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온티우스(Leontius, AD.?~705) : 동로마 제국 제71대 황제(AD.695~698)
- Leontius [Greek : Λεόντιος / romanized : Leóntios]
- 출생 : 미상 / 이사우리아(Isauria)
- 사망 : 706년 2월 15일 / 콘스탄티노플
- 부친 : Lazarus (?)
- 자녀 : Tarasius (?)
- 재위 : 695년 ~ 6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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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온티우스(Leontius, AD.?~705) : 동로마 제국 제71대 황제(AD.695~698) |
7세기 동로마의 혼돈 속에 피어난 비운의 황제 : 레온티우스의 파란만장한 치세 (695-698)
7세기 동로마 제국은 격변의 연속이었다. 이슬람 제국의 거대한 팽창에 맞서 제국의 생존을 위해 몸부림쳤으며, 내부적으로는 끊이지 않는 황위 계승을 둘러싼 권력 투쟁으로 불안정의 극치를 달렸다. 헤라클리우스(Heraclius, 575경–641) 왕조의 마지막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2세(Justinian II, 668 또는 669–711)의 폭정 속에서 황제로 등극하여 약 3년간(695–698) 동로마 제국을 통치한 인물이 바로 레온티우스(Leontius, 사망 705)이다. 그의 삶은 병사에서 황제로, 다시 폐위와 죽음에 이르는 드라마틱한 굴곡을 겪으며 당시 동로마 제국의 불안정한 정치적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1. 전사의 탄생 : 미천한 배경에서 고위 장군으로의 성장
레온티우스의 정확한 출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서기 660년경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본명은 불분명하며, 그가 황제에 오르기 전에는 라틴어식 이름인 ‘레온(Leo)’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고 기록되기도 한다. 그는 소아시아의 이사우리아(Isauria) 또는 아나톨리아(Anatolia) 지역 출신으로, 아르메니아계 혈통을 지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이사우리아인들은 로마화되지 않은 야만인으로 취급받았지만, 군사적 능력만큼은 인정받아 많은 인물이 고위 장교로 성장하는 기회를 얻었다. 레온티우스 또한 이러한 배경 속에서 군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평범한 군인의 신분에서 시작하여 뛰어난 군사적 재능과 충성심을 바탕으로 점진적으로 승진했다. 특히 유스티니아누스 2세의 아버지인 콘스탄티누스 4세(Constantine IV, 650경–685)의 치세 동안 그는 ‘마기스테르 밀리툼(Magister Militum, 군 사령관)’이라는 고위 장교의 지위까지 올랐다. 그는 682년 또는 683년경에 동방 테마(thema) 지역에서 이슬람과의 전투를 이끌었으며, 시리아 지역에서 이슬람군을 상대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이러한 군사적 업적은 젊은 레온티우스의 명성을 드높였고, 제국 내에서 그의 입지를 굳건히 하는 데 기여했다.
그의 성공적인 군사 경력은 유스티니아누스 2세의 통치 초기에도 이어졌다. 686년,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레온티우스를 다시 동부 국경으로 파견하여 이슬람군과 싸우게 했다. 레온티우스는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Azerbaijan)까지 진격하며 큰 승리를 거두었고, 이로 인해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우마이야 칼리파국(Umayyad Caliphate)과 유리한 조건으로 평화 협정을 체결할 수 있었다. 그의 활약은 제국에 잠시 동안의 평화와 안정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유스티니아누스 2세의 성격과 통치 방식이 점차 강압적으로 변하면서 레온티우스는 황제의 불신을 받게 된다. 692년,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레온티우스를 파견하여 슬라브족 병사들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이슬람군과 싸우게 했다. 그러나 이 전투(세바스토폴리스 전투)에서 슬라브족 병사들이 대규모로 이슬람군에 투항하면서 로마군은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다. 이 패배에 대한 책임이 레온티우스에게 전가되었고, 그는 즉시 모든 직위에서 해임되어 수년간 투옥되는 신세가 되었다. 이는 유스티니아누스 2세의 독선적이고 변덕스러운 성격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었으며, 레온티우스에게 황제에 대한 깊은 반감을 심어주었다.
