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16일 토요일

테오도시우스 3세(Theodosius III, AD.?~717/754) : 동로마 제국 제75대 황제(AD.715~717)

테오도시우스 3(Theodosius III, AD.?~717/754) : 동로마 제국 제75대 황제(AD.715~717)

 
  • Theodosius III [Greek : Θεοδόσιος / romanized : Theodósios]
  • 출생 : 미상
  • 사망 : 717/ 754724
  • 부친 : 티베리우스 3(Tiberius III)?
  • 재위 : 7155월경 ~ 717325
 
테오도시우스 3세(Theodosius III, AD.?~717/754) : 동로마 제국 제75대 황제(AD.715~717)
테오도시우스 3세(Theodosius III, AD.?~717/754) : 동로마 제국 제75대 황제(AD.715~717)

8세기 로마의 혼돈 속 짧은 통치 : 비운의 황제 테오도시우스 3세의 삶과 죽음 (715-717)

 
8세기 초, 동로마 제국은 ‘20년 무정부 시대(Twenty Years' Anarchy)’라 불리는 극심한 혼란과 정치적 불안정의 시기를 겪고 있었다. 695년부터 717년까지, 짧은 기간 동안 황제가 빈번하게 교체되며 제국은 파벌 싸움과 군사 반란으로 휘청거렸다. 이러한 격동의 시기에 제국의 황제 자리에 올라 불과 2년 남짓(715717) 동로마 제국을 통치한 인물이 바로 테오도시우스 3(Theodosius III, 사망 717, 754년 사망설 존재)이다. 그는 원치 않는 황제의 자리에 앉아 혼란 속에서 제국을 지키려 노력했지만, 결국 새로운 세력의 부상 속에 쓸쓸히 퇴위해야 했던 비운의 황제였다.
 

1. 평범한 관리의 등장 : 황실과 거리가 멀었던 테오도시우스의 배경

 
테오도시우스 3세의 정확한 출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황족이나 명문 귀족 출신이 아니었다. 황제가 되기 전 그는 아드라미티움(Adramyttium)이라는 소아시아 서남부 도시의 세금 징수원이었다. , 로마 제국의 평범한 행정 관리였던 셈이다. 9세기 비잔티움 역사가 테오파네스(Theophanes the Confessor)는 테오도시우스를 비정치적이고 평범한 시민이라고 묘사하며, 그가 황제가 되는 것을 매우 꺼려했다고 기록한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주크닌 연대기(Zuqnin Chronicle)는 그가 테오도시우스 콘스탄티누스(Theodosius Constantinus)’라는 본명을 가졌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비잔티움학자 그레이엄 섬너(Graham Sumner)는 테오도시우스가 티베리우스 3(Tiberius III)의 아들 테오도시우스와 동일 인물일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했다. 티베리우스 3세의 아들은 729년경 에페소의 주교가 되었고 754년 사망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다른 역사가들은 테오도시우스 3세가 퇴위 후 30년 이상 살았을 가능성이 낮다는 이유로 이 주장에 회의적이다. 이러한 논의들은 그가 황제가 되기 전까지 매우 평범하고 알려지지 않은 삶을 살았음을 시사한다.
 

2. 원치 않는 황위 : 군부의 강제적 옹립 (715)

 
테오도시우스 3세가 황제가 된 과정은 당시 로마 제국의 극심한 혼란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당시 동로마 제국의 황제는 아나스타시우스 2(Anastasius II, 713715)였다. 그는 유능한 관리이자 방어 전략가였으나, 그의 치세 동안 제국은 이슬람 우마이야 칼리파국(Umayyad Caliphate)의 대규모 침략 위협에 직면하고 있었다. 아나스타시우스 2세는 이슬람군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Constantinople)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로도스(Rhodes) 섬에 대규모 해군을 집결시켰다.
 
이때 옵시키온 테마(Opsician Theme) 소속의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아나스타시우스 2세의 강압적인 훈련 방식과 훈령, 그리고 713년 필리피쿠스(Philippicus, 711713) 황제를 폐위시키는 과정에서 그들이 겪었던 고충에 대한 불만을 품고 있었다. 반란군은 자신들을 제압하러 온 지휘관 요한(John)을 살해하고, 황제가 될 의사가 전혀 없었던 세금 징수원 테오도시우스를 강제로 황제 자리에 앉혔다. 테오파네스에 따르면 테오도시우스는 군사들의 요구를 거부하며 언덕으로 도망쳐 숨었으나, 결국 발견되어 황제로 추대되었다고 한다.
 
