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16일 토요일

필리피쿠스(Philippicus, AD.?~713) : 동로마 제국 제73대 황제(AD.711~713)

필리피쿠스(Philippicus, AD.?~713) : 동로마 제국 제73대 황제(AD.711~713)

 
  • Philippicus [Latin : Filepicus / Greek : Φιλιππικός / romanized : Philippikós]
  • Bardanes [Greek : Βαρδάνης / romanized : Bardánēs / Armenian : Վարդան, Vardan]
  • 출생 : 미상 / 페르가뭄(Pergamum)
  • 사망 : 713
  • 부친 : 니케포루스(Nicephorus)
  • 재위 : 711114~ 71363

필리피쿠스(Philippicus, AD.?~713) : 동로마 제국 제73대 황제(AD.711~713)
필리피쿠스(Philippicus, AD.?~713) : 동로마 제국 제73대 황제(AD.711~713)
 

8세기 동로마의 폭풍 속 짧은 빛 : 필리피쿠스 황제의 비운의 치세 (711-713)

 
8세기 초, 동로마 제국은 ‘20년 무정부 시대(Twenty Years' Anarchy)’라 불리는 극심한 정치적 혼란과 불안정의 시기를 겪고 있었다. 695년에 폐위된 후 10년 만에 기적적으로 복위했지만, 광적인 복수와 잔혹한 통치로 제국을 더욱 피폐하게 만든 유스티니아누스 2(Justinian II, 668 또는 669711)의 말년은 제국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이러한 난국 속에서 반란을 통해 황제의 자리에 올라 약 19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711713) 동로마 제국을 통치한 인물이 바로 필리피쿠스(Philippicus, 사망 713) 황제이다. 그의 통치는 제국의 안정보다는 종교적 논쟁과 끊임없는 외침 속에서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다.
 

1. 야망 있는 군인 바르다네스 : 유배지에서 황제의 꿈을 키우다

 
필리피쿠스의 본명은 바르다네스(Bardanes)’였다. 그의 정확한 출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8세기 초의 인물로 트라키아(Thracia) 또는 아르메니아(Armenia) 혈통을 지닌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아버지 이름은 니케포루스(Nicephorus)였다. 바르다네스는 로마 제국의 군인으로 경력을 시작했으며, 유스티니아누스 2세 치세 동안 고위 장교로 복무했다.
 
그는 일찍이 정치적 야망을 드러냈다. 유스티니아누스 2세가 첫 번째 폐위당하고 레온티우스(Leontius, 695698)가 황위에 올랐을 때, 바르다네스는 레온티우스를 지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레온티우스의 뒤를 이은 티베리우스 3(Tiberius III, 698705)는 바르다네스의 야심을 경계했다. 티베리우스 3세는 그를 흑해 연안의 로마 도시 케르손(Cherson)으로 유배 보냈는데, 이곳은 로마 제국 황족이나 고위 인사들의 주요 유배지였다.
 
705, 유스티니아누스 2세가 기적적으로 황위에 복위하자, 바르다네스의 운명은 또다시 뒤바뀌었다.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과거 자신에게 반역했던 세력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했으며, 바르다네스 역시 유스티니아누스 2세에게 밉보인 인물 중 하나였다. 그는 다시 케르손으로 재차 유배되어 철저한 감시를 받게 된다. 이러한 유배 생활은 바르다네스에게 황실에 대한 깊은 불만과 함께 권력에 대한 강렬한 집착을 심어주었을 것이다.
 

2. 케르손의 반란 : 비운의 유스티니아누스 2세에 대한 최후의 일격 (711)

 
711, 유스티니아누스 2세의 잔혹한 통치는 극에 달했고, 제국 전역의 불만은 폭발 직전이었다. 특히 그의 가혹한 세금 정책과 끊임없는 숙청은 백성들과 군부 모두에게 공포와 증오를 심어주었다.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케르손이 자신에게 불만을 품은 유배자들의 온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반란의 기미를 보이던 케르손에 대규모 원정대를 파견하여 도시를 파괴하고 시민들을 학살했다.
 
