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9월 24일 수요일

사마륜(司馬倫, AD. ?~301년) : 진나라 조왕, 황제(AD. 301년)

사마륜(司馬倫, AD. ?~301) : 진나라 조왕, 황제(AD. 301)

 
  • 이름 : 사마륜(司馬倫)
  • 황제 재위 기간 : 30123~ 301531
  • 연호(年號) : 건시(建始)
  • 작위 및 직함
    랑야군왕(琅邪郡王) : 26629~ 277105
    조왕(趙王) : 277105~ 30123
  • 출생 : 232~ 250년 사이
  • 사망 : 30165(향년 51~ 69)
 

출생

  • 언제 태어났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 그는 사마의의 9남으로 어머니 백() 부인은 아버지 사마의(司馬懿)의 총애를 받았다.
  • 기원후 250년 이전에 태어났다고 알려져 있다.
 

기원후 250

  • 사마륜은 조위(曹魏) 가평(嘉平) 2(250)에 안락정후(安樂亭侯)에 봉해졌다.
  • 이후 오등작(五等爵) 제도가 수립되면서 동안자(東安子)로 개봉되었고, 간의대부(諫議大夫)에 임명되었다.
 

기원후 265

  • 진 무제(晉武帝) 사마염(司馬炎)이 나라를 세운 후, 사마륜은 낭야왕(琅邪王)에 봉해졌다. 당시 그는 산기장(散騎將) 유집(劉緝)을 시켜 궁중에서 훔친 어의(御衣)를 사게 한 죄에 연루되었는데, 정위(廷尉) 두우(杜友)가 유집을 시시(棄市, 저자에서 처형하는 형벌)에 처하자 사마륜 역시 유집과 같은 죄를 받게 될 상황이었다. 진 무제는 사마륜이 혈친인 까닭에 조서를 내려 그를 사면했다. 그는 행동중랑장(行東中郎將)과 선위장군(宣威將軍)을 역임했다.
 

기원후 277

  • 함녕(咸寧) 3(277)에는 조왕(趙王)으로 개봉되었고, 평북장군(平北將軍) 겸 독업성수사(督鄴城守事)로 전임되었으며, 이후 안북장군(安北將軍)으로 승진했다.
 

기원후 291

  • 혜제(惠帝) 원강(元康) 초년, 그는 정서장군(征西將軍) 겸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로 임명되어 관중(關中)을 수비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그가 형벌과 상을 공정하게 집행하지 않고 함부로 수십 명의 강족(羌酋) 추장들을 살해하여 저강(氐羌)족이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에 그는 다시 수도로 소환되어 거기장군(車騎將軍) 겸 태자태부(太子太傅)에 임명되었다. 그는 황후 가남풍(賈南風)과 깊이 교류하여 가황후의 신임을 얻었다. 녹상서(錄尚書), 상서령(尚書令) 등의 직책을 구했으나, 대신 장화(張華)와 배외(裴頠)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기원후 299

  • 가황후는 민회태자(愍懷太子) 사마휼(司馬遹)을 모해하여 폐태자로 만들었다. 좌위사마독(左衛司馬督) 사마아(司馬雅)와 상종독(常從督) 허초(許超)는 모두 태자의 옛 부하들이었는데, 손수(孫秀)를 통해 사마륜이 정변을 일으켜 가황후를 폐하고 태자를 복위시키도록 꾀했다. 손수는 이에 동의했고, 사마륜에게 알려 사마륜 또한 동의했다. 그러나 거사를 준비할 때, 손수는 다시 사마륜에게 태자가 복위된 후에는 자신이 가황후 일파였던 것을 감사하기는커녕 오히려 복수할 것이라고 말했다. 손수는 차라리 태자가 살해된 후에 태자의 복수를 명분으로 가황후를 축출할 것을 제안했다. 이에 사마륜은 폐태자를 구하지 않았고, 오히려 손수와 함께 가황후를 설득하여 폐태자를 조속히 살해함으로써 대중의 희망을 끊어낼 것을 역설했다.
 

