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 3세(Leo III, AD.c.685~741) : 동로마 제국 제76대 황제(AD.717~741)
- 레오 3세 이사우리아인(Leo III the Isaurian)
- [Greek : Λέων ὁ Ἴσαυρος / romanized : Leōn ho Isauros]
- 출생 : 685년경 / Germanikeia, Umayyad Caliphate
- 부친 : Constantine
- 모친 : Maria
- 배우자 : 마리아(Maria)
- 자녀 : 콘스탄티누스 5세(Constantine V), 안나(Anna), 이레네(Irene), 코스모(Kosmo)
- 재위 : 717년 3월 25일 ~ 741년 6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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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 3세(Leo III, AD.c.685~741) : 동로마 제국 제76대 황제(AD.717~741) |
폭풍 속 제국을 구원한 이사우리아인 : 동로마 레오 3세 황제의 대업 (717-741)
7세기 말부터 8세기 초, 동로마 제국은 ‘20년 무정부 시대(Twenty Years' Anarchy)’라 불리는 극심한 혼란과 정치적 불안정의 시기를 겪고 있었다. 695년부터 717년까지, 불과 22년 동안 무려 7명의 황제가 교체될 정도로 제국은 끊이지 않는 군사 쿠데타와 파벌 싸움으로 휘청거렸다. 게다가 동방의 이슬람 우마이야 칼리파국(Umayyad Caliphate)은 이 틈을 타 제국 영토를 광범위하게 침략하며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Constantinople)를 직접적으로 위협했다. 이러한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동로마 제국의 황제 자리에 올라 약 24년간(717–741) 통치하며, 제국을 파멸 직전에서 구원하고 새로운 시대를 연 인물이 바로 레오 3세 이사우리아인(Leo III the Isaurian, 685경–741)이다. 그는 이사우리아 왕조(Isaurian dynasty)의 창시자이자, 로마 제국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황제 중 한 명으로 평가된다.
1. 카파도키아의 젊은 전사 코논, 황위로 향하는 여정
레오 3세의 본명은 ‘코논(Konon)’이었다. 그는 서기 685년경 소아시아 카파도키아(Cappadocia) 지역의 게르마니케이아(Germanikeia, 현대 튀르키예의 카흐라만마라슈)에서 태어났다. 그의 출신은 흔히 ‘이사우리아인’으로 불리지만, 이는 그의 성장 과정보다는 이후에 주어진 이름이며, 실제로 그가 이사우리아 지방 출신이라는 직접적인 증거는 부족하다. 그의 가족은 시리아(Syria) 지방으로 이주했고, 코논은 아랍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으며, 심지어 ‘시리아인(the Syrian)’이나 ‘사라센(Saracen)적인 사고방식을 지닌 자’로 불리기도 했다.
코논은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2세(Justinian II, 668 또는 669–711) 치세 동안 군인으로 경력을 시작하여 고위 장교로 빠르게 승진했다. 그는 이사우리아인의 군사적 재능을 보여주며 이슬람과의 전투에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었고, 뛰어난 군사적 통찰력으로 명성을 얻었다. 이후 아나스타시우스 2세(Anastasius II, 713–715) 황제 치세에는 ‘아나톨리콘 테마(Anatolicon Theme)’의 총독(strategos)이라는 중요한 지위에 올랐다.
아나스타시우스 2세가 폐위되고 테오도시우스 3세(Theodosius III, 715–717)가 황제에 오르면서 제국은 다시 혼란에 빠졌다. 테오도시우스 3세는 강력한 리더십이 부족했고, 이슬람 제국은 이러한 로마의 내분을 틈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략할 대규모 원정을 준비하고 있었다. 코논은 당시 동방의 중요한 테마인 ‘아르메니아콘 테마(Armeniacon Theme)’의 총독 아르타바스도스(Artabasdos)와 동맹을 맺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하여 테오도시우스 3세를 황제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다. 717년 3월 25일, 코논은 ‘레오 3세’라는 황제명으로 정식으로 동로마 제국의 황제 자리에 올랐다. 그는 제국이 외부의 가장 큰 위협에 직면했을 때, 통치자로 나선 구원자와 같았다.
2. 제국의 생존을 건 사투 : 제2차 아랍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성전 (717-718)
레오 3세가 황위에 올랐을 때, 제국은 파멸 직전이었다. 이슬람 우마이야 칼리파국의 칼리파 술라이만 이븐 압둘 말리크(Sulayman ibn Abd al-Malik)는 수륙 양면에서 역사상 전례 없는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하려 했다. 당시 이슬람군의 규모는 약 8만 명의 보병과 800척에서 1,800척에 달하는 대규모 해군 함대로 추정된다. 로마 제국의 수도는 인류 역사의 한 축이 되는 대결을 앞두고 있었다.
레오 3세는 이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탁월한 리더십과 군사적 재능을 발휘했다. 그는 즉위 직후 다음과 같은 신속한 조치를 취했다.
- 성벽과 방어 시설 재정비 : 레오 3세는 ‘테오도시우스 성벽(Theodosian Walls)’을 포함한 도시의 방어 시설을 빠르게 보수하고 강화했다.
- 식량 및 물자 비축 : 장기적인 공성전에 대비하여 도시 내에 대규모 식량과 군수 물자를 비축하도록 명령했다.
- 전략적 방어 : 717년 8월, 이슬람 해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하자, 레오 3세는 로마의 신무기인 ‘그리스 불(Greek Fire)’을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이슬람 함대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이로 인해 이슬람군은 도시 봉쇄에 어려움을 겪었다.
