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리아누스(Valerian, AD.c.199~260/264) : 로마 제국 제33대 황제(AD.253~260)
발레리아누스(Valerian), 사상 최초로 포로가 된 로마 황제의 부상과 추락
발레리아누스는 253년부터 260년 봄까지 로마 제국을 통치한 황제이며, 즉위와 동시에 아들 갈리에누스(Gallienus)를 공동 황제로 세워 불안정한 정국을 분담 통치로 관리한 인물이다.
그는 에데사 전투에서 사산 왕조의 샤푸르 1세에게 생포된 로마 최초의 황제로 기억되며, 이 전례 없는 사건은 제국 전역에 충격과 불안정을 야기하고 ‘로마 제국을 새롭게 서사화’하는 다양한 반향을 불러왔다고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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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리아누스(Valerian, AD.c.199~260/264) : 로마 제국 제33대 황제(AD.253~260) |
원로원 귀족 출신의 배경과 초기 경력
발레리아누스는 제3세기 위기기에 황위를 노렸던 다수의 변방 장교ㆍ찬탈자들과 달리 전통적 원로원 가문 출신이었다는 점에서 출발선이 달랐다. 그의 초기 생애 기록은 빈약하지만, 에그나티아 마리니아나(Egnatia Mariniana)와의 혼인, 그리고 두 아들 갈리에누스와 리키니우스 발레리아누스의 존재가 전한다이다.
그는 238년에 보결 혹은 정식 집정관으로 언급되며, 같은 해 원로원 서열 1위인 프린케프스 세나투스(princeps senatus)에 올라 고르디아누스 1세의 황제 추대 문제를 중재하는 창구 역할을 맡았다.
251년에 데키우스(Decius)가 사실상 황제 권한에 필적하는 ‘검열관’ 직위를 부활시키자 원로원은 발레리아누스를 검열관으로 선출했으나 그는 이를 사양하였고, 데키우스가 일리리쿰 원정으로 떠날 때 로마 행정을 맡길 만큼 신뢰를 받았다.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 치세에는 게르만 접경 주둔군으로 편성된 전력을 지휘하는 두크스(dux)로 임명되어, 동방에서의 대(對)사산 왕조 전쟁을 염두에 둔 동원 체계의 핵심에 섰다.
253년 즉위와 공동 통치의 설계
에밀리아누스가 단기간 집권 후 붕괴하자 발레리아누스가 253년에 제위에 올랐고, 즉시 갈리에누스를 공동 황제로 올려 ‘중앙–변방’의 이중 권력 구조를 제도화하였다. 공동 통치는 제3세기 위기기의 불안정한 전선을 다루기 위한 현실적 해법으로, 아버지는 동방과 제국 전반의 체계 정비를, 아들은 서방 방면의 방위를 맡는 방식으로 역할이 분화되었다.
제3세기 위기의 소용돌이 속 통치 환경
발레리아누스가 권좌에 올랐을 때 제국은 외침과 내란, 역병과 재정 압박이 중층적으로 겹친 위기 국면에 있었다. 그는 공동 통치, 군단 재배치, 외교와 무력의 병행을 통해 균열을 봉합하려 하였으나, 동방에서 사산 왕조의 공세가 가파르게 치솟으면서 정세 주도권을 되찾기 어려웠다.
에데사 전투와 ‘황제 생포’라는 미증유의 사건
260년 에데사 전투에서 발레리아누스는 샤푸르 1세에게 포로가 되었다. 이는 로마 정치문화에 전례가 없는 사건으로, 황제의 신체 불가침이라는 상징 질서를 파괴하며 전역에 충격을 주었다. 당시와 이후의 전승은 그의 수모에 대해 다양한 소문과 이야기를 만들어 냈고, 이 사건은 지역과 계층에 따라 상이한 ‘새 서사’를 촉발하며 로마의 위치와 위신을 재해석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그의 생포는 군지휘 구조와 외교 지형을 흔들었고, 로마 여론과 주변 세계의 시선에서 제국 권위에 장기적인 그늘을 드리웠다.
포로 이후의 말년과 사망 전후 정황
발레리아누스의 사망은 260년 이후 사산 왕국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인 비샤푸르 또는 곤디샤푸르로 전하며, 정확한 장소와 정황은 단정되지 않는다. 그의 생포 이후 제국은 공동 황제 갈리에누스 단독 통치 체제로 재편되었고, 동서 방면에서 분권적 대응이 강화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가족과 황실 인맥, 명칭과 호칭의 체계
발레리아누스의 배우자로는 마리니아나가 확실히 확인되며, 코르넬리아 갈로니아라는 명칭도 전승된다. 자녀로는 공동 황제이자 후계자인 갈리에누스와, 갈리에누스의 형제로 기록되는 리키니우스 발레리아누스가 거론된다. 그의 라틴식 정식 호칭은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발레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로 정리되며, 말년 누적 칭호는 독실함ㆍ천우ㆍ무패ㆍ게르만 정복자ㆍ대사제ㆍ7회 호민관 권한ㆍ4회 집정관ㆍ국부 등 다수의 전례적 영예를 포함하였다.
로마 정치와 군사에 미친 구조적 파장
황제의 생포는 제국 권위의 상징 질서에 금을 내었고, 외교ㆍ군사ㆍ의전 전반에서 ‘대체 서사’의 필요를 낳았다. 공동 황제 체제의 강화, 변방 방위선의 지역화, 황제 이미지 재구성 같은 대응은 이후 갈리에누스 시기에 더 체계적으로 추진되었다. 발레리아누스의 실패는 한 개인의 과오를 넘어, 제3세기 위기의 장기 구조 속에서 중앙집권적 통치 모델이 겪은 한계를 드러낸 사건이었다.
사료와 전승, 무엇을 믿고 어떻게 읽을 것인가
발레리아누스를 다루는 기본 사료는 아우렐리우스 빅토르, 에우트로피우스,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 조나라스, 조시무스 등의 텍스트이며, 현대 연구는 동방 문헌과 주화ㆍ비문 증거를 교차하여 복원도를 높여 왔다. 생애 초반ㆍ말년 정황ㆍ굴욕담의 세부는 전승마다 편차가 커서, 1차 사료의 성격과 제작 맥락을 감안한 비판적 독해가 필수적이다.
표준 서지ㆍ도판 자료는 그의 흉상, 주화 범례, 「브리타니카」 1911년판의 항목 등 공영 저작물을 포함해 연구 토대를 제공한다.
간단 연표
- 약 199년경 : 출생.
- 238년 : 보결 또는 정식 집정관으로 언급되며 프린케프스 세나투스로 활동하다.
- 251년 : 원로원이 선출한 검열관직을 사양하고, 데키우스의 부재 중 로마 행정을 맡다.
- 253년 : 즉위하여 갈리에누스를 공동 황제로 세우다.
- 260년 봄 : 에데사 전투에서 샤푸르 1세에게 생포되다.
- 260년 이후 : 비샤푸르 또는 곤디샤푸르에서 사망하다.
맺음말
발레리아누스의 통치는 제국의 균열을 공동 통치와 전통 의전으로 봉합하려는 시도였으나, 동방에서의 전략 실패와 미증유의 포로 사건으로 종결되었다. 그의 이름은 패배의 상징으로 회자되었지만, 동시에 로마가 위기기에 합법성ㆍ무력ㆍ이미지를 어떤 비율로 섞어 생존을 모색했는지 보여주는 사례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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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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