기원후 300

  • 3, 폐태자가 살해된 후, 사마륜은 태자의 복수를 명분으로 정변을 일으켰다. 산기상시(散騎常侍) 겸 영좌군장군(領左軍將軍), 익군교위(翊軍校尉) 제왕(齊王) 사마경(司馬冏)은 비록 가황후의 외조카였지만 그녀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사마륜은 은밀히 사마경과 결탁하여 그를 시켜 조서라 칭하며 가황후를 체포하게 했고, 가황후는 서인(庶人)으로 폐위되어 건시전(建始殿)에 유금되었으며, 얼마 후 금용성(金墉城)으로 옮겨져 금가루가 섞인 독주를 마시고 살해당했다. 사마륜은 또한 가짜 조서를 꾸며 스스로 사지절(使持節), 대도독(大都督), 독중외제군사(督中外諸軍事), 상국(相國)을 겸했으며, 시중(侍中)과 왕()의 직위는 이전과 같았다. 그의 이러한 체제는 사마의(司馬懿)와 사마소(司馬昭)가 위()나라를 보좌했던 전례와 동일했다. 예를 들어 그의 아들 사마복(司馬馥)은 전장군(前將軍)이 되고 제양왕(濟陽王)에 봉해졌다. 다른 아들 사마건(司馬虔)은 황문랑(黃門郎)이 되고 여음왕(汝陰王)에 봉해졌다.
  • 회남왕(淮南王) 사마윤(司馬允)은 중호군(中護軍)으로서 군인들의 신망을 얻고 있었다. 그는 사마륜에게 다른 뜻이 있음을 눈치채고 제거할 마음을 품었다. 사마륜 또한 그를 꺼려 사마윤을 태위(太尉)로 임명하여 병권을 빼앗으려 했다. 사마윤은 병을 핑계로 직책을 받지 않았고, 사마륜은 어사(御史) 유기(劉機)를 파견하여 사마윤이 명령에 불복하는 것은 모반이라고 비난했다. 사마윤은 크게 격노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조왕이 우리 집안을 망치려 한다!"라고 외쳤다. 그는 곧 국병과 막하의 700명을 이끌고 돌진하여 크게 외치기를 "조왕이 반란을 일으켰다! 내가 그를 공격할 것이니, 나를 보좌할 자는 오라!"라고 했다. 이에 그에게 귀부하는 자들이 많았다. 사마윤은 상국부(相國府)를 포위했고, 그의 병사들은 모두 회남의 뛰어난 검객들이었다. 사마륜의 군대는 번번이 패하여 1,000여 명 이상이 죽었다. 태자좌솔(太子左率) 진휘(陳徽)는 동궁(東宮) 병사들을 이끌고 상국부 내에서 사마윤의 봉기에 호응하며 기세를 올렸다. 사마윤이 승화문(承華門) 앞에서 활과 쇠뇌를 쏘아대자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다. 주서(主書) 사마계(司馬畦)는 몸으로 사마륜을 막다가 등에 화살을 맞아 죽었다. 사마륜의 관료들은 모두 나무 뒤에 숨었으나, 모든 나무마다 수백 발의 화살이 박혔다. 진휘의 형인 중서령(中書令) 진회(陳淮)는 진 혜제에게 백호번(白虎幡)을 가지고 가서 싸움을 말리도록 청했다. 사실 휘추번(麾驺幡)이 싸움을 말리는 데 사용되는 것이었고, 백호번은 살육을 주재하거나 황제의 조명을 전달하고 독전할 때 사용되는 깃발이었다. 진회는 사마윤이 백호번을 손에 쥐기만 하면 사마륜의 병사들이 싸우지 않고 패주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진 혜제는 사마독호(司馬督護) 복윤(伏胤)을 시켜 백호번을 들고 400명의 기병을 이끌고 궁을 나와 상국부로 향하게 했다. 그러나 복윤은 사마건과 매우 친한 사이였다. 사마건은 복윤에게 자신의 아버지를 도우면 일이 성사된 후에 그와 함께 부귀를 도모하자고 요구했다. 이에 복윤은 사마윤을 유인하여 살해했다. 처음에는 사마륜이 패하여 사마륜이 이미 사로잡혔다는 소문이 돌자 백성들은 크게 기뻐했다. 사마윤이 살해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백성들은 모두 탄식했다.
  • 사건 후, 사마륜은 구석(九錫)을 더하고 5만 호를 증봉받았다. 혜제는 사마휼의 아들 사마장(司馬臧)을 황태손(皇太孫)으로 삼고, 태자 관서는 태손 관서로 바뀌었다. 사마륜은 행태손태부(行太孫太傅)가 되어 사마장과 함께 동궁으로 갔다.
 

