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12일 화요일

페르티낙스(Pertinax, AD.126~193) : 로마 제국 제18대 황제(AD.193)

페르티낙스(Pertinax, AD.126~193) : 로마 제국 제18대 황제(AD.193)

 
페르티낙스(Pertinax, 126~193)는 서기 19311일부터 328일까지 로마 제국을 이끌었던 황제이다. 그는 콤모두스의 뒤를 이어 즉위했으나, 근위대의 반발 속에서 86일 만에 생을 마감하였다. 짧은 재위에도 불구하고 검소함과 공공선을 중시한 통치로 동시대인과 후대 사가에게 긍정적으로 기억된다. 그의 전임자는 콤모두스, 후임자는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였다.

페르티낙스(Pertinax, AD.126~193) : 로마 제국 제18대 황제(AD.193)

 

출생과 초기 배경

 
페르티낙스는 이탈리아의 알바 폼페이아에서 12681일에 태어났다. 그는 헬비우스 석세수스의 아들이었고, 말년에는 로마에서 193328일에 사망하였다. 치세는 19311일에 시작해 그해 328일에 끝났으며, 즉위 이전과 이후의 주요 직함과 가족 관계는 당시의 비문과 기록을 통해 전해진다.
 

관직 경력과 행정 수완

 
페르티낙스는 황제가 되기 전 이미 행정과 군사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그는 175년에 보결 집정관을 지냈고, 185년경부터 187년까지 브리타니아(브리튼) 총독을 역임했다. 이후 192년에 다시 집정관이 되었으며, 이 무렵 제국 정치의 중심부에서 영향력을 확대했다. 이 경력은 그가 황좌에 오를 때 행정에 밝고 절제된 인물이라는 기대를 낳았다.
 

즉위의 배경과 다섯 황제의 해

 
콤모두스가 실각ㆍ피살된 뒤, 로마는 권력 공백에 빠졌다. 원로원과 수도의 군 지휘부는 혼란을 진정시킬 인물로 페르티낙스를 추대했고, 193년 첫날에 그가 황위를 계승했다. 이 해는 다섯 황제의 해로 불리는데, 극심한 권력 다툼과 짧은 재위가 이어진 격동기의 서막을 그가 열었다는 점에서 상징성이 크다.
 

재정 정비와 군기 확립의 시도

 
즉위 후 페르티낙스는 낭비와 도덕적 해이를 바로잡기 위해 재정ㆍ궁정 기강을 정비했고, 특히 귀족화된 근위대의 풍조를 개혁하려 했다. 그는 근위대에 엄한 군기를 적용하고 특권을 축소하는 조치를 단행했는데, 이는 빠르게 반발을 불렀다. 3월 초 오스티아 시찰 중에는 집정관 소시우스 팔코를 옹립하려는 음모가 드러났고, 팔코는 사면되었으나 배후 장교 일부가 처형되었다. 긴장 속에서도 그는 대립을 대화로 풀려 했으나, 근위대의 불만은 누그러지지 않았다.
 

193328, 궁정에서 벌어진 비극

 
328, 수백 명의 근위대 병력이 궁궐로 난입했다. 근무 중이던 경비와 궁정 관리들은 제대로 저항하지 못했고, 페르티낙스에게 충성을 바치던 라에투스마저 이탈했다. 도주를 권유받았지만 그는 군중과 대화를 택하여 질서를 회복하려 했다. 거의 설득에 성공하는 듯했으나, 결국 병사 한 명의 칼에 쓰러졌다. 약속한 급료가 절반만 지급되었다는 불만이 난동의 표면적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짧은 즉위 기간 내내 그는 가족을 보호하려 황후나 황태자 작위를 주지 않아 사후 보복을 피하려 했다는 전언도 전해진다.
 

