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잔틴 제국의 20년 무정부기(Twenty Years' Anarchy, AD.695~717) : 혼란과 권력 투쟁의 시대
1. 제국의 위기와 무정부 시대의 시작
비잔틴 제국(동로마 제국)의 역사에서 695년부터 717년까지의 기간은 ‘20년 무정부기’(Twenty Years' Anarchy)라 불리는 극심한 내부 불안정의 시기였다. 이 기간 동안 제국은 끊임없는 권력 투쟁, 정치적 혼란, 그리고 외부 위협에 시달렸다. 헤라클리우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2세의 첫 번째 퇴위로부터 시작된 이 혼란기는 이사우리아 왕조의 창시자 레오 3세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막을 내렸다.
이 시기는 제국 내부의 정치적 불안정뿐만 아니라 아랍 칼리프국과의 지속적인 전쟁, 불가리아의 위협, 그리고 영토 손실로 특징지어진다. 20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일곱 명의 황제가 교체되었으며, 대부분은 군사 쿠데타나 반란을 통해 권력을 잡았다가 같은 방식으로 권력을 잃었다. 이러한 정치적 불안정은 제국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약화시켰고, 비잔틴 제국이 존폐의 위기에 처하게 만들었다.
2. 유스티니아누스 2세와 첫 번째 통치기 : 685-695년
20년 무정부기의 전조는 유스티니아누스 2세(Justinian II, 669-711)의 첫 번째 통치기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685년, 16세의 나이에 아버지 콘스탄티누스 4세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초기에 군사적 성공을 거두었으나, 점차 독재적이고 잔인한 통치 스타일로 인해 제국 내 불만이 고조되었다. 그는 과도한 세금 정책을 펼쳤고, 귀족들의 재산을 몰수하는 등 민심을 잃는 행동을 지속했다.
특히 그의 재정 담당자 스테파누스와 사크레티스 테오도투스는 엄청난 세금을 부과하고 잔혹한 징수 방법을 사용하여 국민들의 원성을 샀다. 또한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콘스탄티노플의 귀족들을 모욕하고, 교회의 권위를 무시하는 등 다양한 계층의 적대감을 샀다. 결국 695년, 군 사령관 레온티오스(Leontius, ?-705)가 이끄는 쿠데타로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퇴위당했다. 전통적으로 황제 폐위 시 행해지던 사형 대신, 레온티오스는 유스티니아누스의 코를 자르고(rhinokopia) 크림 반도의 케르손으로 추방했다. 이렇게 해서 20년의 무정부기가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3. 레온티오스의 통치 : 695-698년
레온티오스(Leontius, ?-705)는 비잔틴 제국의 군사 지도자로, 유스티니아누스 2세를 축출한 후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그의 통치는 짧았으며, 주로 아랍 칼리프국과의 전쟁으로 특징지어진다. 레온티오스는 북아프리카에서 아랍군을 일시적으로 물리치는 데 성공했지만, 이 지역을 완전히 확보하지는 못했다.
697년, 아랍군은 카르타고를 점령했고, 이에 레온티오스는 해군 제독 요한을 파견하여 도시를 탈환했다. 그러나 다음 해인 698년, 아랍군은 더 큰 병력으로 재공격하여 카르타고를 완전히 점령했다. 이로써 비잔틴 제국은 북아프리카의 마지막 영토를 잃게 되었다. 이 패배로 요한과 그의 함대는 크레타로 퇴각했고, 군인들은 패배를 두려워하여 아프시마로스라는 드룽가리오스(해군 장교)를 새로운 황제로 선포했다. 아프시마로스는 티베리우스 3세(Tiberius III)라는 이름을 채택하고, 콘스탄티노플로 향했다.
티베리우스 3세가 수도에 도착했을 때, 레온티오스에 대한 대중의 지지는 이미 약해져 있었다. 도시의 일부 주민들이 티베리우스 3세에게 문을 열어주었고, 레온티오스는 쉽게 체포되었다. 티베리우스 3세는 레온티오스의 코를 자르고 수도사로 만들어 델마토스 수도원에 유폐했다.
4. 티베리우스 3세의 통치 : 698-705년
티베리우스 3세(Tiberius III, ?-705)는 원래 아프시마로스라는 이름의 해군 장교였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비잔틴 제국은 동부 전선에서 아랍군에 대해 일부 성공을 거두었다. 그의 형인 헤라클리우스(Heraclius)는 소아시아 지역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여러 차례 아랍군의 공격을 격퇴하고 시리아 북부까지 진출하기도 했다. 이는 일시적으로 제국의 군사적 역량을 회복시키는 듯 보였다.
그러나 티베리우스 3세의 황제 즉위는 피와 복수의 악순환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추방당한 후에도 권력 복귀를 꿈꾸고 있었다.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추방된 지 10년 후인 705년, 불가리아의 테르벨 칸(Tervel, ?-721)의 지원을 받아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왔다.
