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을 뒤흔든 ‘다섯 황제의 해’(AD.193)로 시작된 내전(AD.193~197)
1. 오현제 시대의 종말과 ‘다섯 황제의 해’
서기 193년, 로마 제국은 다시 한번 거대한 혼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이 해는 불과 1년 동안 무려 다섯 명의 인물이 차례로 황제의 자리를 주장하며 제국 전체가 피비린내 나는 내전으로 얼룩졌던 해로, 흔히 ‘다섯 황제의 해’(Year of the Five Emperors)로 불린다. 이는 로마 역사에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몰락을 알린 ‘네 명의 황제의 해’(Year of the Four Emperors, 69년)에 버금가는, 혹은 그 이상의 극심한 권력 투쟁의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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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193년의 다섯 로마 황제를 그린 아우레우스 금화. 시계 방향으로 왼쪽 위부터: 페르티낙스, 디디우스 율리아누스, 페스켄니우스 니게르, 클로디우스 알비누스, 중앙에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였던 콤모두스(Commodus, 161~192년)의 폭정과 암살 이후, 로마는 황제의 공백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콤모두스의 암살은 100년 가까이 이어진 ‘오현제 시대’의 안정과 평화를 끝내고, 제국 전역의 군대와 유력자들이 황제 자리를 노리는 무질서한 시대를 예고하는 서곡이었다.
‘다섯 황제의 해’는 이후 197년까지 내전으로 이어졌고, 이 기간 동안 5명의 사람이 자신들이 로마 제국의 황제라 주장하였는데(페르티낙스, 디디우스 율리아누스, 페르켄니우스 니게르, 클로디우스 알비누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최종 승자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되었다.
2. 콤모두스의 죽음과 페르티낙스(Pertinax, 126~193년)의 짧은 통치
서기 192년 12월 31일,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 콤모두스는 자신의 정부와 근위대 사령관에 의해 암살당한다. 그의 죽음은 평화와 번영의 ‘팍스 로마나’ 시대를 완전히 종결시켰다. 콤모두스의 암살 이후, 프라이토리아니(황제 근위대)는 곧바로 로마의 명망 있는 원로원 의원이자 유능한 군사령관이었던 페르티낙스를 새로운 황제로 추대했다. 페르티낙스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나 안토니누스 가문과는 혈연적 관계가 전혀 없는 인물로, 일반 시민 출신에서 자수성가하여 높은 관직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페르티낙스는 제위에 오른 후, 콤모두스 시대의 방탕한 재정을 수습하고 부패를 일소하려 했다. 그는 사치스러운 황실 경비를 절감하고, 재산을 탕진한 이들을 국고에 귀속시키는 등 강력한 개혁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은 프라이토리아니와 일부 원로원 귀족들의 반발을 샀다. 특히, 근위대원들은 콤모두스 시대의 무분별한 보너스와 특권에 익숙해져 있었기에, 페르티낙스의 엄격한 정책에 큰 불만을 품었다.
결국, 페르티낙스가 황제가 된 지 불과 3개월 만인 193년 3월 28일, 프라이토리아니의 일부가 반란을 일으켜 황궁으로 난입했다. 페르티낙스는 직접 이들을 설득하려 했으나, 끝내 근위대원들의 칼에 맞아 살해당했다. 이 비극적인 사건은 로마의 혼란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3. 디디우스 율리아누스(Didius Julianus, 133/137–193년)의 황제 매수와 비극
페르티낙스 암살 직후, 프라이토리아니는 전대미문의 행동을 감행했다. 그들은 황제 자리를 경매에 부친 것이다. 로마의 부유한 원로원 의원이었던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는 자신의 재산을 아낌없이 쏟아부어 가장 높은 값을 불렀고, 결국 프라이토리아니로부터 황제 자리를 “구매”했다. 이 사건은 로마 제국의 권위와 존엄성을 땅에 떨어뜨린 치욕스러운 역사로 기록된다.
그러나 황제의 자리는 돈으로 살 수 있었지만, 시민들의 존경과 군대의 충성심은 구매할 수 없었다.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의 황제 등극 소식은 로마 시민들에게 큰 충격과 분노를 안겼고, 제국 전역의 군단들에게도 심각한 모욕으로 받아들여졌다. 특히 브리타니아와 갈리아에 주둔한 군단, 시리아 주둔군, 그리고 판노니아 주둔군이 강하게 반발하며 자신들이 지지하는 장군들을 새로운 황제로 추대하기 시작했다.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의 통치는 짧고 불확실했다. 결국, 그의 등극을 용납할 수 없었던 군단들이 로마로 진격해 오자, 로마 원로원은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를 퇴위시키고 처형하기에 이른다. 그는 불과 66일 만에 황제 자리에서 내려와 참수당했다.
