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켄니우스 니게르(Pescennius Niger, AD.c.135~194) : 로마 제국 황제참칭자(193~194)
가이우스 페스켄니우스 니게르(Gaius Pescennius Niger, 약 135~194)는 ‘다섯 황제의 해’로 불린 193년에 시리아ㆍ동방 군단의 지지를 바탕으로 스스로 황제를 칭한 인물이다. 그는 페르티낙스 피살과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의 옹립 소식에 맞서 즉위를 선언했으나, 경쟁 상대였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공세에 밀려 194년 안티오키아 인근에서 패사하였다. 재위로 간주되는 기간은 193년 4월 9일 전후에 시작해 194년 5월경에 종결된 것으로 이해되며, 공식 선전물과 화폐 주조는 주로 안티오키아 조폐소를 거점으로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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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스켄니우스 니게르(Pescennius Niger, AD.c.135~194) : 로마 제국 황제참칭자(193~194) |
출생 배경과 이름의 전거
니게르는 2세기 중엽 제국의 이탈리아권에서 태어난 것으로 보이며, 부친은 안니우스 푸스쿠스(Annius Fuscus), 모친은 람프리디아(Lampridia)로 전한다. 사료 일부는 그의 가계를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의거해 전하나, 해당 사료의 신뢰도에는 주의가 필요하다. 그의 정식 군주명은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가이우스 페스켄니우스 니게르 이우스투스 아우구스투스’로 나타나며, 금화·은화 전면의 표제에 ‘IVST(=Iustus, 정의로운)’가 반복 표기되어 정당성과 도덕적 이미지를 강조하려 한 의도가 읽힌다.
193년의 혼란과 옹립의 맥락
193년 1월, 페르티낙스가 근위대 난입으로 살해된 직후 로마에서는 디디우스 율리아누스가 근위대의 지지로 즉위하였다. 이에 동방의 유력 주둔군을 배경으로 한 니게르는 자신을 황제로 선포하며 로마의 정국에 도전하였다. 이 시기는 페르티낙스ㆍ디디우스 율리아누스ㆍ니게르ㆍ클로디우스 알비누스ㆍ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서로 경쟁하거나 연쇄적으로 황위를 주장한 ‘다섯 황제의 해’로, 제국의 합법성과 무력 배치가 급속히 재편되던 시기였다.
병력 배치와 초반 거점 선택
니게르는 비잔티움(오늘날의 이스탄불)을 전략 본부로 삼아 마르마라해 남안 방어를 조정하고, 안티오키아ㆍ소아시아의 도시 연맹으로 지지 기반을 다졌다. 비잔티움의 자연 요새성과 해협 통제력은 세베루스의 접근을 지연시키는 데 유리했고, 소아시아 내륙의 산악로는 방어에 적합했다. 그러나 수도 로마를 장악한 세베루스의 공식성ㆍ속도전에 맞서는 데에는 동방의 장거리 보급과 도시 충성의 변동성이 약점으로 작용하였다.
키지쿠스 전투와 비잔티움 포위
세베루스는 로마에서 즉시 동진을 개시했고, 장군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칸디두스를 선발대로 파견했다. 가을 무렵 소아시아 키지쿠스에서 칸디두스와 니게르 측 아셀리우스 아이밀리아누스가 격돌하여 니게르 측이 패하고 지휘관 아이밀리아누스가 전사했다. 이어 비잔티움은 장기 포위전에 들어갔고, 니게르는 도시를 버리고 니케아로 퇴각하며 전선을 재편하였다. 비잔티움은 니게르에게 끝까지 충성했으나, 최종 함락은 195년 말에야 이루어질 만큼 저항이 길었다.
니케아 전투와 타우루스 산맥 방어선
193년 12월, 니케아 외곽에서 벌어진 전투에서도 니게르 군은 패했으나, 주력의 보존에는 어느 정도 성공했다. 그는 타우루스 산맥의 협곡을 요새화해 방어선을 구축하고 자신은 안티오키아로 이동했으나, 이 무렵 소아시아의 일부 도시(라오디케이아ㆍ티레 등)가 세베루스에게 충성을 바꾸며 후방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 194년 2월 13일 이집트가 세베루스를 지지한다고 선언하고, 아라비아 속주의 총독까지 세베루스 진영에 가세하면서 니게르의 병참ㆍ세수 기반은 급격히 축소되었다.
이수스 전투와 패배, 안티오키아에서의 최후
세베루스는 선발대 칸디두스를 파비우스 코르넬리우스 아눌리누스로 교체하며 전선을 압박했다. 194년 5월, 알렉산데르 대왕의 옛 승전지로 유명한 이수스 평원에서 양군이 총력전을 벌였고, 니게르는 장기 격전 끝에 결정적으로 패배했다. 그는 파르티아로의 도주를 시도했으나 안티오키아에서 체포되어 참수되었다. 잘린 머리는 비잔티움 성벽 앞까지 보내져 심리전을 위해 전시되었고, 최종적으로 로마에도 반입되었다. 이후 세베루스는 비잔티움을 함락해 도시를 초토화한 뒤 재건함으로써 반란 지원의 대가를 과시했다.