티베리우스 3세는 불가리아군과 유스티니아누스 2세의 군대에 맞서 방어에 나섰으나,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비잔틴 내부의 조력자들의 도움으로 성벽을 넘어 수도에 진입했다. 티베리우스 3세는 결국 유스티니아누스 2세에게 생포되었고, 황제의 복수를 두려워하는 수도 시민들은 저항하지 못했다. 티베리우스 3세는 광장에 끌려와 유스티니아누스 2세의 발아래 꿇어앉는 굴욕을 겪은 후 참수당했다. 이로써 그의 짧은 통치는 끝이 났다.
5. 유스티니아누스 2세의 두 번째 통치 : 705-711년
코가 잘린 채 추방당했던 유스티니아누스 2세(Justinian II, 669-711)는 기적적으로 권력을 되찾았다. 그의 두 번째 통치는 이전보다 훨씬 더 잔혹하고 복수심에 불탔다. 그는 자신의 첫 번째 축출에 관여했던 모든 인물들과 그들의 지지자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했다. 전임 황제 레온티오스와 티베리우스 3세는 물론,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칼리니코스 1세(Kallinikos I, ?-705)의 눈을 뽑아 추방하는 등 끔찍한 보복 행위를 서슴지 않았다. 이러한 잔인한 숙청은 제국 전반에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으며, 그의 통치에 대한 광범위한 불만을 불러일으켰다.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대내적으로는 반대파를 억압했지만, 대외적으로는 여전히 아랍 칼리프국과의 전쟁을 지속해야 했다. 불가리아의 도움으로 복귀했음에도 불구하고, 불가리아와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이는 추가적인 국경 분쟁으로 이어졌다. 또한, 황제의 잔혹한 통치 스타일은 재정적인 부담으로 이어져 제국의 경제는 더욱 피폐해졌다. 그의 복수심에 불타는 정책들은 제국 내 권력층의 불안감을 극대화시켰고, 결국 그의 두 번째 통치 역시 비극적인 종말로 치닫게 만들었다.
711년, 유스티니아누스 2세의 지속적인 폭정과 복수심에 지친 제국의 장군들은 아르메니아 출신의 필리피코스(Philippicus Bardanes)를 황제로 선포했다.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당시 흑해 연안을 정찰하던 중 반란 소식을 듣고 지원군을 요청했으나, 그를 따르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결국 붙잡혀 참수당했으며, 그의 아들 티베리우스도 처형당하면서 헤라클리우스 왕조는 완전히 단절되었다.
6. 필리피코스 바르다네스의 통치 : 711-713년
필리피코스 바르다네스(Philippicus Bardanes, ?-713)는 유스티니아누스 2세를 축출하고 711년에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그의 통치는 매우 짧았고, 신학적 논쟁으로 제국을 더욱 혼란에 빠뜨렸다. 필리피코스는 단의론(Monothelitism)을 지지하는 인물이었으며, 이는 비잔틴 정교회의 주류 교리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었다. 칼케돈 공의회(Council of Chalcedon)에서 이단으로 선언되었던 단의론을 부활시키려는 그의 시도는 콘스탄티노플의 교회와 대중에게 큰 반발을 샀다. 그는 로마 교황 콘스탄티누스 1세(Pope Constantine I)에게 단의론을 지지하는 서한을 보내기도 했지만, 교황은 이를 거부하고 필리피코스를 인정하지 않았다.
대내적으로 신학적 분열을 초래한 반면, 대외적으로 제국은 아랍 칼리프국의 끊임없는 공격에 직면했다. 아랍군은 비잔틴 제국의 국경을 넘어 소아시아로 깊숙이 침투했고, 콘스탄티노플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필리피코스의 통치 기간 동안 군사적 방어는 약화되었고, 그의 무능함과 신학적 고집은 군대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결국 713년 6월, 군대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옥사리움 테마(Opsikion Theme)의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켜 필리피코스를 폐위시켰다. 그들은 황제를 체포하여 눈을 뽑고 수도원에 감금했다. 필리피코스는 비록 단의론 부활이라는 개인적인 신념에 사로잡혔지만, 제국을 안정시키는 데에는 역부족이었다.
7. 아나스타시우스 2세의 통치 : 713-715년
필리피코스의 폐위 후, 그의 비서인 아르테미오스(Artemius)가 아나스타시우스 2세(Anastasius II, ?-719)라는 이름으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아나스타시우스 2세는 전임 황제와 달리 제국의 안정을 위해 노력했다. 그는 필리피코스가 부활시키려 했던 단의론을 즉시 폐지하고, 정교회와의 화합을 도모했다. 또한, 그는 아랍 칼리프국의 침공 위협에 심각하게 대처하기 시작했다.