그러나 이러한 폭압적인 진압은 오히려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케르손에 유배 중이던 바르다네스는 지역 유배자들, 이들을 경계하던 지역 귀족들, 그리고 당시 북쪽 초원의 강력한 유목 민족이던 하자르족(Khazars)의 지지를 얻어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하자르 카간(Khagan)은 바르다네스에게 군사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바르다네스가 이끄는 반란군은 흑해를 거쳐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했다. 당시 수도의 방어는 취약했으며, 시민들은 유스티니아누스 2세에게 등을 돌린 지 오래였다. 바르다네스의 함대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했을 때, 시민들과 수도 수비대의 상당수는 큰 저항 없이 반란군에게 합류했다.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도시 밖에 나가 원정을 준비 중이었는데,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수도로 돌아오려다 도중에서 바르다네스의 병사들에게 체포당했다.
 
711127,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코메타(Kometa)에서 비참하게 처형당했다. 이로써 7세기 동로마 제국을 풍미했던 헤라클리우스 왕조는 완전히 단절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2세의 아들이자 공동 황제였던 티베리우스(Tiberius)도 처형당하면서, 바르다네스는 로마 제국의 새로운 황제로 등극했다. 그는 이때 황제명으로 필리피쿠스(Philippicus)’를 사용했다 .
 

3. 황제 필리피쿠스의 통치 : 종교적 논쟁과 외침 (711-713)

 
황제로 즉위한 필리피쿠스는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 제국을 안정시키려 노력했다. 그러나 그의 치세는 종교적 문제와 외침으로 얼룩지며 짧고 불안정한 시기가 되었다.
 

1) 종교 정책 : 단일 의지론의 부활과 교회와의 갈등

 
필리피쿠스의 가장 큰 실책은 종교 정책에서 드러났다. 그는 단일 의지론(Monothelitism)’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단일 의지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divine)과 인성(human)이 있지만, 의지(will)는 하나라는 주장이었다. 이는 680년부터 681년까지 열렸던 제6차 에큐메니칼 공의회(Sixth Ecumenical Council)에서 이단으로 정죄되고 칼케돈 공의회(Council of Chalcedon)두 의지론(Dyothelitism)’이 정통 교리로 확립된 상태였다.
 
그러나 필리피쿠스는 제6차 에큐메니칼 공의회의 결정을 취소하고,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던 공의회 상징물과 황궁의 공의회 그림을 제거하는 등 단일 의지론을 다시 제국의 공식 교리로 강요했다. 이로 인해 그는 정통 칼케돈 교도들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았다. 특히 서방의 로마 교황 콘스탄티누스(Pope Constantine)는 그의 이러한 종교 정책을 강력하게 비난하고 황제의 이름을 교황청 공식 문서에서 삭제하며 동서 교회 간의 심각한 분열(아카키우스 분열의 재현)을 야기했다. 그는 또한 정통파 총대주교 키루스(Cyrus)를 파면하고, 자신이 단일 의지론을 주장하며 즉위하는 것을 반대했던 요한네스(Johnnes) 수도원장을 죽였다. 이러한 조치는 제국 내 종교적 통일성을 해치고 황제에 대한 불만을 가중시켰다.
 

