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스티니아누스 2세(Justinian II, AD.668/669~711) : 동로마 제국 제70대 황제(AD.685~695, 705~711)
- Justinian II [Greek : Ἰουστινιανός / romanized : Ioustinianós / Latin : Iustinianus]
- “the Slit-Nosed” [Greek : ὁ Ῥινότμητος / romanized : ho Rhīnótmētos]
- 출생 : 668년 혹은 669년 / 콘스탄티노플
- 사망 : 771년 11월 4일 / 다마트리스(Damatrys)
- 부친 : 콘스탄티누스 4세(Constantine IV)
- 모친 : 아나스타시아(Anastasia)
- 배우자 : 유도키아(Eudokia), 테오도라(Theodora of Khazaria)
- 자녀 : 아나스타시아(Anastasia), 티베리우스(Tiberi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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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스티니아누스 2세(Justinian II, AD.668/669~711) : 동로마 제국 제70대 황제(AD.685~695, 705~711) |
두 번의 폐위, 두 번의 복위 : 비운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2세의 파란만장한 삶 (685-711)
7세기 후반, 동로마 제국은 지난 세기 이슬람 제국의 확장에 맞서 제국의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고 있었다. 헤라클리우스(Heraclius, 575경–641) 왕조의 마지막 황제이자, 로마 제국 역사상 가장 기이하고 격정적인 삶을 살았던 인물 중 한 명인 유스티니아누스 2세(Justinian II, 668 또는 669–711)의 등장이 바로 이 시기였다. 불과 16세의 나이에 황위에 올라 두 차례나 폐위되고 유배되었지만, 기적적으로 두 번 모두 황제로 복귀했던 그는 강렬한 집착과 잔혹성으로 제국에 잊을 수 없는 족적을 남겼다. 그의 통치기는 황제의 극단적인 성격이 제국의 운명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1. 첫 번째 통치 : 제국의 재건인가, 폭정의 시작인가 (685-695)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668년 또는 669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유능한 콘스탄티누스 4세(Constantine IV, 650경–685)였고, 어머니는 아나스타시아(Anastasia)였다. 그는 아버지 콘스탄티누스 4세가 사망하자 불과 16세의 나이에 단독 황제로 즉위하며 제국의 미래를 짊어지게 되었다. 그는 강력한 의지를 지닌 인물이었으며, 자신의 이름을 위대한 전임자인 유스티니아누스 1세(Justinian I, 482–565)에게서 따올 만큼 ‘로마 제국의 재건’에 대한 강한 열망을 품고 있었다.
1) 초기 정책과 군사적 성공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즉위 초기에 아버지 콘스탄티누스 4세의 유산을 바탕으로 제국을 안정시키는 데 성공했다. 특히 그는 동방의 숙적 우마이야 칼리파국(Umayyad Caliphate)과 평화 조약을 맺고, 사이프러스(Cyprus)와 아르메니아(Armenia), 캅카스 알바니아(Caucasus Albania)의 세금 수입을 분할하기로 합의하며 전쟁으로 지쳐있던 동부 국경에 잠시 평화를 가져왔다. 또한 그는 발칸반도의 슬라브족과 불가르족에 대한 군사 원정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며, 많은 수의 슬라브족을 소아시아의 옵시키온 테마(Thema of Opsikion) 지역으로 이주시켰다.