2. 권력의 찬탈 : 유스티니아누스 2세를 몰아내다 (695)
수년간의 투옥 생활은 레온티우스에게 억울함과 함께 권력에 대한 야망을 심어주었다. 기회는 695년에 찾아왔다. 유스티니아누스 2세의 통치는 시간이 갈수록 가혹해졌다. 그는 재정 확보를 위해 무자비하고 가혹한 세금 정책을 펼쳤고, 이를 징수하는 과정에서 많은 백성이 고통받았다. 게다가 그의 강압적인 성격과 군사적 실패는 민중과 군부 모두의 불만을 극대화시켰다. 특히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칼리니쿠스 1세(Callinicus I)를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까지 황제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레온티우스가 감옥에서 풀려났다. 당시 동로마 제국에서 레온티우스는 유스티니아누스 2세의 가혹한 통치에 대한 대안으로 떠올랐다. 그는 유능한 군사 지도자로서 명성이 높았고, 과거 황제에게 부당한 처벌을 받았다는 동정심까지 얻고 있었다. 황제의 측근이었던 총대주교 칼리니쿠스 1세와 원로원의 지원을 받은 레온티우스는 695년 여름, 군사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은 급물살을 탔다. 시민들까지 합세한 반란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거리를 장악했고,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군중의 분노에 직면했다. 레온티우스는 손쉽게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2세를 체포하고 폐위시켰다.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그의 코가 잘리는 ‘리노코피아(rhinokopia)’라는 잔혹한 처벌을 받은 후, 크림 반도의 외딴 지역인 케르손(Cherson)으로 유배되었다. 이는 당시 로마 제국 황실에서 황위 계승을 둘러싼 권력 다툼에서 패배한 이에게 가해지던 일반적인 신체 훼손 처벌이었다.
레온티우스는 695년에 동로마 제국의 황제 자리에 올랐다. 이로써 그는 유스티니아누스 왕조를 끝내고, 약 22년간 이어질 ‘20년 무정부 시대(Twenty Years' Anarchy)’의 첫 황제가 되었다.
3. 황제 레온티우스의 치세 : 혼돈 속의 3년 (695-698)
황제의 자리에 오른 레온티우스는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 제국을 안정시키려 노력했다. 그의 치세 3년은 비교적 안정된 모습을 보였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 내치와 재정 : 레온티우스는 즉위 후 전임자 유스티니아누스 2세의 폭정을 답습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그는 가혹한 세금 정책을 완화하고,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는 데 주력했다. 재정적인 압박을 덜기 위해 노력했으나, 제국은 여전히 오랜 전쟁과 내분으로 인한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는 효율적인 행정을 위해 노력했으나, 전반적인 재정 상황이 어려워 큰 개혁을 단행하지는 못했다.
2) 대외 정책 : 레온티우스의 치세 동안 동로마 제국은 서방 영토, 특히 북아프리카에 대한 통제력을 잃기 시작했다. 당시 북아프리카는 이슬람 세력의 강력한 압박을 받고 있었다. 697년 또는 698년, 이슬람군은 제국의 주요 거점이었던 카르타고(Carthage)를 공격했다. 레온티우스는 강력한 로마 해군을 파견하여 카르타고를 방어하려 했으나, 이슬람군의 반격으로 결국 카르타고는 함락되었다. 이로써 로마 제국은 북아프리카의 거의 모든 영토를 이슬람에게 완전히 상실했다. 이는 지중해 서부에서 제국의 영향력이 급격히 감소했음을 의미하며, 레온티우스의 통치 기간 동안 제국이 직면했던 가장 큰 대외적 실패로 기록된다.