2) 대외 정책 : 불가르족과 아랍의 위협


필리피쿠스 치세 동안 제국은 외부의 끊임없는 위협에 직면했다.
  • 불가르족의 침략 : 유스티니아누스 2세의 동맹이었던 불가르족의 칸 테르벨(Tervel)은 필리피쿠스가 황위를 찬탈하자, 유스티니아누스 2세의 복수를 명분으로 로마 제국을 공격했다. 불가르족은 트라키아(Thrace)를 약탈하고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성벽 앞까지 진격하여 주변 지역을 유린했다. 이들은 황제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막대한 전리품을 가지고 돌아갔다.
  • 우마이야 칼리파국의 침략 : 동방의 숙적 우마이야 칼리파국은 로마 제국의 내부 혼란을 틈타 동부 국경을 침략했다. 712년에 이슬람군은 킬리키아(Cilicia)의 주요 요새 도시 티아나(Tyana)를 함락시키고 약탈했으며, 713년에는 말라티아(Malatya)와 아모리움(Amorium)까지 공격했다. 제국은 이러한 외침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했으며, 이는 필리피쿠스의 군사적 무능함과 국방력 약화를 보여주었다.
 

4. 폭정의 대가 : 필리피쿠스의 몰락과 비극적인 최후 (713)

 
필리피쿠스의 독단적인 종교 정책과 계속되는 군사적 실패, 그리고 재정 악화는 제국 내부의 불만을 극대화시켰다. 황제에 대한 지지는 빠르게 약화되었고, 특히 강력한 종교적 신념을 가진 칼케돈파 인사들을 중심으로 반 황제 세력이 형성되었다.
 
71363, 군부와 귀족 세력의 연합으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 이 반란의 배후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게르마누스 1(Germanus I)와 유능한 장군 아르테미우스(Artemius)가 있었다. 바르다네스를 황제로 추대했던 옵시키온 테마(thema of Opsikion) 소속 군대가 그에게 등을 돌렸다. 필리피쿠스는 취침 중에 반란군에게 급습당했고, 그 자리에서 그의 눈이 뽑히는 실명형(blinding)’을 당했다. 실명은 로마 황제에게 가해지던 일반적인 폐위 처벌이었고, 이는 황위 계승 자격을 박탈하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녔다.
 
눈이 뽑힌 필리피쿠스는 수도원에 유폐되었다. 그러나 그의 통치는 이미 끝나 있었다. 그의 실명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전직 고위 관리였던 아르테미우스가 아나스타시우스 2(Anastasius II, 713715)’라는 황제명으로 새롭게 즉위했다. 필리피쿠스는 실명당한 지 몇 달 뒤인 713, 비참하게 사망했다. 이로써 짧고 혼란스러웠던 필리피쿠스의 치세는 막을 내렸다.
 

5. 필리피쿠스의 유산과 8세기 로마의 단면

 
필리피쿠스의 치세는 로마 제국사에서 비교적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지만, 8세기 초 제국의 불안정성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 정치적 혼란의 상징 : 그의 등극과 몰락은 군사 쿠데타에 의한 황위 찬탈이 일상화되었던 ‘20년 무정부 시대의 극심한 정치적 혼란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 단일 의지론의 마지막 시도 : 그는 단일 의지론을 다시 부활시키려 했던 마지막 황제였다. 그의 실패는 이단 교리에 대한 황제의 강요가 제국 내에서 더 이상 통용되기 어렵다는 것을 증명했으며, 이후 비잔티움 교회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는 데 기여했다.
  • 영토 상실과 국력 약화 : 그의 치세 동안 불가르족과 이슬람군의 침략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면서 제국은 다시 한번 영토를 상실하고 국력이 약화되었다.
  • 비참한 말로의 반복 : 전임자 유스티니아누스 2세를 폐위하고 코를 잘라 유배 보냈던 레온티우스 황제가 결국 똑같은 운명을 겪었듯이, 필리피쿠스 또한 자신에게 승리의 기회를 주었던 군대에 의해 버려지고 눈이 뽑히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함으로써 권력의 무상함을 보여주었다.
 
필리피쿠스는 혼란의 시기에 등장하여 제국의 운명을 바꿀 기회를 가졌지만, 결국 자신의 독단적인 신념과 무능함으로 인해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한 황제로 기억될 것이다. 그의 치세는 로마 제국이 겪었던 8세기 대혼란의 전조를 여실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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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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