2) 재정 정책과 불만 증폭
그러나 그의 재위가 길어지면서 유스티니아누스 2세의 강압적이고 무자비한 성격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는 제국의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과도하고 가혹한 세금 정책을 펼쳤다. 특히 농민과 상인들에게 가혹한 세금을 부과했고, 이를 징수하기 위해 스테판(Stephen)과 테오도토스(Theodotos)라는 두 명의 환관을 기용했는데, 이들은 잔인하고 무자비한 방법으로 세금을 징수하며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황제의 이러한 재정 정책은 급격히 그의 인기를 떨어뜨렸고, 대중의 불만을 폭발시키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3) 종교 정책과 교황과의 갈등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종교 문제에서도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692년,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퀴니섹스트 공의회(Quinisext Council)’ 또는 ‘트룰로 공의회(Council in Trullo)’를 소집했다. 이 공의회는 교회 규율과 관련된 중요한 결정을 내렸는데, 이 중 일부는 로마 교황의 권위를 침해하는 것으로 해석되어 로마 교황청의 반발을 샀다. 교황 세르기우스 1세(Pope Sergius I)가 공의회의 결정을 거부하자,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그를 체포하려 했으나, 로마 시민들과 라벤나(Ravenna)의 엑사르흐(exarch)의 반발로 실패하고 말았다. 이러한 사건들은 황제와 교황청 간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4) 군사적 역전과 첫 번째 폐위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아랍 칼리파국과의 평화 조약을 파기하고 다시 전쟁을 시작했다. 그러나 692년, 세바스토폴리스(Sebastopolis) 전투에서 소아시아로 이주시켰던 슬라브 병사들의 대규모 배신으로 인해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다. 이 패배로 제국은 다시 아르메니아를 상실했다.
이러한 군사적 실패와 더불어 가혹한 세금 징수, 그리고 황제의 강압적인 통치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면서, 695년에 레온티우스(Leontius, 695–698)가 이끄는 반란이 일어났다.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폐위되었고, 그의 코가 잘리는 ‘리노코피아(rhinokopia)’라는 잔혹한 처벌을 받은 뒤 크림 반도의 외딴 지역인 케르손(Cherson)으로 유배되었다.
2. 망명과 복수 : 10년간의 유랑 (695-705)
황제에서 평범한 유배자로 전락한 유스티니아누스 2세의 삶은 비참했지만, 그의 황위를 되찾으려는 집념은 꺾이지 않았다. 그의 유배 생활은 10년간 이어졌다.
1) 케르손에서의 탈출 시도와 유랑
케르손에서의 유배 생활은 힘들었다. 그는 그곳에서 계속적인 위협에 시달렸고, 결국 여러 차례의 탈출을 시도했다. 그의 탈출 시도는 그를 흑해를 거쳐 카자르족(Khazars)의 영토로 이끌었다. 카자르족은 동유럽의 강력한 유목 제국이었다.
2) 카자르족과의 동맹과 결혼
카자르 카간(Khagan, 통치자)은 유스티니아누스 2세를 환대하고, 자신의 여동생 테오도라(Theodora)와 결혼시켰다. 이 결혼은 유스티니아누스 2세에게 강력한 동맹군을 얻을 기회를 제공했다. 카자르족 영토에서 그는 아들 티베리우스(Tiberius, 706–711)를 낳았다. 그러나 카자르 카간은 훗날 그를 비잔티움 제국에 넘기려 했고,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카자르족을 벗어나 불가르족(Bulgars)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3) 불가르족과의 동맹과 복수
불가르족의 칸 테르벨(Tervel)은 유스티니아누스 2세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테르벨에게 자신의 딸 아나스타시아(Anastasia)와의 혼인을 약속하고 ‘카이사르(Caesar)’ 칭호와 막대한 재물을 제안하며 동맹을 맺었다. 테르벨은 이 제안을 받아들였고, 705년에 불가르 군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했다.
3. 두 번째 통치 : 잔혹한 복수와 비극적인 종말 (705-711)
불가르 군대의 도움으로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하고, 비밀 통로를 통해 도시로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불과 몇 시간 만에 황위를 되찾았고, 10년간의 유배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나 그의 복귀는 제국에 새로운 피바람을 몰고 왔다.