3) 권력 기반 : 레온티우스는 황실 혈통이 아닌 군사 쿠데타로 황제가 되었기에, 그의 권력 기반은 비교적 약했다. 그는 충성스러운 군 지휘관들과 원로원의 지지에 의존해야 했으며, 자신의 황위를 안정적으로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당시 로마 제국의 황위는 매우 불안정했으며, 군부의 지지에 따라 언제든 바뀔 수 있는 상황이었다.
4. 두 번째 권력 찬탈 : 티베리우스 3세의 등장 (698)
레온티우스의 치세는 3년 만에 또 다른 군사 쿠데타로 막을 내렸다. 698년, 북아프리카에서 카르타고 방어에 실패하고 돌아오던 로마 해군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황제의 지시로 이끌었으나 카르타고 함락이라는 엄청난 실책에 대한 책임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군사령관 아프시마르(Apsimar)는 자신의 함대에서 반란을 일으켜 레온티우스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아프시마르는 ‘티베리우스 3세(Tiberius III, 698–705)’라는 새로운 황제명을 사용했다. 반란을 일으킨 해군은 손쉽게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장악했다. 레온티우스는 이사우리아 출신인 아나스타시우스 2세(Anastasius II, 713-715)와 유스티니아누스 2세의 폭정에 대한 불만으로 즉위했지만, 결국 그는 자신과 같은 방식으로 몰락한 셈이 되었다.
티베리우스 3세는 레온티우스를 체포한 후 다시 한번 잔혹한 처벌을 내렸다. 레온티우스는 역시 코가 잘리는 리노코피아 형벌을 받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다마이투스 수도원(Damaitos monastery)에 유폐되었다. 한때 제국의 운명을 쥐었던 전사는 다시 한번 비참한 유배 생활을 시작해야 했다.
5. 유스티니아누스 2세의 복수와 비극적인 최후 (705)
레온티우스의 마지막은 전임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2세의 극적인 복귀와 함께 찾아왔다. 705년, 10년간의 유배 생활을 마치고 불가르족의 지원을 받은 유스티니아누스 2세가 황위를 되찾기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왔다.
황제에 복위한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자신을 폐위시키고 코를 잘랐던 레온티우스와, 이후 레온티우스를 폐위시킨 티베리우스 3세에 대한 무자비한 복수를 시작했다. 그는 이 두 전임 황제를 붙잡아 공개적인 조리돌림을 한 후 처형했다. 705년 2월 15일, 레온티우스와 티베리우스 3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히포드롬에서 공개적으로 처형되었고, 그들의 시신은 바다에 던져졌다. 이로써 레온티우스의 파란만장했던 삶은 완전히 막을 내렸다.
6. 레온티우스의 유산 : 20년 무정부 시대의 서막
레온티우스의 치세는 로마 제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형성한다. 그의 통치는 ‘20년 무정부 시대(Twenty Years' Anarchy)’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 정치적 불안정성의 극대화 : 그는 약 3년간의 짧은 재위 기간 동안 황위가 얼마나 불안정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그의 등극은 군사 쿠데타를 통한 황위 찬탈의 전례를 다시 세웠고, 이는 이후 제국의 정치적 불안정성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 영토 상실 : 그의 치세 동안 북아프리카, 특히 제국의 중요한 거점이었던 카르타고의 상실은 로마 제국의 해상 권력과 지중해 서부에 대한 영향력이 급격히 감소했음을 의미한다.
- 잔혹한 처벌의 반복 : 레온티우스 자신이 유스티니아누스 2세에게 코를 잘라 유배 보냈고, 자신 또한 코가 잘려 유배되었다가 결국 유스티니아누스 2세에게 처형당하는 비극적인 순환은 7세기 동로마 황실의 잔혹한 권력 투쟁을 여실히 보여준다.
레온티우스는 제국을 구원할 영웅이 되려 했으나, 결국 혼란의 시대가 만들어낸 또 다른 희생양이 되었다. 그의 통치는 동로마 제국이 8세기 초 더 큰 위기에 봉착하기 전의 과도기적 불안정성을 상징하는 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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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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