지지자 처벌과 사료 비판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는 세베루스가 니게르의 처와 자녀를 처형하고 재산을 몰수했다는 서술을 전한다. 그러나 이 사료는 후대 선전의 성격이 강하다는 비판을 받아 왔고, 현대 연구자 일부는 세베루스가 과도한 보복을 자제하고 니게르 일가를 공적 영역에서 배제하는 선에서 조처했을 가능성을 더 높게 본다. 사료의 성격과 정치적 맥락을 함께 고려할 때, 니게르 지지층에 대한 처벌은 있었으되 ‘전면적 멸문’으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경쟁 황제의 정치ㆍ선전 기술
니게르는 즉위 직후부터 화폐ㆍ칭호ㆍ의례를 통해 ‘정의로운 황제’ 이미지를 부각했다. 안티오키아 조폐 주화의 표제(IVST)는 그의 통치 명분을 간명하게 요약하며, 동방 군단과 도시 엘리트의 지지 연합을 염두에 둔 정치적 신호였다. 그러나 합법성 경쟁에서 로마와 이탈리아 핵심부를 장악한 세베루스의 우위, 이집트 곡물 공급선의 상실이 겹치면서, 그의 선전은 물적 기반을 결여한 슬로건에 머물렀다.
‘다섯 황제의 해’ 속 좌표와 계승ㆍ종결 구도
니게르의 전임자ㆍ경쟁자는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였고, 최종 승자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였다. 알비누스는 한때 세베루스의 명목상 공동자(카이사르)로 인정되었다가 후일 경쟁자로 전환했다. 193~194년의 이 연쇄는 네르바-안토니누스 계열에서 세베루스 왕조로 권력이 이동하는 과도기의 내전 양상을 압축하며, 니게르는 동방의 군사ㆍ도시 연합이 로마 중심 합법성에 맞설 수 있는지 시험한 사례로 남았다.
핵심 전투ㆍ사건 타임라인
- 193년 4월 9일 전후 : 니게르가 동방에서 스스로 황제를 칭하고 비잔티움을 거점으로 삼는다.
- 193년 가을 : 키지쿠스 전투 패배, 비잔티움 포위 개시, 니케아로 후퇴한다.
- 193년 12월 : 니케아 전투 패배 후 타우루스 방어선 구축, 도시들의 이탈이 가속된다.
- 194년 2월 13일 : 이집트ㆍ아라비아 속주가 세베루스를 지지하며 니게르의 후방이 붕괴한다.
- 194년 5월 : 이수스 전투에서 결정적 패배, 안티오키아 탈출 중 체포ㆍ참수된다.
- 195년 말 : 장기 저항하던 비잔티움이 함락ㆍ파괴되고 재건된다.
니게르를 둘러싼 평가의 쟁점
정통성 대 무력의 균형 : 동방 주둔군과 도시 네트워크의 지지만으로는 로마ㆍ이탈리아ㆍ이집트 곡물로 구성된 ‘핵심 벨트’의 합법성ㆍ보급을 대체하기 어려웠다.
선전과 물적 기반의 간극 : ‘Iustus(정의)’를 전면에 내건 주화ㆍ칭호는 강력한 메시지였으나, 전선 압박과 후방 이탈 앞에서 효과를 발휘하기 힘들었다.
사료의 비판적 독해 : 니게르 지지자 처벌ㆍ가계 운명에 관한 서술은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의 과장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비교사료로 상호검증해야 한다.
관련 인물 정리
- 페르티낙스(Pertinax) : 193년 1월 즉위, 근위대 난입으로 피살되며 니게르의 도전을 촉발한 전임 황제.
- 디디우스 율리아누스(Didius Julianus) : 근위대의 지지로 황위를 계승했으나, 곧 세베루스에게 밀려난 경쟁자.
- 셉티미우스 세베루스(Septimius Severus) : 판노니아 군단을 이끌고 동진하여 니게르를 격파하고 왕조를 창건한 최종 승자.
맺음말
페스켄니우스 니게르의 도전은 제국의 합법성ㆍ병참ㆍ선전이 어떻게 얽혀 정권의 명운을 좌우하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는 동방의 지지와 ‘정의’의 언어로 황위를 주장했으나, 로마 중심의 제도ㆍ군사ㆍ경제 벨트를 앞세운 세베루스의 공세를 끝내 넘지 못했다. 193~194년의 짧은 장면 속에 제국의 권력 이동 법칙이 응축되어 있으며, 니게르는 그 가혹한 법칙의 희생자이자 증언자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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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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