才人) 왕원희(王媛姬, ? - 289)이다.
【기원후 289년】
- 왕원희(王媛姬)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진 무제(晉武帝)의 계후(繼后) 양지(楊芷, 259-292)에 의해 양육되었다.
【기원후 290년】
- 무제(武帝) 태희(太熙) 원년(290년), 사마치(司馬熾)는 예장왕(豫章王)에 봉해졌다.
- 4월에 사마염(司馬炎)이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태자(太子) 사마충(司馬衷, 259-307)이 즉위하여 진 혜제(晉惠帝)가 되었다. 진 혜제(晉惠帝)가 재위하는 동안 발발한 팔왕의 난(八王之亂)에서, 사마치(司馬熾)는 그 난리에 가담하지 않았고, 행동을 매우 조심하며, 손님들과 교유하는 것을 크게 좋아하지 않았고, 사서(史籍)를 탐구하는 것을 즐겼다.
【기원후 301년】
- 사마치(司馬熾) 본인은 웅대한 포부나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그는 처음에는 산기상시(散騎常侍)를 지냈고, 영강(永康) 2년(301년)에 조왕(趙王) 사마륜(司馬倫, ? - 301)이 진 혜제(晉惠帝)를 폐위했을 때, 사마치(司馬熾)는 체포되었다.
- 같은 해 4월 진 혜제(晉惠帝)가 복위된 후, 연호를 영녕(永寧) 원년으로 개원했으며, 사마치(司馬熾)는 사성교위(射聲校尉)에 임명되었다.
- 그는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 겸 도독청주제군사(都督青州諸軍事)로 거듭 승진했으나, 부임하지는 않았다.
【기원후 304년】
- 영녕(永寧) 3년(304년)에 그는 진북대장군(鎮北大將軍)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황태제(皇太弟)로 책봉되었다.
- 그러나 사마치(司馬熾)가 황태제로 책봉된 것은 성도왕(成都王) 사마영(司馬穎, 279-306)과 하간왕(河間王) 사마옹(司馬顒, ? - 306)이 대립하는 상황 속에서 이루어진 결과로, 사실 사마치(司馬熾) 본인에게는 권력에 대한 야심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조카인 청하왕(清河王) 사마탄(司馬覃, ? - 307)이야말로 본래의 황태자이며, 자신은 그 자리에 오를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전서령(典書令) 수숙(脩肅)이 그에게 천명에 순응할 것을 권하자, 사마치(司馬熾)는 수숙(脩肅)을 송창(宋昌)에 비유하며 마침내 이를 받아들였다.
- 이 시기, 흉노(匈奴) 등 소수 민족들도 독립적인 정권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중 유연(劉淵, ? - 310)이 304년에 가장 먼저 황제라 칭하고 한(漢)나라 정권(전조, 前趙)을 세웠다. 하지만 진(晉)나라 내부의 권력 다툼은 날로 심각해졌다.
【기원후 307년】
- 광희(光熙) 원년(306년) 11월 경오일(庚午, 307년 1월 8일), 진 혜제(晉惠帝)가 독살되었는데, 이는 동해왕(東海王) 사마월(司馬越, ? - 311)의 소행으로 보인다.
- 1월 11일, 사마치(司馬熾)가 즉위하며 연호를 영가(永嘉)로 개원했다. 사마월(司馬越)은 태부(太傅)로서 보정(輔政)했으며, 정국은 사마월(司馬越)이 장악했다.
- 사마치(司馬熾)는 또한 이전에 폐위된 양모(養母) 양지(楊芷, 259-292)를 다시 매장하고 시호를 추증했다.
【기원후 311년】
- 영가(永嘉) 5년(311년) 정월, 진회제(晉懷帝)는 몰래 고희(苟晞, ? - 311)에게 조서를 내려 사마월(司馬越)을 토벌하게 했으며, 3월에 토벌 조서가 반포되었다. 사마월(司馬越)은 같은 달에 병사했고, 무리들은 모두 왕연(王衍, 256-311)을 원수(元帥)로 추대했다.
- 4월, 왕연(王衍)이 호위군을 보내 사마월(司馬越)의 영구(靈柩)를 동해(東海)의 봉국(封國)으로 호송하던 중, 한(漢)나라의 진동대장군(鎮東大將軍) 석륵(石勒, 274-333)이 이끄는 2만 군대와 고현(苦縣) 영평성(寧平城, 하남성 단성현 동영평향)에서 전투를 벌였다. 진(晉)나라 군대는 전멸했고, 석륵(石勒)은 사마월(司馬越)의 영구(靈柩)를 불태웠다. 왕연(王衍)은 사로잡혔을 때 석륵(石勒)에게 나라를 세우고 황제라 칭하여 자신의 목숨을 구걸하려 했지만, 결국 석륵(石勒)에게 산 채로 매장되었다. 서진(西晉)의 대부분 주력 병력은 소멸되었고, 낙양을 지키던 하륜(何倫)과 이윤(李恽)의 호위군만이 남았다.