황제로 추대된 테오도시우스 3세는 반란군을 이끌고 아드라미티움에서 시작하여 비티니아(Bithynia)를 거쳐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했다. 아나스타시우스 2세는 니카이아(Nicaea)로 도피했지만, 테오도시우스 3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약 6개월간 포위한 끝에 수도 내 지지자들의 도움으로 도시를 함락시켰다. 71511, 콘스탄티노폴리스는 테오도시우스 3세의 손에 넘어왔고, 아나스타시우스 2세는 투항하여 수도사로서 유배 생활을 시작했다. 이로써 테오도시우스 3세는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3. 꼭두각시 황제의 짧은 치세 : 혼란 속의 2(715-717)

 
테오도시우스 3세는 황제가 되었지만, 그의 통치 기반은 매우 취약했다. 그는 황위를 원치 않았던 인물이었고, 그의 지지 기반은 주로 자신을 옹립한 옵시키온 테마의 군대에 국한되었다. 다른 중요한 테마들, 특히 아나톨리아(Anatolia)와 아르메니아(Armenia)를 관할하던 강력한 테마들은 테오도시우스 3세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테오도시우스를 옵시키온 군대의 꼭두각시 황제로 간주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제국은 끊임없이 외부의 위협에 시달렸다. 특히 우마이야 칼리파국(Umayyad Caliphate)의 술라이만 이븐 압둘 말리크(Sulayman ibn Abd al-Malik)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최종적으로 함락시키기 위한 대규모 병력과 해군을 준비하고 있었다.
 

1) 레오 3세의 부상과 위협

 
테오도시우스 3세의 가장 큰 위협은 유능한 군사 지도자이자 아나톨리콘 테마(Anatolicon Theme)의 스트라테고스(strategos, 총독)였던 레오(Leo)였다. 레오는 테오도시우스 3세의 무능함을 비난하며 스스로 황제를 자처했고, 우마이야 칼리파국과 동맹을 맺어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려 했다. 레오는 황제의 정통성이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하며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했다. 그는 니코메디아(Nicomedia)를 점령하고, 그곳에서 테오도시우스 3세의 아들을 포함한 많은 관료들을 체포하며 위협했다.
 

2) 불가르족과의 동맹

 
레오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테오도시우스 3세는 필사적으로 외부 지원을 모색했다. 그는 불가르 칸 테르벨(Tervel, 700721)과 동맹을 맺었다. 이 동맹의 대가로 테오도시우스 3세는 불가르족에게 자고레(Zagore) 지역을 할양하고, 매년 공물을 지급하며, 로마인 포로를 돌려주고, 불가르 상인들에게 무역 특혜를 주는 굴욕적인 조건을 수락해야 했다. 이처럼 제국은 존망의 위기 속에서 불안정한 외교적 타협을 해야만 했다.
 

4. 자발적인 퇴위와 수도원 생활 : 비극적인 종말을 피하다 (717)

 
레오 3세의 군사적 압박과 그의 아들 체포는 테오도시우스 3세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백성들의 불만을 샀던 전임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2세나 필리피쿠스처럼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테오도시우스 3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게르마누스 1(Germanus I)와 비잔티움 원로원의 조언을 받아들여 평화로운 방법으로 황위에서 물러나기로 결정했다.
 
717325, 테오도시우스 3세는 레오 3세에게 황위를 양위하고 퇴위했다. 그는 자신과 아들의 안전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수도사의 삶을 택했다. 이후 테오도시우스 3세는 에페소(Ephesus)에 위치한 수도원에 유폐되어 여생을 보냈다. 그의 사망 연도는 확실하지 않으나, 717년 이후인 754724일에 사망했다는 기록도 있다. 일부 학자들은 에페소의 대주교가 된 인물과 테오도시우스 3세의 아들이 동일 인물일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로써 테오도시우스 3세의 짧고 혼란스러웠던 치세는 막을 내렸다. 그는 ‘20년 무정부 시대의 마지막 황제였으며, 그의 퇴위와 레오 3세의 즉위는 이 혼란기를 끝내고 새로운 이사우리아 왕조(Isaurian Dynasty)’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5. 테오도시우스 3세의 유산과 8세기 로마의 단면

 
테오도시우스 3세는 로마 제국의 역사에서 비교적 존재감이 미미한 황제 중 한 명이지만, 그의 삶과 치세는 8세기 초 로마 제국의 극심한 혼란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면을 제공한다.
 
  • ‘20년 무정부 시대의 마지막 : 그는 군사 쿠데타에 의해 황위에 오르고 다시 군사 쿠데타에 의해 퇴위한 이 시기의 전형적인 황제였다. 그의 재위 기간은 황제권의 약화와 군부의 막강한 영향력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 원치 않은 권력의 상징 : 황제가 되기를 원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강제로 황위에 앉혀지고, 불안정한 통치를 이어가다 평화롭게 퇴위하는 그의 운명은 권력의 잔혹성과 함께 당시 황제 자리가 얼마나 위태로웠는지를 보여준다.
  • 외세 의존의 한계 : 불가르족과의 굴욕적인 동맹은 제국의 약화된 국력과 외세의 개입이 일상화된 현실을 반영한다.
  • 이사우리아 왕조의 서막 : 그의 퇴위는 제국을 구원하고 안정시킬 레오 3세의 등장을 위한 길을 열어주었으며, 이로써 제국은 혼란의 시대에서 벗어나 새로운 황조의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테오도시우스 3세는 로마 제국의 가장 어둡고 혼란스러운 시기에 등장하여 제국의 운명을 바꿀 만한 힘은 없었지만, 혼란의 한복판에서 생존을 위해 발버둥치던 제국의 모습을 대표하는 인물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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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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