기원후 301

  • 사마륜은 거짓 조서를 꾸며 진 혜제(晉惠帝)에게 선위하도록 강요하고, 스스로 황제라 칭했으며 혜제(惠帝)를 태상황(太上皇)으로 존대했다. 연호는 건시(建始)로 바꾸었다. 혜제는 금용성(金墉城)으로 옮겨졌고, 황태손(皇太孫) 사마장(司馬臧, ? - 301)은 부양왕(濮陽王)으로 폐위되어 함께 옮겨졌으며, 얼마 후 살해되었다.
  • 그가 작위 남발을 지나치게 하자, 당시 사람들은 "담비가 부족하니 개 꼬리로 잇는구나(貂不足狗尾續)"라는 속담을 만들었고, 이는 고사성어 '구미속초(狗尾續貂)'의 유래가 되었다. 사마륜 자신은 능력이 없었기에 모든 정무는 손수(孫秀, ? - 301)가 처리했다. 그는 또한 사람을 시켜 진 고조(晉高祖) 사마의(司馬懿, 179-251)가 현신하여 자신을 칭찬하는 말을 하게 했으며, 사마의를 위해 사당을 짓기도 했다. 이는 자신의 즉위를 정당화하려는 시도였다.
  • 앞서 가황후(賈后) 주살에 참여했던 제왕(齊王) 사마경(司馬冏, ? - 302)은 유격장군(遊擊將軍)으로 승진했지만, 사마륜의 전횡에 불만이 많았고 그를 증오했다. 손수는 이를 알아채고 경계하여 사마경을 평동장군(平東將軍) 겸 가절(假節)로 삼아 허창(許昌)을 진수하도록 했다. 사마륜은 사마경을 진동대장군(鎮東大將軍) 겸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로 임명하며 은총으로 달래려 했으나, 사마경은 사람들이 사마륜에게 원한을 품고 있음을 보고 사마륜을 주살할 계획을 세웠다.
  • 3, 제왕 사마경은 사마륜에 대항하여 거병했고, 성도왕(成都王) 사마영(司馬穎, 279-306), 장사왕(長沙王) 사마예(司馬乂, 277-304), 신야현공(新野縣公) 사마흠(司馬歆, ? - 303) 등이 그를 지지했다. 관중을 진수하던 하간왕(河間王) 사마옹(司馬顒, ? - 306)은 본래 사마륜의 징병에 호응했으나, 여러 왕들의 군대가 강성함을 알고 그들 쪽으로 돌아섰다.
  • 사마륜의 조군(趙軍) 장수 사이(士猗, ? - 301)와 허초(許超, ? - 301)는 황교(黃橋)에서 사마영의 군대와 싸워 대승을 거두었고, 독호(督護) 조양(趙骧)이 이끌던 성도왕의 군대는 8천여 명이 전사했다. 장홍(張泓, ? - 301)은 영수(潁水)에서 사마경과 싸워 역시 승리했다. 그러나 조군(趙軍)의 지휘는 혼란스러웠고, 사마륜은 장홍이 이미 전사했다고 여겨 허초를 불러들였다. 이후 장홍이 승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다시 허초를 돌려보냈는데, 이는 군대의 사기를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사마경을 격파하기 위해 장홍은 전군을 이끌고 영수(潁水)를 건너 사마경의 대영(大營)을 공격했지만, 그 밑의 손모(孫髦), 사마담(司馬譚), 손보(孫輔) 등이 차례로 격파되면서 사마륜의 군대는 대패하여 낙양으로 흩어졌다.
  • 한편, 황교(黃橋)에서 패배했던 사마영은 온현(溫縣) 남쪽에서 조군과 다시 싸웠다. 조군 장수 사이(士猗)가 경솔하게 적을 대하다가 참패했고, 훗날 성도왕이 전사자들의 시신을 매장할 때 조군의 사망자가 14천여 명에 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손수의 아들 손회(孫會)가 의병(義兵)과 진수(湨水)에서 회전했지만, 또 다시 대패했다.
  • 사마륜 휘하의 왕여(王輿)가 궁내에서 반란을 일으켜 손수(孫秀), 사염(謝惔), 낙휴(駱休), 왕잠(王潛), 허초(許超), 사이(士猗), 손필(孫弼) 등 일련의 핵심 인물들을 살해했다. 이로 인해 사마륜은 황망히 조서를 내려 자신이 손수에게 잘못 이끌렸으며, 이로 인해 세 왕(사마경, 사마영, 사마예)을 노하게 했다고 밝혔다. 이제 손수는 처벌받았으니 태상황(太上皇)을 모셔오고 자신은 농가에서 여생을 보내겠다고 말했다. 황문(黃門)이 사마륜과 그의 아들 사마부(司馬荂)를 이끌고 문양(汶陽)으로 향했다. 백관들은 금용성(金墉城)에서 혜제를 다시 궁으로 모셔왔다. 장홍은 양책(陽翟)에서 사마경에게 투항했다.
  • 이후 사마륜 부자는 금용성(金墉城)에 유금되었다. 양왕(梁王) 사마회(司馬肜, ? - 302)는 사마륜의 죄상을 아뢰었고, 상서(尚書) 원창(袁敞)은 부절(符節)을 가지고 가서 금가루를 섞은 독주를 하사하여 그를 독살했다. 죽기 직전 사마륜은 부끄러워 손수건으로 얼굴을 가렸고, 입에서는 "손수가 나를 망쳤다, 손수가 나를 망쳤다……"는 말을 연신 내뱉었다. 사마륜의 네 아들 또한 정위(廷尉)에 넘겨져 처형되었다.
  • 사마륜은 죽은 후 조서인(趙庶人)이라 불렸다. 그의 마지막은 탐욕과 배신으로 얼룩진 팔왕의 난이 얼마나 허무하고 잔인했는지를 보여주는 비극적인 기록이다.
 

