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18일 월요일

로마노스 3세 아르기로스(Romanos III Argyros, AD.968~1034) : 동로마 제국 제98대 황제(AD.1028~1034)

로마노스 3세 아르기로스(Romanos III Argyros, AD.968~1034) : 동로마 제국 제98대 황제(AD.1028~1034)

 
  • 로마노스 3세 아르기로스(Romanos III Argyros)
  • [Greek : Ῥωμανός ργυρός / romanized : Rōmanos Argyros / Latinized Romanus III Argyrus]
  • 출생 : 968
  • 사망 : 1034411
  • 부친 : Marianos Argyros
  • 배우자 : Helena, Zoë Porphyrogenita
  • 자녀 : A daughter(by Helena)
  • 재위 : 10281112~ 1034411
  • 대관식 : 10281115
 
로마노스 3세 – 『마드리드 스킬리체스』에 수록된 11세기 그림
로마노스 3세 – 『마드리드 스킬리체스에 수록된 11세기 그림
 

1. 로마노스 3세 아르기로스 황제 : 명문가의 유능한 관료에서 비극적인 통치자로

 
로마노스 3세 아르기로스(Romanos III Argyros, 9681034411)1028년부터 1034년 사망할 때까지 비잔틴 제국을 통치했던 황제이다. 그는 비잔틴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 출신이었고, 황제가 되기 전에는 유능한 고위 관료로 이름을 알렸다. 그러나 그의 재위는 비잔틴 제국에 혼란을 가중시킨 시기로 평가된다. 의도는 좋았으나 결과는 무능했으며, 결국 의문스러운 죽음을 맞이하면서 비잔틴 역사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산 황제로 기억된다.
 

2. 탄생과 배경 : 명문 아르기로스 가문

 
로마노스 아르기로스는 968년에 태어났다. 그는 비잔틴 제국을 대표하는 군사 귀족 가문 중 하나인 아르기로스 가문의 일원이었다. 그의 아버지인 마리아노스 아르기로스(Marianos Argyros)는 테오필락토스라는 아들 외에도 바실리우스(Basil Argyros), 레오(Leo Argyros), 풀케리아(Pulcheria Argyropoulina) 등의 형제자매들을 두었는데, 이들 모두 제국 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인물들이었다. 특히 그의 조상 중에는 10세기 비잔틴 황제인 로마노스 1세 레카페노스(Romanos I Lekapenos, 870년경 948)의 딸과 결혼한 로마노스 아르기로스(Romanos Argyros)도 있어, 그의 가문은 황실과도 오랜 인척 관계를 맺고 있었다.
 
황제가 되기 전, 로마노스는 여러 중요한 직책을 역임하며 뛰어난 행정 능력을 보였다. 그는 옵시키온(Opsikion) 테마()크리테스(krites, 판사)’로 일했으며, 이 시기에 이교도들을 박해하기도 했다. 이후 프로토스파타리오스(protospatharios)’ 계급으로 승진한 그는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수석 법무관인 콰이스토르(quaestor)’로 임명되었고, 히포드롬(Hippodrome) 고등 법원의 판사가 되었다. 그는 저명한 법률가인 에우스타티오스 로마이오스(Eustathios Rhomaios)의 법적 판결 집대성인 페이라(Peira)에도 언급되어 있다. 더 나아가 파트리키오스(patrikios)’ 계급과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의 오이코노모스(oikonomos, 행정관)’ 직책까지 올랐으며, 콘스탄티노스 8(Constantine VIII, 9601028) 황제 치세에는 콘스탄티노플의 도시 총독(urban prefect)’을 역임했다. 도시 총독은 원로원의 공식적인 수장이자 황제의 최고 부관 중 한 명이었다.
 

3. 극적인 즉위 : 콘스탄티노스 8세의 선택

 
로마노스 3세의 황제 즉위 과정은 매우 극적이었다. 10281112, 자녀 없이 사망한 전임 황제 콘스탄티노스 8세는 병상에서 죽어가는 상황이었다. 그는 후계 문제로 고심하다가, 자신의 딸 조에 포르피로게니타(Zoë Porphyrogenita, 9781050)의 남편이 될 인물을 찾았다. 당대 최고의 관료였던 도시 총독 로마노스 아르기로스가 유력한 후보로 떠올랐다.
 
