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12일 화요일

클로디우스 알비누스(Clodius Albinus, AD.c.150~197) : 로마 제국 황제참칭자(AD.193~197)

클로디우스 알비누스(Clodius Albinus, AD,c.150~197) : 로마 제국 황제참칭자(AD.193~197)

 
데키무스 클로디우스 알비누스(Decimus Clodius Albinus, 150~197)193년부터 197년까지 로마 제국의 황위를 둘러싼 내전 국면에서 브리튼과 히스파니아 군단의 추대를 받아 황제 칭호를 사용한 인물이다. 그는 초기에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협력했으나 196년에 결별하여 전면전을 벌였고, 197년 루그두눔 전투에서 패사하였다. 그의 경력과 최후는 다섯 황제의 해라 불린 격동기 권력 교체의 논리를 선명하게 드러내는 사례로 평가된다.

클로디우스 알비누스(Clodius Albinus, AD.c.150~197) : 로마 제국 황제참칭자(AD.193~197)

 

출생과 이름, 그리고 출발점

 
알비누스는 아프리카 속주의 하드루메툼(오늘날 튀니스의 수스)에서 태어났으며, 사망은 갈리아의 루그두눔(리옹)에서 197219일에 맞았다는 기록이 확인된다. ‘알비누스라는 코그노멘은 피부가 유난히 희었다는 일화에서 유래한 것으로 전하나, 해당 전거 가운데 일부는 신뢰도가 낮은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의존하고 있어 비판적 검토가 필요하다. 즉위 전 그의 정식 이름은 데키무스 클로디우스 알비누스였고, 경쟁 황제로서 사용한 군주명은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데키무스 클로디우스 셉티미우스 알비누스 아우구스투스로 표기되었다.
 

브리튼 총독에서 제국 정치의 전면으로

 
알비누스는 네르바안토니누스 계열의 말기에 관료ㆍ군 경력을 축적했고, 191년부터 197년 사이 브리튼 총독으로 재임하며 북서 변경 방위를 담당하였다. 그는 194년에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는데, 동료 집정관이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였다는 점은 두 사람이 초기에 일정 수준의 협력 관계였음을 시사한다. 브리튼과 히스파니아의 군단이 그를 지지한 배경에는 장기간의 국경 방위 경험과 현지 지휘권에 대한 신뢰가 깔려 있었다.
 

다섯 황제의 해와 브리튼·히스파니아 군단의 옹립

 
193년 초 페르티낙스(Pertinax, 126~193)가 근위대 난입으로 피살되고 디디우스 율리아누스(Didius Julianus, 133~193)가 황위를 매수하듯 계승하자, 브리튼과 히스파니아 군단은 알비누스를 황제로 추대하였다. 그는 원로원의 승인과 로마 시민의 민심을 거치지 못한 수도 정변에 맞서 군단의 합법성을 내세우며 동시다발적으로 등장한 경쟁 황제 가운데 한 축을 이루었다. 이 대립 구도는 곧 판노니아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Septimius Severus, 145~211)와 시리아의 페스켄니우스 니게르(Gaius Pescennius Niger, 135~194)로 확장되며 전제국적 내전으로 전개되었다.
 

세베루스와의 잠정 협력과 결렬

 
정국 초기에 세베루스는 알비누스를 잠정적인 동반자로 대우하며 명목상 카이사르지위를 인정하는 유화책을 사용하였다. 로마와 이탈리아, 곡물 공급의 요충인 이집트를 선점하려면 서방의 유력 장군과 당장의 전면 충돌을 피하는 것이 합리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6년에 세베루스가 동부를 제압하고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하자 양측의 잠정 협력은 파기되었고, 알비누스는 갈리아와 브리튼 병력을 동원해 세베루스와의 결전을 준비하였다.
 

병력 동원과 브리튼 방어 공백의 대가

 
알비누스는 브리튼의 제2ㆍ제6ㆍ제20군단과 히스파니아 제7군단 등 가용 전력을 최대한 끌어모았다. 이 과정에서 브리튼 방위선이 얇아져 마에아타이 봉기 등 몇 차례의 반란을 촉발했으며, 훗날 세베루스가 브리튼을 통치할 때까지 후유증이 이어졌다. 전선 집중을 위한 서방 전력의 집결이 단기적으로는 유효했으나, 변경 안정이라는 장기 과제에는 부정적 파급을 남겼다는 점에서 전략적 상쇄 비용이 컸다.
 

