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리우스 3세(Tiberius III, ?~705/706) : 동로마 제국 제72대 황제(AD.695~705)
- Tiberius III [Greek : Τιβέριος / romanized : Tibérios]
- 본명 : 아프시마르(Apsimar) [Latin : Apsimarus / Greek : Ἀψίμαρος / romanized : Apsímaros]
- 출생 : 미상
- 사망 : 705년 8월부터 706년 2월 사이 / 콘스탄티노플
- 자녀 : 테오도시우스(Theodosius, Theodosius III?), 헤라클리우스(Heraclius)
- 재위 : 698년 ~ 7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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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리우스 3세(Tiberius III, ?~705/706) : 동로마 제국 제72대 황제(AD.695~705) |
7세기 로마의 혼돈 속 폭풍 : 동로마 티베리우스 3세의 짧고 비극적인 치세 (698-705)
7세기 후반의 동로마 제국은 말 그대로 ‘혼돈의 시기’였다. 끊임없이 황제가 바뀌고 군사 쿠데타가 난무했던 이 시기를 역사가들은 흔히 ‘20년 무정부 시대(Twenty Years' Anarchy)’라고 부른다. 이 혼란스러운 시대에 황제의 자리에 올라 약 7년간(698–705) 동로마 제국을 통치한 인물이 바로 티베리우스 3세(Tiberius III, 사망 705/706)이다. 한때 제국을 안정시키려 노력했지만, 결국 과거 황제의 복수심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그는 5세기 로마 제국의 불안정한 운명과 피비린내 나는 권력 투쟁을 여실히 보여준다.
1. 평범한 군인의 등장 : 아프시마르의 배경과 군사적 재능
티베리우스 3세의 본명은 ‘아프시마르(Apsimar)’였다. 그의 출생지는 명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일부 역사가들은 그를 게르만족 계열로 추정했지만, 다른 이들은 슬라브족이나 튀르크족 계열일 수 있다고 보기도 한다. 그는 이사우리아(Isauria) 또는 아나톨리아(Anatolia) 남부 해안에 위치한 중요한 군사 구역인 키비르아이오테 테마(Cibyrrhaeot Theme)의 ‘드룽가리오스(droungarios)’, 즉 중급 지휘관이었다. 드룽가리오스는 약 천 명의 병사를 지휘하는 직책이었다.
아프시마르는 유능한 군인이었다. 발칸반도에서 슬라브족을 상대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며 명성을 쌓았으며, 이를 통해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군사적 재능과 경험은 훗날 그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2. 카르타고 참패와 반란 : 아프시마르의 황위 찬탈 (698)
아프시마르가 황제에 오르게 된 배경에는 당시 동로마 제국이 직면한 아랍과의 전쟁, 특히 북아프리카에서의 참패가 결정적이었다. 당시 동로마 제국은 북아프리카의 주요 도시였던 카르타고(Carthage)를 아랍 우마이야 칼리파국(Umayyad Caliphate)에게 빼앗긴 상태였다. 황제 레온티우스(Leontius, 695–698)는 요한 파트리키우스(John the Patrician)가 이끄는 대규모 원정대를 파견하여 카르타고를 수복하려 했다. 아프시마르도 이 원정대의 일원이었다.
로마군은 카르타고를 잠시 수복했지만, 아랍군의 강력한 반격에 밀려 결국 크레타(Crete) 섬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대규모 원정의 참패는 병사들 사이에 동요를 불러일으켰다. 황제 레온티우스의 가혹한 처벌을 두려워한 지휘관들은 반란을 모의했다. 그들은 지휘관 요한 파트리키우스를 살해하고, 아프시마르를 새로운 황제로 추대했다.
아프시마르는 재빨리 군대를 수습하고 함대를 이끌고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Constantinople)로 향했다. 수도에 도착한 그는 시민들과 군대의 지지를 얻어 손쉽게 레온티우스 황제를 폐위시켰다. 레온티우스는 폐위 후 코가 잘리는 ‘리노코피아(rhinokopia)’ 형벌을 받고 수도원의 유배 생활을 시작해야 했다. 아프시마르는 698년에 동로마 제국의 황제 자리에 올랐으며, 이때 ‘티베리우스 3세’라는 황제명을 사용했다.