아랍 칼리프국의 새로운 침공에 대비하여 아나스타시우스 2세는 군사적 준비를 강화했다. 그는 해군을 정비하고, 비잔틴 함대를 로도스 섬으로 보내 아랍군을 선제공격하는 과감한 작전을 펼쳤다. 이는 아랍군의 진격을 잠시 지연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또한, 그는 콘스탄티노플의 방어 시설을 보강하고, 도시의 식량 공급을 확보하는 등 장기적인 공성전에 대비했다.
하지만 그의 재위 역시 길지 못했다. 아나스타시우스 2세는 옥사리움 테마의 병사들을 징계하고 그들을 지휘하던 이들에게 신뢰를 보여주지 않았다. 이에 불만을 품은 옥사리움 테마의 병사들이 또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징세관 테오도시우스(Theodosius)를 강제로 황제로 옹립했다. 이들은 콘스탄티노플로 진격했고, 아나스타시우스 2세는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아나스타시우스 2세는 테오도시우스 3세에 의해 수도사로 강등되어 수도원에 유폐되었다.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제국의 정치적 혼란은 여전히 끝이 보이지 않았다.
8. 테오도시우스 3세의 통치 : 715-717년
테오도시우스 3세(Theodosius III, ?-754)는 황제가 될 의지가 전혀 없었던 인물이었다. 그는 본래 아드라미티움(Adramyttium) 지역의 징세관이자 온건한 성직자였다. 군대에 의해 강제로 황위에 오르자 그는 이 무거운 짐에 압도되었다. 그의 통치 기간은 약 2년으로, 이전 황제들과 마찬가지로 내부의 불안정 속에서 아랍군의 위협에 직면해야 했다.
테오도시우스 3세는 황제의 자질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랍군의 재침공에 대한 위협을 인지하고 콘스탄티노플 방어 준비를 지속했다. 그는 수도의 보급을 확보하고 성벽을 보수하는 등 아나스타시우스 2세가 시작했던 방어 태세를 이어나갔다. 그러나 옥사리움 테마의 군사 반란으로 인한 내부 혼란은 쉽게 수습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아나톨리콘 테마(Anatolikon Theme)의 스트라테고스(군사 지휘관)인 레오(Leo)와 아르메니아콘 테마(Armeniakon Theme)의 스트라테고스인 아르타바스도스(Artabasdos)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테오도시우스 3세의 무능함을 지적하며 더 유능한 지도자를 요구했다. 레오와 아르타바스도스는 콘스탄티노플로 진격했고, 테오도시우스 3세는 더 이상의 유혈 사태를 막기 위해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는 순순히 물러나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사의 삶을 택했고, 그의 가족들 역시 무사히 보호받았다.
테오도시우스 3세의 퇴위는 비잔틴 제국 '20년 무정부기'의 마지막 막을 내렸다. 새로운 황제 레오 3세(Leo III, 675-741)는 이사우리아 왕조를 창건하고 제국을 안정시키는 데 성공했다.
9. 20년의 혼란, 그리고 제국의 재도약
비잔틴 제국의 ‘20년 무정부기’는 제국의 안정성이 얼마나 취약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시기였다. 695년부터 717년까지 유스티니아누스 2세를 포함해 일곱 명의 황제가 즉위하고 폐위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대부분의 황제들은 군사 쿠데타나 반란을 통해 권력을 잡았고,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이러한 불안정은 제국 내부의 정치적, 사회적 혼란을 가중시켰고, 특히 아랍 칼리프국의 팽창이라는 외부 위협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 기간 동안 비잔틴 제국은 북아프리카의 마지막 영토를 잃고, 소아시아 지역의 상당 부분을 아랍군에게 내주었으며, 콘스탄티노플이 직접적인 위협에 노출되는 등 심각한 영토적, 군사적 손실을 겪었다. 권력 다툼과 내부 분열은 제국의 역량을 소진시켰고, 국가의 기틀을 흔들었다.
그러나 이 혼란의 시기는 동시에 새로운 시대의 서막이기도 했다. ‘20년 무정부기’가 종식된 후, 이사우리아 왕조의 레오 3세는 강한 군사적 리더십과 행정 개혁을 통해 제국을 안정시켰다. 그는 717-718년 콘스탄티노플 대공방전을 성공적으로 방어하여 아랍군의 진격을 저지하고, 비잔틴 제국의 부활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20년 무정부기’는 비잔틴 제국이 직면했던 가장 어두운 시기 중 하나였지만, 이를 극복하고 재도약할 수 있는 저력을 보여준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는 비잔틴 제국이 단순한 고대 제국의 잔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위기를 극복해 나가는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 존재였음을 증명하는 역사적 증거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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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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