가족 관계

  • 아버지
    • 진 고조(高祖) 선제(宣帝) 사마의(司馬懿)
  • 어머니
    • 백부인(柏夫人)
  • 형제자매
    • 진 세종(世宗) 경제(景帝) 사마사(司馬師) 자원(子元), 장춘화(張春華) 소생
    • 진 태조(太祖) 문제(文帝) 사마소(司馬昭) 자상(子上), 장춘화 소생
    • 여남 문성왕(汝南文成王) 사마량(司馬亮) 자익(子翼), 복귀비(伏貴妃) 소생
    • 낭야 무왕(瑯邪武王) 사마주(司馬伷) 자장(子將), 복귀비 소생
    • 청혜 정후(清恵亭候) 사마경(司馬京) 자좌(子佐), 복귀비 소생
    • 부풍 무왕(扶風武王) 사마준(司馬駿) 자장(子藏), 복귀비 소생
    • 평원왕(平原王) 사마간(司馬幹) 자량(子良), 복귀비 소생
    • 양 효왕(梁孝王) 사마융(司馬肜) 자휘(子徽), 백부인 소생
    • 남양공주(南陽公主), 장춘화 소생,
    • 남육공주(南陸公主), 장춘화 소생, 두예(杜預)의 부인
  • 자녀
    • 장남 사마과(司馬荂), 태자
    • 차남 사마복(司馬馥), 제양왕(濟陽王)
    • 3남 사마건(司馬虔), 여음왕(汝陰王)
    • 4남 사마후(司馬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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