사후의 혼돈 : ‘황위를 경매하다

 
페르티낙스가 사망하자 근위대는 황제 자리를 사실상 경매에 부쳤고, 거부(巨富) 원로원 의원 디디우스 율리아누스가 이를 낙찰받아 즉위했다. 그러나 그의 치세는 몇 주도 못 가 끝났고, 61일에 피살되었다. 곧이어 세베루스가 로마에 입성하여 질서를 수습했고, 페르티낙스를 정통 황제로 추숭·신격화했으며 국장을 거행하게 했다. 세베루스는 자신의 이름에 페르티낙스를 덧붙였고, 즉위일과 생일에 경기를 열어 그의 명예를 기렸다. 이는 페르티낙스의 의로운 통치를 자신의 정권 정당성에 결합하려는 정치적 행보이기도 했다.
 

동시대와 후대의 평가

 
상원의원 출신 사가 카시우스 디오(Cassius Dio)는 페르티낙스를 훌륭하고 올바른 사람으로 평가했다. 그는 인간적 성실성과 청렴,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검약과 배려를 겸비했다고 적었다. 짧았던 치세는 그가 의도한 개혁의 성과를 충분히 남기지 못했지만, ‘권력보다 공공선이라는 통치의 윤리는 후대에 뚜렷한 인상을 남겼다.
 

페르티낙스가 남긴 정치적 메시지

 
권위보다 규범을 앞세우는 정치의 어려움이 드러났다. 근위대의 기득권에 맞선 군기 개혁은 곧바로 생명의 위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절제와 공공성을 중시한 그의 통치 철학은 제국이 혼돈에 빠졌을 때 필요한 리더십의 표준을 제시했다. 세베루스가 그의 이름과 명예를 계승한 사실 자체가 그 상징성을 보여준다.
 
다섯 황제의 해의 첫 주자였던 그는 제도와 무력, 도덕과 실리의 충돌 속에서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를 선택했고, 그 선택이 비극적 최후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로마 정치사의 경구를 남겼다.
 

인물ㆍ직함ㆍ가계 개요

 
  • 황제 재위 : 19311~ 328. 전임자 코모두스, 후임자 디디우스 율리아누스.
  • 주요 관직 : 집정관(175 보결, 192 정식), 브리타니아 총독(185~187).
  • 출생ㆍ사망 : 12681일 알바 폼페이아 출생, 193328일 로마에서 사망.
  • 가족 : 배우자 플라비아 티티아나, 자녀로는 헬비우스 페르티낙스(황태자 칭호 카이사르’)
 

연표로 보는 핵심 이정표

 
  • 12681: 알바 폼페이아에서 출생. 이후 지방·중앙 관료 경력을 쌓는다.
  • 175: 집정관(보결) 취임. 제국 행정의 핵심에 진입한다.
  • 185~187년경 : 브리타니아 총독 재임. 국경 방위와 지방 통치를 경험한다.
  • 192: 집정관. 수도 정치의 전면으로 복귀한다.
  • 19311: 황제 즉위. 혼란 수습과 기강 확립에 착수한다.
  • 193328: 근위대 난입으로 궁정에서 피살된다.
  • 193년 봄~여름 : 근위대의 황위 경매, 디디우스 율리아누스 즉위ㆍ피살, 세베루스 입성. 페르티낙스 신격화ㆍ국장, 이름 계승.
 

맺음말

 
페르티낙스의 치세는 짧았지만, 그가 시도한 재정ㆍ군기 개혁과 공공선 지향의 통치는 혼돈의 제국에서 드물게 빛난 장면이었다. 근위대의 기득권을 건드린 대가로 삶을 잃었으나, 그의 명예는 곧바로 회복되었고 후계 정권의 정통성을 비추는 거울이 되었다. 숫자로는 ‘86에 불과했지만, 원칙과 절제가 통치의 언어였던 순간으로서 그의 시대는 지금도 또렷하다.
 
=-=-=-=-=-=-=-=-=
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댓글 없음:

댓글 쓰기

참고: 블로그의 회원만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

발렌티니아누스 2세(Valentinian II, AD.371~392) : 로마 제국 제49대 황제(AD.375~392) 서방

발렌티니아누스 2 세 (Valentinian II, AD.371~392) : 로마 제국 제 49 대 황제 (AD.375~392) 서방   발렌티니아우스 2 세 (Valentinian II, Valentinianus) 황제 칭호 : 임페라토르 카에사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