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12일 화요일

디디우스 율리아누스(Didius Julianus, AD.133~193) : 로마 제국 제19대 황제(AD.193)

디디우스 율리아누스(Didius Julianus, AD.133~193) : 로마 제국 제19대 황제(AD.193)

 
디디우스 율리아누스(Didius Julianus, 133~193)다섯 황제의 해로 불린 193년에 단 66일 동안 로마 제국의 황좌를 차지했던 인물이다. 그는 근위대의 지지를 돈으로 확보해 즉위했으나 민심과 원로원의 신뢰를 얻지 못했고, 결국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진군 속에서 배신과 고립을 겪은 뒤 살해되었다. 짧은 치세에도 불구하고 화폐 평가절하와 대중적 비호감, 각지 장군들의 봉기라는 모순이 집중적으로 폭발한 사례로 기록된다.

디디우스 율리아누스(Didius Julianus, AD.133~193) : 로마 제국 제19대 황제(AD.193)

 

출생 배경과 조기 승진의 경로

 
율리아누스는 메디오라눔(오늘날의 밀라노) 명가 출신의 아버지와 북아프리카계 로마 상류 가문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모친 도미티아 칼빌라의 보호 아래 성장했고, 젊은 나이에 관직 입문의 첫 관문인 비긴티비라테에 임명되는 등 빠른 관료 경로를 밟았다. 그는 만리아 스칸틸라와 혼인했으며, 딸 디디아 클라라를 두었다. 이러한 조기 후견과 네트워크는 중앙 정치로의 진입을 유리하게 만들었다.
 

속주 통치와 영예직, 그리고 좌절

 
율리아누스는 달마티아와 게르마니아 하부 등 여러 속주를 다스렸고, 침입해온 게르만 부족 카우키와 하티를 격퇴하는 전공을 세웠다. 175년에는 페르티낙스와 함께 집정관에 오를 정도로 촉망받았으나, 이후 코모두스 정권 아래에서 좌천되어 한동안 경력의 정체를 겪었다. 이는 군사·행정 역량은 충분했으나 군주와 권력 핵심의 신임에서는 일시적으로 멀어졌음을 뜻한다.
 

페르티낙스 사후의 권력 공백과 다섯 황제의 해

 
콤모두스가 몰락한 뒤 즉위한 페르티낙스는 근위대의 난입으로 살해되었고, 193년의 정국은 극심한 혼란으로 빠져들었다. 이 해는 다섯 황제의 해로 불리며, 페르티낙스와 율리아누스, 페스케니우스 니게르, 클로디우스 알비누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짧은 기간에 차례로 혹은 병립하여 제위를 다투었다. 율리아누스는 로마의 근위대가 벌인 사실상의 황위 경매에서 자리를 사들여 즉위했으나, 그 출발 자체가 정통성 논란을 안고 있었다.
 

즉위와 동시에 부딪친 민심의 장벽

 
율리아누스는 즉위 직후 화폐 개혁에서 페르티낙스의 조치를 되돌려 데나리우스의 은 함량을 87%에서 75%로 낮추었다. 물가와 신뢰에 민감한 통화 조치가 거꾸로 돌아가자 민심은 냉각되었고, 그는 공공연히 강도이자 패륜아라는 야유를 들을 정도로 대중적 비호감을 샀다. 한때는 카피톨리눔으로 가는 길을 군중이 돌을 던져 가로막을 정도였고, 이는 즉위 방식에 대한 분노와 경제적 불신이 결합한 표출이었다.
 

삼중 도전의 개막

 
로마의 혼란 소식이 제국 전역으로 퍼지자, 시리아의 페스케니우스 니게르, 판노니아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브리튼의 클로디우스 알비누스가 차례로 반기를 들었다. 세 장수는 각기 3개 정도의 군단을 동원할 수 있는 유력자였고, 모두 스스로 황제를 칭하며 율리아누스의 권위를 부정하였다. 율리아누스는 수도에 가장 근접한 세베루스를 공적(公敵)으로 선포하고 회유 사절을 보내거나 대체 지휘관을 임명하며 대응했으나, 군심은 돌아서지 않았다.
 