혹독한 겨울이 찾아오면서 이슬람군은 식량 부족과 질병으로 큰 고통을 겪었다. 레오 3세는 불가르족(Bulgars)과 동맹을 맺어 이슬람군의 보급선을 위협하도록 했다. 결국 이슬람군은 대규모 병력 손실과 해군의 궤멸적인 피해를 입은 채, 718년 8월 15일 봉쇄를 풀고 철수했다.
이 승리는 로마 제국, 나아가 서유럽 문명을 이슬람 세력의 거대한 팽창으로부터 보호한 결정적인 전투였다. 레오 3세는 ‘이슬람의 침략을 막은 로마의 수호자’로서 제국 내외에서 영웅으로 추앙받게 된다. 그의 승리는 ‘20년 무정부 시대’를 끝내고 제국에 안정과 번영을 가져온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3. 통치와 개혁 : 아이콘 파괴와 법률 제정
레오 3세는 군사적 성공에 그치지 않고, 제국의 재건을 위한 광범위한 내치 개혁을 단행했다. 그의 통치 기간은 로마 제국이 비잔티움 제국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전환기였다.
1) 성상 파괴 정책(Iconoclasm)
레오 3세의 가장 논란이 많았던 정책은 바로 ‘성상 파괴(Iconoclasm)’ 운동이었다. 그는 성상을 숭배하는 행위가 우상 숭배와 다를 바 없다고 보았다. 그의 이러한 신념은 이슬람과 유대교의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으며, 신학적인 논리와 더불어 성상 숭배에 대한 민중의 과도한 집착을 통제하고 교회의 재산과 권력을 견제하려는 정치적인 의도도 있었다.
- 정책의 시작 : 726년, 레오 3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칼케 문(Chalke Gate) 위에 있던 ‘그리스도상(Image of Christ)’을 파괴하는 것으로 성상 파괴 정책을 공식적으로 시작했다.
- 저항과 갈등 : 그의 정책은 제국 내에서 큰 반발을 샀다. 특히 성상 숭배를 지지하던 서방 교회(로마 교황청)와 수도원 세력은 황제의 정책을 강력히 비난했다. 교황 그레고리오 2세(Pope Gregory II, 669–731)는 황제의 정책을 거부하며 파문 위협까지 가했다. 그러나 레오 3세는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고 강력하게 정책을 추진했다. 이 성상 파괴 운동은 레오 3세 이후에도 약 1세기 동안 동로마 제국의 중요한 종교적, 정치적 논쟁의 불씨가 되었다.
2) 법률 개혁
에클로가(Ecloga) 편찬 : 레오 3세의 또 다른 중요한 업적은 로마법을 재정비하고 726년에 ‘에클로가(Ecloga, 법률 선택)’라는 법전을 편찬한 것이다. 에클로가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 시대의 법전인 ‘코르푸스 유리스 시빌리스(Corpus Juris Civilis)’를 간소화하고, 군사법, 해상법, 농업법 등을 새로 추가하며 기독교적인 도덕적 가치를 반영하여 개정된 법률이었다.
이 법전은 라틴어 대신 그리스어로 작성되어 일반 백성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으며, 사회 정의를 구현하고 제국 행정을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는 법률을 통해 제국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을 시도한 중요한 사례로 평가된다.
3) 행정 및 재정 개혁
레오 3세는 제국의 재정을 확보하고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세금 제도를 개혁하고, 행정 시스템을 정비했다. 특히 테마(thema) 제도를 강화하고 국방비를 효율적으로 운용하여 제국의 방어력을 높였다. 그의 개혁은 제국의 장기적인 안정과 번영을 위한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4. 레오 3세의 유산과 동로마 제국에 미친 영향
레오 3세는 741년 6월 18일, 5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성 사도 교회(Church of the Holy Apostles)에 안치되었다. 그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 5세(Constantine V, 718–775)가 황제에 즉위했다.
레오 3세의 치세는 로마 제국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기 중 하나로 기록된다.
- 제국의 구원자이자 이사우리아 왕조의 창시자 : 그는 ‘20년 무정부 시대’를 끝내고,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아랍 공성전을 성공적으로 방어함으로써 제국을 파멸 직전에서 구원했다. 이는 동로마 제국이 이후 천 년 동안 존속할 수 있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으며, 그의 이름에서 유래한 이사우리아 왕조를 확립했다.
- 동서 관계의 변화 : 성상 파괴 정책은 로마 교황청과의 관계를 악화시켰고, 이는 이후 동서 교회의 분열과 동서 로마 제국의 점진적인 분화를 더욱 가속화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 비잔티움 정체성의 강화 : 그의 치세 동안 라틴어 대신 그리스어가 제국의 공식 언어로 확고히 자리 잡았으며, 법률 및 행정 시스템에서도 그리스적 특성이 강화되며 ‘비잔티움 제국’으로서의 독자적인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 새로운 시대의 서막 : 레오 3세는 군사적 위기에서 제국을 구하고, 강력한 내부 개혁을 통해 제국이 중세적인 형태로 변모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레오 3세는 시대의 혼란 속에서 제국의 운명을 바꾼 위대한 전략가이자 개혁가였다. 그의 지혜와 용기는 로마 역사에 길이 빛나고 있으며, 그는 비잔티움 제국의 미래를 개척한 진정한 선구자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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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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