콘스탄티노스 8세는 로마노스에게 이미 결혼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즉시 자신의 아내 헬레나(Helena)와 이혼하고 자신의 딸 조에와 결혼할 것을 강요했다. 이는 당시 비잔틴 사회에서 매우 이례적이고 논란이 많은 조치였지만, 황실의 후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로마노스는 어쩔 수 없이 이혼을 하고 3일 후인 1115일에 조에와 결혼했으며, 그 다음 날인 1116일에 콘스탄티노스 8세가 사망하자 로마노스 3세 아르기로스라는 이름으로 비잔틴 제국의 황제로 즉위했다.
 

4. 황제로서의 통치 : 선의와 무능의 그림자

 
로마노스 3세는 의도는 좋았으나, 결과적으로 무능한 황제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세금 제도를 문란하게 만들고 군대를 약화시켰다.
 
  • 재정 정책 실패 : 그는 부유한 귀족들에게 부과되던 농민 보호세를 폐지하는 등의 조치로 재정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이는 단기적으로는 귀족들의 지지를 얻는 듯 보였지만, 장기적으로 제국의 재정 기반을 흔들고 소농민들의 삶을 위협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는 또한 개인적으로 과도한 소비를 하여 재정 위기를 심화시켰다.
  • 군사적 무능 : 특히 1030년에 그가 직접 이끌었던 알레포(Aleppo) 원정은 비참한 실패로 끝났다. 이는 그의 군사적 무능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으로, 제국의 위신을 크게 떨어뜨렸다.
  • 황후 조에와의 관계 악화 : 로마노스 3세와 황후 조에의 관계는 시간이 갈수록 악화되었다. 조에는 남편의 군사적 실패와 무능함에 실망했고, 둘은 결국 서로를 멀리하게 되었다.
  • 종교 및 건축 후원 : 신심 깊은 황제 : 로마노스 3세는 비록 행정과 군사 면에서는 무능한 모습을 보였지만, 신심이 깊은 황제로서 교회와 수도원의 건설 및 재건에 막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특히, 콘스탄티노플 근처 마게르나(Magernas)의 성모 마리아 수도원을 비롯한 여러 종교 시설을 지었다. 그는 또한 자신을 기념하기 위한 독자적인 동전을 발행하여 그 업적을 기리기도 했다. 이러한 종교적 후원은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유일하게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한 업적으로 남아 있다. 이러한 투자는 비록 재정적으로는 부담이 되었을지언정, 그의 신앙심을 드러내고 민심을 얻으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5. 불안정한 말년과 의문스러운 죽음

 
로마노스 3세는 재위 6년 만인 1034411일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매우 의문스러운 채로 남아있다. 역사적 기록들은 그가 독살당했거나 살해당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그의 죽음에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황후 조에와 그녀의 정부 미하일(훗날 미하일 4세 황제가 됨)이었다.
 
조에와 미하일의 관계는 이미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로마노스 3세의 시신은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마게르나 성모 마리아 수도원에 매장되었다. 황제가 사망한 지 불과 몇 시간 후, 조에 포르피로게니타는 자신의 연인이었던 미하일 4(Michael IV the Paphlagonian, 1010년경1041)를 새로운 황제로 옹립했다.
 

6. 평가와 유산 : 비잔틴 역사 속의 로마노스 3

 
로마노스 3세 아르기로스의 통치는 비잔틴 제국에 있어 격동의 시기를 대표한다. 그는 개인적으로는 고위 관료로서 유능하고 경험이 많았으며, 신심이 깊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황제로서의 역할은 미흡하여 재정 및 군사 부문에서 제국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특히 그의 죽음은 궁정 내의 권력 다툼과 배신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마케도니아 왕조 말기 비잔틴 황실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비록 그의 재위 기간은 제국에 큰 업적을 남기지 못했지만, 그의 삶은 미천한 농부의 아들에서 황제가 된 인물(바실리우스 1)과 태생부터 자줏빛 방에서 태어난정통 황제(콘스탄티노스 7) 사이에서, 능력은 있으나 운명에 휩쓸린 또 다른 유형의 비잔틴 통치자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의 이야기는 비잔틴 제국의 흥망성쇠 속에서 한 개인의 드라마틱한 인생 역정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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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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