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오도시우스 왕조(AD.379~457) : 로마 제국 황혼기를 수놓은 마지막 명가
로마 제국은 서기 4세기 후반부터 5세기 중반에 이르는 격동의 시기를 보냈다. 이 시기에 제국의 흥망성쇠를 좌우하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왕조가 있었으니, 바로 테오도시우스 왕조(Theodosian dynasty)이다. 서기 379년부터 457년까지 로마 제국을 통치했던 이들은, 제국의 분열과 게르만족의 침입이라는 거대한 도전에 직면하며 로마의 역사를 새롭게 써 내려갔다.
테오도시우스 왕조는 5명의 로마 황제를 배출하며 후기 고대(Late Antiquity)의 로마 제국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왕조는 발렌티니아누스 왕조(Valentinianic dynasty, 364-455)와 혼인을 통해 얽혀 있었고, 이후 레오니드 왕조(Leonid dynasty, 457-518)로 계승되었다.
![]() |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Theodosius I)의 즉위 10주년을 기념해 만들어진 은제 접시. 테오도시우스 1세와 그의 두 아들 호노리우스와 아르카디우스가 새겨져 있다. |
1. 왕조의 시조 : 플라비우스 테오도시우스 백작
테오도시우스 왕조의 창시자는 플라비우스 테오도시우스(Flavius Theodosius)이다. 그는 흔히 ‘테오도시우스 백작(Count Theodosius)’으로 불리는데, 히스파니아(Hispania) 출신의 위대한 장군이었다 . 그는 서기 360년대 중후반의 혼란스러운 시기에 로마 제국의 안정에 크게 기여했다.
테오도시우스 백작은 366년 알레마니족을 공격하여 갈리아(Gaul)에서 승리하고, 그 포로들을 포 강(Po Valley) 유역에 재정착시켰다. 특히 그의 활약이 두드러졌던 것은 367년부터 369년에 걸쳐 로마 브리타니아(Roman Britain)를 위협했던 '대음모(Great Conspiracy)'를 진압한 것이다. 이 반란은 마그누스 막시무스(Magnus Maximus, 재위 383–388)가 자신의 영지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하며 그와 친척 관계임을 내세웠으나, 이는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 369년, 테오도시우스 백작은 로마 제국의 최고 군사 직위 중 하나인 '마기스터 에퀴툼(magister equitum)'에 임명되어 375년까지 재직했다 그는 370년 알레마니족에 맞서, 372/373년에는 사르마티아족에 맞서 그의 아들 테오도시우스(Theodosius)와 함께 군사 작전을 수행했다. 373년, 발렌티니아누스 1세(Valentinian I) 황제의 로마 아프리카(Roman Africa) 통치를 뒤흔들었던 피르무스(Firmus)의 반란 또한 테오도시우스 백작에 의해 진압되었다.
2. 테오도시우스 1세 : 제국의 통합과 기독교의 국교화
테오도시우스 백작의 아들인 플라비우스 테오도시우스(Flavius Theodosius)는 서기 379년 동로마 제국의 황제로 즉위하면서 ‘테오도시우스 1세’(Theodosius I, 347/346–395)가 되었다. 그의 통치는 로마 제국 역사상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394년부터 395년까지 찬탈자 에우게니우스(Eugenius)를 물리치고 로마 제국을 잠시 재통합했다. 그러나 그의 사후, 제국은 아들들에게 동서로 나뉘어 계승되었다. 서방은 호노리우스(Honorius, 재위 395-423)가, 동방은 아르카디우스(Arcadius, 재위 395-408)가 다스리게 되었다. 이 분할은 제국의 완전한 분열로 이어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또한 기독교 역사에서도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니케아 기독교(Nicene Christianity)를 로마 제국의 국교로 선포했으며, 이교를 금지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이로써 로마 제국은 다신교 사회에서 기독교 사회로 완전히 전환되는 결정적인 발걸음을 내디뎠다.
3. 왕조의 주요 황제들과 그들의 후손
테오도시우스 왕조는 테오도시우스 1세를 시작으로 동서 로마 제국에 걸쳐 여러 중요한 황제들을 배출했다.
