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노스 8세(Constantine VIII, AD.690~1028) : 동로마 제국 제97대 황제(AD.962~1028/1025~1028)
- 콘스탄티노스 8세(Constantine VIII)
- [Greek : Κωνσταντῖνος / romanized : Kōnstantīnos]
- 출생 : 960년
- 사망 : 1028년 11월 11/12일
- 부친 : 로마노스 2세(Romanos II)
- 모친 : 테라파노(Theophano)
- 배우자 : Helena
- 자녀 : Eudokia, Zoe, Theodora
- 재위 : 1025년 12월 15일 ~ 1028년 11월 11일
- 대관식 : 962년 3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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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누스 8세의 동시대 미니어처 — 바리 엑술테트 두루마리(Bari Exultet roll)에서 발췌 |
1. 콘스탄티노스 8세 황제 : 무관심 속 긴 공동 통치, 그리고 짧은 혼돈의 친정
콘스탄티노스 8세(Constantine VIII, 960년–1028년 11월 11/12일)는 962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비잔틴 제국의 황제였다. 그는 ‘자줏빛 방에서 태어난 자(porphyrogennetos)’로서, 태어날 때부터 황실의 적통임을 상징하는 칭호를 가졌다. 로마노스 2세(Romanos II, 생몰년 미상)의 막내아들이자, 역사상 가장 위대한 비잔틴 황제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바실리우스 2세(Basil II, 958–1025)의 동생이었다. 그러나 그는 형 바실리우스 2세와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무관심한 성향을 가졌다. 66년간이라는 제국 역사상 가장 긴 기간 동안 공동 황제로 재위했지만, 단 3년간의 친정 기간은 방만한 국정 운영과 잔인한 숙청으로 얼룩진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2. 탄생과 길고 긴 공동 황제 시기 (962-1025)
콘스탄티노스 8세는 960년에 황제 로마노스 2세(Romanos II)와 황후 테오파노(Theophano)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태어난 지 2년 만인 962년 3월 30일에 아버지 로마노스 2세에 의해 공동 황제로 즉위했다. 이후 그의 삶의 대부분은 형 바실리우스 2세의 그림자에 가려진 채 공동 황제로 존재했다.
로마노스 2세 사망 후, 어린 콘스탄티노스 8세와 그의 형 바실리우스 2세는 군인 황제인 니케포로스 2세 포카스(Nikephoros II Phokas, 912년경–969년)와 요한네스 1세 치미스케스(John I Tzimiskes, 925년경–976년) 아래에서 공동 황제직을 유지했다. 이후, 그의 형 바실리우스 2세가 단독 황제가 되어 50년 가까이 제국을 통치하는 동안에도 콘스탄티노스 8세는 계속해서 공동 황제로서 명목상의 지위를 유지했다. 바실리우스 2세가 뛰어난 군사적 업적과 강력한 리더십으로 제국을 이끌었던 반면, 콘스탄티노스 8세는 국가 운영이나 군사 문제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66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형식적인 황제의 특권을 누리며 개인적인 향락에 몰두하는 삶을 보냈다. 이는 그를 아우구스투스(Augustus) 이래 모든 로마 황제 중 사실상 가장 오랫동안 재위한 인물로 만들었다.
3. 개인적인 취향과 성격
젊은 시절의 콘스탄티노스는 키가 크고, 우아하며, 운동 신경이 뛰어났다. 발성도 좋았고, 수사학에도 뛰어났다. 그는 씨름 시합에 참여하거나, 말을 훈련하고 타는 것을 즐기는 등 활동적인 취미를 가졌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모습은 나이가 들면서 점차 사라졌다. 그는 또한 대식가이자 미식가로, 이러한 생활 방식은 말년에 그에게 만성적인 통풍을 가져왔고, 결국 걷는 데 어려움을 겪게 만들었다.
그는 평생 정치, 국정 운영, 군사 문제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으며, 심지어 형 바실리우스 2세가 사망한 1025년 단독 황제가 된 이후에도 이러한 성향은 변하지 않았다. 한 기록에 따르면 그는 “방탕한 쾌락에 탐닉하며 삶을 보내는 것”에 만족했다고 한다.
4. 짧은 단독 통치(1025-1028) : 무관심과 그 결과
1025년 12월 15일, 67세의 나이로 바실리우스 2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콘스탄티노스 8세는 마침내 단독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그의 짧은 친정 기간(약 3년)은 무능력과 무관심으로 인해 제국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바실리우스 2세는 강력한 통치로 비잔틴 귀족들을 엄격하게 통제했지만, 콘스탄티노스 8세는 이러한 통제력을 유지할 수 없었다. 귀족들은 그를 “어떤 도덕적 섬유도 없는” 인물로 여겼고, 그에게서 점차 더 많은 양보를 얻어내려 했다. 결과적으로, 자격 없는 인물들이 고위 정부 직책을 받았고, 바실리우스 2세가 도입했던 강력한 토지법은 아나톨리아(Anatolia) 귀족들의 압력에 굴복하여 폐지되었다. 이는 제국의 중앙집권 체제를 약화시키고 장기적인 불안정의 씨앗을 뿌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의 통치는 또한 예측 불가능한 잔인성으로 얼룩져 있었다. 도전받거나 음모를 의심할 때마다 황제는 충동적으로 잔인하게 대응했다. 유죄 판결을 받은 엘리트들은 고문을 당하거나 눈이 멀게 되는 형벌을 받기도 했다.
5. 가족 관계와 계승
콘스탄티노스 8세는 헬레나(Helena)라는 여성과 결혼했다. 둘 사이에는 세 명의 딸이 있었는데, 이들은 훗날 비잔틴 제국의 황위 계승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 에우도키아(Eudokia, 생몰년 미상) : 첫째 딸.
- 조에 포르피로게니타(Zoe Porphyrogenita, 978년경–1050년) : 둘째 딸이자 그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는 로마노스 3세 아르기로스(Romanos III Argyros, 968–1034)의 아내가 되었다.
- 테오도라 포르피로게니타(Theodora Porphyrogenita, 980년경–1056년) : 셋째 딸.
콘스탄티노스 8세는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1028년 11월 11일 또는 12일 사망하면서 그의 뒤를 이어 그의 사위이자 딸 조에의 남편인 로마노스 3세 아르기로스가 제위에 오르게 된다.
6. 유산과 역사적 평가
콘스탄티노스 8세는 66년이라는 전례 없는 기간 동안 공동 황제로 재위했지만, 실질적인 통치자로서의 역할은 미미했다. 그의 삶은 쾌락을 추구하고 국정에는 무관심했던 인물의 전형을 보여준다. 단 3년의 친정 기간 동안 드러난 그의 무능력과 방만한 통치, 그리고 예측 불가능한 잔인성은 바실리우스 2세가 어렵게 쌓아 올린 제국의 안정 기반을 흔들었고, 이는 이후 비잔틴 제국이 직면하게 될 혼란의 서막을 알리는 것이었다. 비록 그는 개인적으로 무책임하고 무능했지만, 그의 세 딸, 특히 조에와 테오도라를 통해 마케도니아 왕조의 명맥을 이어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의 통치는 마케도니아 왕조의 황금기가 저물고 있음을 시사하는 지표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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