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밀리아누스(Aemilianus, AD.c.207~253) : 로마 제국 제32대 황제(AD.253)
아이밀리아누스(Aemilianus), 두 달의 황제가 드러낸 3세기 로마의 권력 상호작용
아이밀리아누스(Aemilianus, 약 207~253)는 253년 여름 약 두 달간 로마 제국을 통치한 황제이다. 그는 모에시아 군을 지휘해 침입한 고트족을 격파한 직후 군단의 추대로 황제에 올랐고, 곧장 이탈리아로 진군해 인테르암나 전투에서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와 볼루시아누스를 물리쳤으나, 발레리아누스가 대군을 이끌고 접근하자 이듬달 부하 병사들에게 피살되었다는 점에서 군단 정치의 가혹한 속도를 웅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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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밀리아누스(Aemilianus, AD.c.207~253) : 로마 제국 제32대 황제(AD.253) |
아프리카 출신의 군인, 이름이 말해 주는 배경
아이밀리아누스는 로마 아프리카 속주의 지르바(현 지르바 섬)에서 태어난 것으로 전하며, 4세기 『황제약사』는 그를 무어인으로, 12세기 조나라스는 리비아인으로 기록한다. 그의 프라이노멘ㆍ노멘ㆍ코그노멘 조합은 시민권 획득의 계보를 암시하며, 아내는 아프리카 출신의 코르넬리아 수페라로 알려져 있다.
모에시아 방면 사령관에서 ‘전격 추대’까지의 경로
갈루스–볼루시아누스 치하에서 그는 발칸 방면 군을 맡아 다뉴브 전선을 안정시키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고트족 지도자 크니바의 공세 속에서 의미 있는 승리를 거두자 야전군이 그를 황제로 추대하였고, 이는 변방 전선의 전과와 군단 충성이 즉각적인 권력 교체로 연결되던 3세기 권력 구조의 전형을 보여준다.
로마로의 속진과 인테르암나 전투, 정권 전복의 순간
아이밀리아누스는 방면군을 비워 둔 채 플라미니아 가도를 따라 신속히 남하했고, 원로원이 그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하자 갈루스와 볼루시아누스는 직접 야전으로 나왔다. 테르니 인근 인테르암나 나하르스 전투에서 아이밀리아누스가 승리하자 두 사람은 북쪽으로 패주했으나, 곧 포룸 플라미니이에서 호위대에게 살해되며 정권이 전복되었다.
원로원의 승인과 통치의 외피, 선전의 핵심 메시지
원로원은 잠시 저항한 뒤 아이밀리아누스를 황제로 승인했고, 그는 피우스ㆍ펠릭스ㆍ국부 등의 칭호와 트리부니키아 포테스타스, 폰티펙스 막시무스 위계를 부여받았다. 주화와 선전은 “누구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고트 격퇴”를 내세워 ‘제국 회복의 능력’을 자신에게 귀속시키는 메시지를 집중적으로 반복하였다.
몰락의 속도, 발레리아누스의 등장과 부하의 변심
갈리아ㆍ라인 방면의 대군을 장악한 발레리아누스가 자칭 황제로 봉기해 이탈리아로 진군하자, 병력 열세에 직면한 아이밀리아누스는 스폴레티움 인근에서 부하 병사들에게 살해되었다. 재위는 대략 7~9월의 짧은 기간에 그쳤고, 전임은 갈루스–볼루시아누스, 후임은 발레리아누스–갈리엔누스로 연결되며 군단 정치의 속도감과 승계의 가파름을 각인시켰다.
출신과 계보를 둘러싼 상반된 전승, 평가의 맥락
그의 미천한 출자설과 고결한 혈통 설은 각각 패자의 비난과 당대 선전의 흔적을 반영하는 상반된 전승으로 해석된다. 이름과 시민권의 계보, 아프리카 출신 배우자 등 물적 단서는 지역 엘리트 출신의 신분 상승과 군 경력의 결합이라는 사회사적 맥락을 비춘다.
속전속결의 전략, 상벌과 충성의 정치가 남긴 아이러니
아이밀리아누스의 승리 요인은 ‘속도’였으나, 몰락의 원인 역시 ‘속도’였다. 변방에서 거둔 승리를 수도 정변으로 전환하는 전격전은 성공했지만, 더 큰 병력을 지닌 경쟁자의 등장 앞에서 그의 군은 상벌 계산을 바꾸었고, 충성은 하루아침에 배반으로 바뀌었다. 이 장면은 3세기 로마 제정이 무력ㆍ속도ㆍ상징의 균형을 상실했을 때 어떤 결과가 초래되는지를 극적으로 증언한다.
주화와 상징, 군주 이미지의 구성
아이밀리아누스의 주화 전면에는 “IMP CAES AEMILIANVS P F AVG”와 같은 범례가, 후면에는 군신 마르스 등 군덕을 표상하는 도상이 배치되었다. 이는 ‘군사적 회복’에 방점을 찍은 통치 이미지의 시각적 압축이며, 원로원 승인 직후의 조기 통치 목표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분명히 보여준다.
간단 연표
- 약 207년 : 아프리카 속주 지르바 출생으로 전한다.
- 251~253년 : 모에시아 방면군 지휘, 고트전 승리를 거두고 추대된다.
- 253년 7월경 : 인테르암나 나하르스 전투에서 승리하고 로마로 진군한다.
- 253년 9월경 : 스폴레티움 부근에서 부하에게 피살된다.
맺음말
아이밀리아누스의 두 달은 승리의 선전과 정권의 속도전, 원로원 승인과 군단 정치의 배반이 한 호흡 안에서 교차한 시간이었다. 변방 승리의 카리스마는 수도의 정통성을 장악할 만큼 강력했지만, 더 큰 병력과 더 두터운 기반 앞에서는 오래 버티지 못했다. 그의 서사는 짧지만, 3세기 제정의 합법성ㆍ무력ㆍ속도의 불안한 균형이 어떻게 작동하고 붕괴했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준거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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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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