정치적 고립과 최후

 
세베루스가 로마로 진군하자 율리아누스는 원로원과 근위대마저 믿을 수 없는 처지에 놓였다. 그는 상징적 조치와 사절 교체로 시간을 벌려 했지만, 원로원과 근위대의 지지는 급속히 이탈하였다. 결국 그는 궁정에서 병사에게 살해되었고, 원로원과 근위대는 세베루스에게로 기울었다. 율리아누스가 돈으로 산 권력은 돈으로 지킬 수 없었고, 정통성과 무력이 결합한 세력 앞에서 의지할 기반은 남지 않았다.
 

화폐와 통치 신뢰의 균열

 
페르티낙스가 늘려 놓은 은 함량을 되돌린 조치는 국고와 군 급료 문제를 단기적으로 수습하려는 의도였으나, 시장과 군심이 결코 수학처럼 움직이지 않음을 드러냈다. 즉위 방식의 오명과 결합된 평가절하는 불량화폐론처럼 정치적 신뢰를 경제적 신호가 갉아먹는 경로를 보여주었다. 수도 군중의 조롱과 투석은 로마 시민이 황권의 상징 자본을 얼마나 날카롭게 심판하는지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다섯 황제의 해속의 좌표

 
193년은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가 막을 내리고 세베루스 왕조로 이동하는 환승의 해였다. 페르티낙스의 단명, 율리아누스의 즉위와 몰락, 니게르와 알비누스의 도전, 그리고 세베루스의 집권으로 이어지는 연쇄는 제국의 합법성과 무력의 연결 구조가 재편되는 과정을 압축한다. 율리아누스는 그 한가운데에서 정통성 없는 권력이 얼마나 빠르게 붕괴하는지를 상징하는 인물로 남았다.
 

인물 관계와 즉위ㆍ가계의 개요

 
율리아누스는 133129일에 태어나 19362일 로마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재위는 193328일부터 62일까지였고, 전임자는 페르티낙스, 후임자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였다. 배우자는 만리아 스칸틸라였고, 슬하에 딸 디디아 클라라가 있었다. 명목상 그는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디디우스 세베루스 율리아누스 아우구스투스라는 군주명을 사용하였다.
 

페르티낙스와의 대조, 그리고 비교의 교훈

 
페르티낙스는 검약과 공공선 지향으로 기억되지만, 근위대의 기득권에 맞서다 목숨을 잃었다. 율리아누스는 근위대의 선택을 돈으로 산 대가로 민심과 원로원의 외면을 자초했다. 두 사람의 연속된 몰락은 제국 정치를 떠받치는 세 축, 즉 군대, 원로원, 도시민의 동학을 정확히 읽지 못할 때 어떤 파국이 오는지를 보여준다.
 

세베루스의 부상과 체제 전환

 
세베루스는 판노니아 군단을 이끌고 로마로 진군하여 율리아누스를 대체했고, 이후 니게르와 알비누스를 차례로 제압하며 세베루스 왕조를 열었다. 율리아누스의 후일 평판은 세베루스의 정권 정당화 서사 속에서 더욱 악화되었고, 그가 시도한 통치의 흔적은 대부분 소거되었다. 그러나 그의 사례는 정통성, 군사력, 경제 신뢰의 삼각형이 균형을 잃을 때 정권의 수명이 얼마나 짧아질 수 있는지 말해주는 반면교사로 남았다.
 

연표로 보는 핵심 이정표

 
  • 133129: 메디오라눔에서 출생.
  • 175: 페르티낙스와 함께 집정관에 오르다.
  • 193328: 근위대의 지지로 즉위.
  • 193년 봄 : 데나리우스 은 함량을 75%로 낮추는 조치를 단행.
  • 193년 봄 : 니게르ㆍ세베루스ㆍ알비누스가 반기를 들고 각자 황제를 칭하다.
  • 19362: 원로원과 근위대의 이탈 속에 궁정에서 피살된다.
 

맺음말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의 치세는 짧았지만, 로마 정치가 작동하는 원리를 선명하게 비춘다. 즉위 방식의 정통성, 화폐·급료로 대표되는 경제 신뢰, 군사력의 배치와 민심의 흐름이 서로를 증폭·제약하는 구조가 66일의 타임라인에 응축되었다. 율리아누스는 실패한 황제로 기억되지만, 그 실패는 제국 정치의 생리와 전환기의 취약성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 사례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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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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