3. 티베리우스 3세의 치세 : 동방 방어와 가족 관계 (698-705)
티베리우스 3세는 황위에 오른 후, 레온티우스가 실패했던 북아프리카 재수복에는 집중하지 않았다. 그는 대신 동방의 우마이야 칼리파국과의 국경 방어에 힘썼으며, 이 과정에서 군사적으로 일부 성공을 거두었다. 당시 이슬람은 동부 국경에서 지속적으로 제국을 압박하고 있었다.
티베리우스 3세의 통치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지만, 일부 역사가들은 그를 “양심적이고 효과적인 통치자”로 평가하며, 만약 그가 더 오래 재위했다면 “비잔티움의 위대한 황제 중 한 명으로 기억되었을 것”이라고도 말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가 즉위했을 당시에는 이미 비잔티움 아프리카 지역을 재통제하기에는 너무 늦었으며, 이후 황조들은 아프리카 상실의 책임을 티베리우스에게 전가하려는 경향이 있었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그의 가족 관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티베리우스 3세에게는 ‘테오도시우스(Theodosius)’라는 이름의 아들이 한 명 있었는데, 이 아들은 729년경 에페소(Ephesus)의 주교가 되었고, 754년에 히에리아 공의회(Council of Hieria)를 주재했으며, 레오 3세(Leo III, 717–741)와 콘스탄티누스 5세(Constantine V, 741–775) 황제의 조언자였다. 일부 학자들은 이 테오도시우스가 훗날 황제가 된 테오도시우스 3세(Theodosius III, 715–717)와 동일 인물일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했으나, 이는 주류 학계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의 배우자의 이름 등 다른 가족 정보는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이는 당시 그가 통치했던 시기, 즉 ‘20년 무정부 시대’의 혼란으로 인해 많은 기록이 소실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4. 유스티니아누스 2세의 복수 : 폐위와 비참한 최후 (705)
티베리우스 3세의 치세는 705년, 과거 그에게 폐위당하고 코가 잘려 유배되었던 전임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2세(Justinian II, 668 또는 669–711)의 극적인 복귀와 함께 막을 내렸다.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10년간의 유배 생활 끝에 카자르족(Khazars)과 불가르족(Bulgars)의 지원을 받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왔다.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비밀 통로를 통해 수도에 진입하여 손쉽게 권력을 되찾았다. 황위에 복귀한 그는 자신에게 가해진 모욕에 대해 무자비한 복수를 시작했다. 그는 자신을 폐위시켰던 레온티우스와, 이후 레온티우스를 폐위시켰던 티베리우스 3세 두 황제를 모두 체포했다.
705년 2월,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두 전임 황제를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히포드롬(Hippodrome)에서 끌고 나와 공개적으로 조리돌림했다. 그들은 유스티니아누스 2세의 발아래 무릎을 꿇고 굴욕적인 모습을 보여야 했다. 굴욕이 끝난 후, 그들은 키네기온(Kynegion)이라는 도시의 한 구역으로 끌려가 참수당했다. 티베리우스 3세의 시신은 처음에 바다에 던져졌으나, 나중에 다시 수습되어 프로테(Prote) 섬의 한 교회에 안장되었다. 이로써 티베리우스 3세의 파란만장했던 삶은 완전히 막을 내렸다.
5. 티베리우스 3세의 유산과 7세기 로마의 단면
티베리우스 3세의 치세는 불과 7년이라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7세기 동로마 제국의 불안정한 정치적 현실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기록된다.
- 20년 무정부 시대의 황제 : 그는 황제가 군사 쿠데타에 의해 등극하고 또다시 쿠데타로 몰락하는 ‘20년 무정부 시대’의 전형적인 황제였다. 그의 통치는 황제권의 약화와 군부의 막강한 영향력을 극명하게 드러냈다.
- 영토 상실의 책임 : 비록 그가 즉위했을 때 북아프리카 재수복은 사실상 불가능했다고 하더라도, 후대의 역사가들은 이 지역 상실의 책임을 그에게 돌리기도 했다. 이는 그의 통치기가 제국 영토의 급격한 축소와 맞물려 있음을 시사한다.
- 복수극의 희생양 : 그의 비참한 최후는 로마 제국 황실의 잔혹한 권력 투쟁과 복수극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폐위된 황제에 대한 신체 훼손과 이후의 처형은 이 시기 황위 다툼의 잔인성을 증명한다.
티베리우스 3세는 혼란의 시대에 등장하여 잠시 제국을 안정시키려 노력했지만, 결국 그 혼란의 흐름을 벗어나지 못하고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황제였다. 그의 통치는 동로마 제국이 겪었던 7세기 대혼란의 모습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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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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