- 테오도시우스 1세(Theodosius I, 347/346–395) : 왕조의 기틀을 다진 황제이자, 동로마 제국의 황제로 379년에 즉위했다. 로마 제국을 일시적으로 재통합했으며, 니케아 기독교를 국교로 삼았다. [☞ 바로가기]
- 호노리우스(Honorius, 재위 395–423) : 테오도시우스 1세의 아들로, 서로마 제국의 첫 번째 황제가 되었다. 그의 재위 기간은 서로마 제국이 심각한 내부 및 외부 위기에 직면했던 시기였다. 410년에는 알라리크가 이끄는 서고트족에게 로마가 약탈당하는 충격적인 사건을 겪었다. [☞ 바로가기]
- 아르카디우스(Arcadius, 재위 395–408) : 테오도시우스 1세의 아들이자 호노리우스의 형으로,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비교적 짧은 재위 기간 동안 그는 주로 궁정 대신들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 바로가기]
- 테오도시우스 2세(Theodosius II, 재위 408–450) : 아르카디우스의 아들로, 동로마 제국의 황제였다. 그의 재위 기간 중 가장 중요한 업적은 ‘테오도시우스 법전(Codex Theodosianus)’을 편찬한 것이다. 또한 그는 콘스탄티노플을 둘러싸는 거대한 방벽인 ‘테오도시우스 성벽(Theodosian Walls)을 건설하여 도시를 안전하게 지켰다. [☞ 바로가기]
- 발렌티니아누스 3세(Valentinian III, 재위 425–455) : 갈라 플라키디아(Galla Placidia)의 아들로,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테오도시우스 왕조 황제이다. 그는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초반에는 어머니의 섭정을 받았고, 후반에는 아에티우스(Aetius) 장군과 같은 실력자들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그의 재위 기간은 서로마 제국이 훈족의 위협(아틸라)과 반달족의 침입(455년 로마 약탈)으로 인해 더욱 쇠퇴하는 시기였다. [☞ 바로가기]
- 콘스탄티우스 3세(Constantius III, 재위 421) : 테오도시우스 1세의 딸 갈라 플라키디아의 남편이자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아버지이다. 그는 잠깐 동안 서로마 제국의 공동 황제로 재직했으나 곧 사망했다. 그의 결혼을 통해 테오도시우스 왕조와 발렌티니아누스 왕조는 혈연적으로 깊게 연결되었다. [☞ 바로가기]
이 왕조는 발렌티니아누스 1세의 딸인 갈라(Galla)와 테오도시우스 1세의 결혼, 그리고 갈라 플라키디아가 발렌티니아누스 3세를 낳으면서 발렌티니아누스 왕조와의 혼인 관계를 통해 왕조의 정통성과 연속성을 확보하려 노력했다.
4. 혼인 관계를 통한 왕조의 지속
테오도시우스 왕조는 직계 남성 후손 외에도 혼인을 통해 그 영향력을 확대하고 유지하려 했다.
- 테오도시우스 2세 사후, 그의 누나인 풀케리아(Pulcheria)가 마르키아누스(Marcian)와 결혼하면서 마르키아누스는 동로마 황제가 되었다. 이로써 테오도시우스 왕조의 혈통을 가진 여성을 통해 황제가 계승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 테오도시우스 2세의 딸인 리키니아 에우독시아(Licinia Eudoxia)는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Petronius Maximus)와 결혼했고,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딸인 플라키디아(Placidia)는 올리브리우스(Olybrius)와 결혼했다. 이들은 모두 훗날 황제가 되었다.
- 안테미우스(Anthemius) 역시 마르키아누스의 사위였기 때문에 때때로 테오도시우스 왕조의 일원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이러한 혼인 관계는 테오도시우스 왕조가 직접적인 황위 계승을 하지 못할 때에도 간접적으로 제국의 권력 중심에 남아있으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심지어 6세기 말까지도 테오도시우스 왕조의 후손들은 콘스탄티노플의 동로마 귀족의 일원으로 남아 있었다.
5. 테오도시우스 왕조의 종말
테오도시우스 왕조는 서기 457년 마르키아누스(Marcian) 황제의 죽음과 함께 막을 내렸다. 이는 서방 제국의 마지막 테오도시우스 왕조 황제였던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죽음(455년)과 맞물려 서로마 제국의 급속한 쇠퇴를 상징하는 사건들이었다. 테오도시우스 왕조는 제국의 분열을 공고히 하고, 야만족의 거듭된 침입으로 인해 로마가 더 이상 이전과 같은 강력한 제국이 아님을 보여준 시기였다.
테오도시우스 왕조는 고대 로마 제국과 중세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시대의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그들은 제국이 직면한 내부적 갈등과 외부적 위협 속에서 제국의 전통과 질서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역사의 큰 흐름 속에서 변화와 쇠퇴의 흐름을 완전히 막지는 못했다. 이 왕조의 역사는 강대했던 로마 제국이 어떻게 분열되고 쇠퇴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남아 있다.
=-=-=-=-=-=-=-=-=
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댓글 없음:
댓글 쓰기
참고: 블로그의 회원만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