- 사마월(司馬越)이 죽은 후, 원래 수도에 남아 있던 하륜(何倫)과 이윤(李恽)은 소식을 듣고 즉시 동해왕비(東海王妃)와 세자(世子),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호위군을 이끌고 달아났지만, 곧 석륵(石勒)에게 전멸당했다. 다만 하륜(何倫)과 배비(裴妃)만이 운 좋게 도망쳤고, 서진(西晉)의 마지막 유효 전력은 완전히 사라졌다.
- 311년 6월, 유연(劉淵)의 아들 유총(劉聰, ? - 318)의 군대가 낙양(洛陽)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진회제(晉懷帝)는 장안(長安)으로 도망치던 중 황후 양난벽(梁蘭璧) 등과 함께 포로로 잡혔다. 태자(太子) 사마선(司馬詮, ? - 311)은 살해되었다. 이를 역사에서는 '영가(永嘉)의 난'이라 부른다. 진회제(晉懷帝)는 평양(平陽)으로 보내졌다. 유총(劉聰)이 그에게 물었다.
- "경(卿)이 예장왕(豫章王)이었을 때, 짐(朕)은 일찍이 왕무자(王武子, 왕제 王濟, ? - 291)와 함께 찾아갔었다. 왕무자(王武子)가 짐(朕)을 경에게 소개하자 경은 '내 이름을 들은 지 오래되었다'고 말했었지. 경은 또한 자신이 창작한 악부(樂府)를 짐(朕)에게 불러주며 '경이 사부(辭賦)에 뛰어나다고 들었는데, 평해보시오'라고 말했소. 짐(朕)은 그때 왕무자(王武子)와 함께 『성덕송(盛德頌)』을 불렀고, 경에게 칭찬을 받았다. 이후 경은 짐(朕)에게 함께 바둑을 두자 청했고, 짐(朕)은 열두 번 이기고 경과 왕무자(王武子)는 각각 아홉 번 이겼지. 경은 짐(朕)에게 탱나무 활과 은벼루를 선물했는데, 경은 아직 기억하고 있는가?"
- 사마치(司馬熾)는 어쩔 수 없이 답했다. "신(臣)이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그때 진정한 용천자(真龍天子)를 일찍 알아보지 못해 유감입니다."
- 유총(劉聰)은 다시 물었다. "경의 집안은 골육상잔하여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 사마치(司馬熾)는 감탄하며 말했다. "이는 인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늘의 뜻입니다. 대하(大漢)는 하늘의 뜻을 받아 천하 대통을 이었으니, 우리 사마씨(司馬氏)는 폐하를 위해 스스로 골육상잔을 벌인 것입니다. 더구나 신이 무황제(武皇帝)의 대업을 잘 이어받아 온 집안이 화목하게 지냈다면 폐하께서 어찌 강산(江山)을 얻으셨겠습니까?"
- 두 사람은 새벽녘까지 즐겁게 이야기를 나눴다. 유총(劉聰)은 자신의 비(妃)인 유부인(劉夫人)을 그에게 주며 "이는 명문 후예이니, 특별히 경에게 아내로 하사하오니 잘 대하시오"라고 말했다. 당시 양난벽(梁蘭璧) 황후가 이미 세상을 떠났는지 혹은 헤어졌는지는 불확실하다.
- 이후 사마치(司馬熾)는 회계공(會稽公)으로 봉해지고 연금되었다.
【기원후 313년】
- 313년 정월, 진회제(晉懷帝)는 조회에서 술을 따르는 하인 역할을 하도록 명령받았다. 이에 옛 진(晉)나라 신하들이 슬피 울자 유총(劉聰)은 불쾌감을 느꼈고, 얼마 후 독주(毒酒)로 진회제(晉懷帝)를 독살했다. 그는 향년 30세였다. 매장된 곳은 불분명하다.
【가족 관계】
- 조부 : 태조 문황제 사마소(太祖 文皇帝 司馬昭)
- 조모 : 문명황후 왕씨 왕원희(文明皇后 王氏 王元姫)
- 부황 : 세조 무황제 사마염(世祖 武皇帝 司馬炎)
- 모후 : 효회태후 왕씨 왕원희(曉懷太后 王氏 王媛姬)
- 황후(정후) : 회황후 양씨 양난벽(懷皇后 梁氏 梁蘭璧)
- 제1황자 : 태자 사마전(太子 司馬詮)[생모미상]
- 이복 형 : 서진 혜제 사마충(西晋 惠帝 司馬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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