1) 피의 복수
황위를 되찾은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자신을 폐위시켰던 레온티우스와 티베리우스 3세(Tiberius III, 698–705)를 처형했다. 특히 그는 자신에게 리노코피아를 가했던 당시 재무 장관 테오도토스(Theodotos)를 처형하는 데는 그를 땅에 엎드리게 하고, 그가 지나다닐 때 그의 엉덩이를 밟으며 비웃었고, 바닷물에 수시간 고문하고 산채로 가마에 구워 죽였고, 파트리키오스 스테판을 자루에 묶어 바다에 던져 죽이는 등, 상상하기 어려운 잔혹한 방법으로 복수를 행했다. 그는 자신을 배신하거나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인물들에게 무자비한 고문을 가하고 처형했으며, 심지어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칼리니쿠스 1세(Callinicus I)의 눈을 뽑아 유배 보내는 등 극도의 잔혹성을 보였다. 그의 끔찍한 복수는 제국 전역에 공포를 불러왔고, 이는 그를 더욱 고립시켰다. 그는 금으로 만든 코 보철물을 착용하고 다녔다고 전해진다.
2) 종교 및 외교
잔혹한 복수를 하면서도 그는 종교적인 부분에서 로마 교황청과의 관계를 개선하려 했다. 그는 퀴니섹스트 공의회의 결정을 교황청에 재확인시켰으며, 교황 콘스탄티누스(Pope Constantine)가 직접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하여 공의회의 규범 대부분을 인정하게 했다 . 이는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한 것으로, 제국 동서 간의 긴장 관계를 완화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또한 불가르 칸 테르벨에게 ‘카이사르’라는 칭호를 수여하며 보상했다.
3) 두 번째 폐위와 비참한 종말
유스티니아누스 2세의 잔혹한 통치는 결국 또 다른 반란의 불씨가 되었다. 그의 광적인 복수와 끊이지 않는 의심은 황궁 내에서도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711년, 소아시아의 주둔군이 필리피쿠스(Philippicus, 711–713)를 황제로 추대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시민들은 더 이상 폭군을 지지하지 않았고, 필리피쿠스는 쉽게 도시를 장악했다.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붙잡혔고, 결국 처형당했다. 그의 유일한 아들이자 공동 황제였던 티베리우스도 처형당하면서, 헤라클리우스 왕조는 완전히 단절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로마 역사상 전례 없는 방식으로 두 번 폐위되고 복위했지만, 결국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황제로 기록되었다.
4. 유스티니아누스 2세의 유산과 로마 역사에 미친 영향
유스티니아누스 2세의 치세는 그 어떤 로마 황제의 통치 기간보다 드라마틱하고 폭력적인 사건들로 가득했다.
- 광적인 집착과 잔혹성 : 그의 강박적인 ‘로마 재건’ 열망은 가혹한 재정 정책과 끝없는 복수심으로 이어졌다. 그의 잔혹성은 동로마 제국 역사상 가장 극단적인 폭군 중 한 명으로 기억되게 했다.
- 헤라클리우스 왕조의 종말 : 유스티니아누스 2세의 죽음과 그의 아들의 처형은 로마 제국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던 헤라클리우스 왕조의 종말을 의미했다. 이는 동로마 제국 역사에서 새로운 황조와 통치 체제의 등장을 예고하는 사건이었다.
- 교권과의 관계 : 교황청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려 했던 노력은 종교사적 관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지만, 그의 다른 정책들로 인해 빛을 바랬다.
- 내부 불안정의 심화 : 그의 통치는 제국 내부에 깊은 상처를 남겼고, 황위 계승을 둘러싼 끊임없는 갈등을 심화시켰다. 이는 제국의 약화를 초래하고, 8세기 초의 혼란기로 이어지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자신의 이름처럼 ‘위대한’ 황제가 되기를 염원했지만, 결국 그의 이름 앞에는 ‘광적이고 잔혹한’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게 되었다. 그의 비극적인 삶은 권력의 이면에 숨겨진 인간의 어두운 욕망과 로마 제국의 불안정한 운명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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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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