루그두눔으로 가는 길, 그리고 197년의 최후

 
양측의 결전은 197년 갈리아의 루그두눔 일대에서 성사되었다. 전황 초반 알비누스는 브리튼과 갈리아의 혼성군을 앞세워 맞섰으나, 세베루스의 집요한 압박과 동맹의 이탈 속에 전열이 무너졌다. 그는 197219일 전투 중 혹은 패주 과정에서 사망하였고, 세베루스는 반란 진영의 지도부를 처벌하고 갈리아ㆍ브리튼의 군사 체계를 재정비하였다. 이 승리는 세베루스 왕조 성립의 분수령이 되었고, 알비누스의 도전은 역사 속으로 퇴장하였다.
 

화폐와 선전, 그리고 풍요의 시대표상

 
알비누스가 내전기 발행한 주화 가운데에는 ‘Saeculum Frugiferum(풍요의 시대)’을 표상하는 유형이 확인되며, 아프리카계 신 바알 하몬과의 연관성이 지적된다. 이는 자신의 출신 기반과 풍요·안정의 메시지를 연결하여 서방 도시 엘리트와 병사에게 통치의 명분을 호소하려는 시도로 해석된다. 내전기의 주화는 단순한 재정 수단을 넘어, 정치적 정체성과 통치 의지를 선전하는 이동식 매체로 기능하였다.
 

가계 전승과 사료 비판

 
알비누스의 배우자와 자녀에 관한 정보는 단편적이며, 이름조차 확정되지 않았다.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는 부정확한 세부를 여럿 덧붙여왔고, 위조 주화 전승이 가공의 인물을 낳았을 가능성까지 거론된다. 현대 연구자들은 아셀리아 씨족과의 연관 같은 가설을 신중히 검토하지만, 확증적 자료는 여전히 빈약하다. 이러한 불확실성은 제국 말기의 전기 텍스트를 다룰 때 사료 비판이 필수임을 상기시킨다.
 

정치 직함과 공식 이력의 윤곽

 
알비누스는 194년 집정관직을 수행했고, 브리튼 총독으로 191년부터 197년까지 장기 재직하였다. 193년에는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와 페스켄니우스 니게르,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더불어 경쟁 황제로 기록되며, 명목상 로마 황제의 칭호를 사용했다. 이 공식 직함과 재직 기록은 비문ㆍ화폐ㆍ문헌이 교차 확인하는 영역으로, 그의 정치적 위상과 영향력을 가늠하는 기준이 된다.
 

내전기의 교훈, 합법성과 병참의 결합

 
알비누스의 도전은 군단의 추대라는 로마 정치의 한 축이 수도의 상징적 합법성과 이집트 곡물의 병참 네트워크, 이탈리아 핵심부의 정치적 지지와 결합하지 못할 때 얼마나 취약한지를 드러냈다. 초기의 협력과 타협이 전선 재편과 함께 곧바로 파열되는 양상은, 원로원ㆍ군단ㆍ도시 엘리트의 삼각 구도가 내전의 승패를 결정했음을 보여준다. 그의 패배는 우연적 사고가 아니라 구조적 열세의 결과였다.
 

관련 인물 개요

 
  • 페르티낙스(Pertinax, 126~193)1931월 즉위 후 근위대 난입으로 피살되어 후속 내전의 방아쇠를 당긴 전임 황제이다.
  • 디디우스 율리아누스(Didius Julianus, 133~193)는 근위대의 지지로 황위를 이었으나 민심을 얻지 못하고 단명하였다.
  • 셉티미우스 세베루스(Septimius Severus, 145~211)는 판노니아 군단의 지지로 알비누스·니게르를 제압하고 새로운 왕조를 열었다.
 

연표로 보는 핵심 이정표

 
  • 150년경 : 아프리카 속주 하드루메툼에서 출생.
  • 191~197: 브리튼 총독으로 재임.
  • 193: 브리튼ㆍ히스파니아 군단의 추대로 황제 칭호 사용을 시작하다.
  • 194: 집정관으로 선출되다(동료 집정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 196: 세베루스와 결별하여 전면전에 돌입하다.
  • 197219: 루그두눔 인근 전투에서 패사하다.
 

맺음말

 
클로디우스 알비누스의 궤적은 내전기의 로마가 작동하는 방식을 압축한다. 군단의 충성, 수도의 합법성, 이집트 곡물과 갈리아ㆍ브리튼 전선의 병참이라는 세 축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상실하면 정권의 수명은 급격히 줄어든다. 알비누스는 서방 군단과 도시 엘리트의 지지를 등에 업었으나, 로마 핵심부와 병참을 장악한 세베루스 앞에서 밀려났다. 그가 남긴 것은 패배의 서사가 아니라, 권력의 조건을 밝히는 역사적 규범이라는 점에서 오늘의 독자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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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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