4. 군단을 등에 업고 등장한 페스켄니우스 니게르, 클로디우스 알비누스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의 매수 행위는 제국 전역에 잠재되어 있던 불만과 야망을 터뜨리는 도화선이 되었다. 로마 각지의 유능한 군사령관들은 이제 자신들의 군단을 등에 업고 황제 자리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들 중 가장 먼저 두각을 나타낸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페스켄니우스 니게르(Pescennius Niger, 135경–194년) : 시리아 속주의 총독이었던 니게르는 제국 동방의 막강한 병력을 통솔하고 있었으며, 그의 지지자들에 의해 안티오키아(Antioch)에서 황제로 선포되었다. 그는 제국 동부 지역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클로디우스 알비누스(Clodius Albinus, 150경–197년) : 브리타니아와 갈리아 지역을 총괄하던 알비누스 역시 자신의 군단을 이끌고 황제를 자처했다. 그는 제국 서부, 특히 갈리아와 히스파니아에서 상당한 지지 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두 명의 강력한 군사령관이 각기 황제를 자처하면서 로마는 내전의 불가피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5. 셉티미우스 세베루스(Septimius Severus, 145–211년)의 부상과 전략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가장 강력한 경쟁자로 떠오른 인물은 상 판노니아(Upper Pannonia)의 총독이었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였다. 그는 단일 황제 후보로서는 가장 큰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지리적으로도 로마에 가장 가까이 주둔하고 있었다. 그의 병력은 도나우강을 따라 배치된 16개 군단 중 3개 군단에 달하는 압도적인 규모였다.
세베루스는 군사적, 정치적 수완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그는 로마로 진격하는 동시에 원로원의 지지를 확보하려 노력했으며,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의 통치를 비판하고 페르티낙스의 암살에 대한 복수를 주장하여 대중의 지지를 얻었다. 그는 로마에 도착하여 디디우스 율리아누스를 처형한 후 원로원으로부터 합법적인 황제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세베루스 앞에는 여전히 니게르와 알비누스라는 두 명의 강력한 경쟁자가 남아 있었다. 세베루스는 현명하게도 두 전선에서 동시에 싸우는 것을 피하기 위해 전략적인 선택을 했다. 그는 우선 알비누스와 동맹을 맺었다. 세베루스는 알비누스를 자신의 카이사르(Caesar)이자 후계자로 인정하고 콘술(Consul) 자리를 제안하여, 그가 동방의 니게르와 싸우는 동안 서방에서 위협이 되지 않도록 유화책을 썼다.
6. 내전의 종결 : 세베루스의 승리와 세베루스 왕조의 개창
알비누스와의 임시적인 동맹을 맺은 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자신의 모든 군사력을 집중하여 페스켄니우스 니게르와의 전쟁에 돌입했다. 동방에서 니게르와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특히 이수스 전투(Battle of Issus)와 키지쿠스 전투(Battle of Cyzicus) 등에서 세베루스는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결국 194년, 니게르는 안티오키아에서 최종적으로 패배하고 도주하던 중 살해당하면서 제국 동부 지역은 세베루스의 통치하에 놓이게 되었다.
니게르를 제거한 세베루스는 이제 유일한 남은 경쟁자인 클로디우스 알비누스에게 눈을 돌렸다. 당초의 동맹은 파기되고, 두 황제 후보 간의 전면전이 불가피해졌다. 서기 197년 2월, 갈리아의 루그두눔(Lugdunum, 현재의 리옹) 근교에서 세베루스와 알비누스 사이에 로마 역사상 가장 거대한 규모의 내전 중 하나인 루그두눔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는 양측 모두에게 엄청난 피해를 입혔으며, 치열한 접전 끝에 세베루스의 군대가 최종적으로 승리했다.
알비누스는 전투에서 패배한 후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혹은 세베루스에게 잡혀 처형당했다고 전해진다. 이로써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제국 내 모든 경쟁자들을 제거하고 로마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다. 그는 니게르와 알비누스의 모든 지지자들을 숙청하며 자신의 권력을 확고히 다졌다.
7. ‘다섯 황제의 해’가 남긴 유산
193년 ‘다섯 황제의 해’는 로마 제국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이 시기의 극심한 혼란과 내전은 로마 군사력이 황제 계승에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는지를 명확히 보여주었다. 더 이상 혈통이나 원로원의 명예만으로는 황제 자리를 유지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세베루스의 승리는 새로운 왕조인 세베루스 왕조(Severan dynasty)의 시작을 알렸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통치했으며, 군인들에 대한 처우를 개선하고 군사적 역량을 강화하는 데 집중했다. 그의 통치는 로마 제국이 점차 ‘군인 황제 시대’(Barracks Emperors)로 진입하는 초석을 놓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결론적으로 ‘다섯 황제의 해’는 로마 제국의 통치 구조와 권력의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 시기였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은 황제의 자리가 강력한 군사적 지지와 끊임없는 투쟁을 통해서만 유지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비극적인 형태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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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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