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렌티니아누스 3세(Valentinian III, AD.419~455) : 서로마 제국 제53대 황제(AD.425~455)
- 플라키두스 발렌티니아누스(Placidus Valentinianus)
- 황제 명칭 : 임페라토르 카에사르 플라비우스 플라키두스 발렌티니아누스 아우구스투스(Imperator Caesar Flavius Placidus Valentinianus Augustus)
- 출생 : 기원후 419년 7월 2일 / 라벤나
- 사망 : 기원후 455년 3월 16일 / 로마
- 부친 : 콘스탄티우스 3세
- 모친 : 갈라 플라키디아(Galla Placidia)
- 배우자 : 리키니아 에우독시아(Licinia Eudoxia)
- 자녀들 : 에우도키아(Eudocia), 플라키디아(Placidia)
- 재위 : 425년 10월 23일 ~ 455년 3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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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렌티니아누스 3세(Valentinian III, AD.419~455) : 서로마 제국 제53대 황제(AD.425~455) |
서로마 제국 붕괴의 서막을 알린 황제
고대 로마 제국은 찬란했던 영광만큼이나 권력 투쟁과 외세의 침략으로 얼룩진 역사였다. 5세기에 접어들면서 서로마 제국은 점차 쇠퇴의 길을 걷고 있었으며, 특히 발렌티니아누스 3세(Valentinian III)의 재위 기간은 제국의 급격한 약화와 붕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는 유년기부터 황제에 올라 30년에 달하는 긴 통치 기간을 보냈지만, 이 시기는 강력한 군사령관들 사이의 내전과 훈족(Huns)을 비롯한 야만족의 침략으로 얼룩진 혼돈의 연속이었다. 발렌티니아누스 1세(Valentinian I)의 증손자이자 발렌티니아누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였던 그는, 유능한 재상과 군사 지도자를 질투하여 제거하는 어리석음을 범함으로써 스스로의 파멸과 제국의 붕괴를 앞당겼다. 이 글에서는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생애와 통치, 그를 둘러싼 인물들, 그리고 그의 죽음이 서로마 제국에 미친 영향을 자세히 살펴본다.
1. 어린 시절과 불운한 혈통
플라비우스 플라키두스 발렌티니아누스(Placidus Valentinianus)는 419년 7월 2일, 당시 서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라벤나(Ravenna)에서 태어났다. 그는 갈라 플라키디아(Galla Placidia)와 콘스탄티우스 3세(Constantius III)의 외아들이었다. 갈라 플라키디아는 테오도시우스 1세(Theodosius I)의 딸이자 서방 황제 호노리우스(Honorius)의 이복 누이였다. 즉,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호노리우스 황제의 조카이자 동방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Theodosius II)의 사촌이 되는 명문 황족이었다. 그는 또한 발렌티니아누스 1세의 증손자로, 발렌티니아누스 왕조의 마지막 남성 직계 후손이었다.
하지만 그의 어린 시절은 순탄치 않았다. 그의 아버지 콘스탄티우스 3세는 421년에 잠깐 황제 자리에 올랐다가 사망했다. 이후 어머니 갈라 플라키디아는 형 호노리우스와의 갈등으로 인해 율리아누스와 그의 누이 유스타 그라타 호노리아(Justa Grata Honoria)와 함께 콘스탄티노플로 피신해야 했다. 이 시기에 발렌티니아누스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노빌리시무스(nobilissimus)’라는 칭호를 받으며 황제의 잠재적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2. 카이사르(Caesar)에서 아우구스투스(Augustus)로의 즉위 (425년)
423년, 서로마 제국의 황제 호노리우스가 사망하고, 그의 뒤를 이어 고위 관료였던 요안네스(Joannes)가 황제위를 찬탈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동방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는 요안네스의 찬탈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 상황을 타개하고 자신의 정통성을 지키기 위해 테오도시우스 2세는 어린 발렌티니아누스 3세를 이용했다.
424년 10월 23일, 요안네스를 견제하고 황족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테오도시우스 2세는 5살 된 발렌티니아누스를 ‘카이사르(caesar)’로 임명하며 후계자 지위를 부여했다. 동시에 자신의 딸 리키니아 에우독시아(Licinia Eudoxia)와 발렌티니아누스의 약혼을 성사시켜 콘스탄티누스 왕조와 발렌티니아누스 왕조 사이의 결속을 강화했다.
요안네스가 동로마 제국과의 해상 및 육상 전투에서 패배하자, 테오도시우스 2세의 사절인 헬리온(Helion)은 425년 10월 23일 로마에서 발렌티니아누스를 ‘아우구스투스(augustus)’로 즉위시켰다. 이로써 6살의 어린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서 공식적인 통치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통치는 이름뿐이었고, 실제 권력은 대부분 그의 어머니 갈라 플라키디아와 후에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Flavius Aetius)라는 강력한 군 사령관의 손에 있었다.
3. 갈라 플라키디아의 섭정 : 제국 내부의 갈등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초기 통치 기간 동안, 그의 어머니 갈라 플라키디아는 실질적인 섭정으로서 제국을 이끌었다. 그녀는 황제의 어머니로서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하지만 그녀의 섭정은 내부의 권력 다툼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갈라 플라키디아와 당시 서로마 제국의 중요한 군사 지도자였던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 사이의 권력 다툼은 서로마 제국의 취약성을 더욱 드러냈다.
아에티우스는 뛰어난 군사적 재능으로 게르만족과 훈족의 침략을 막아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제국의 핵심 인물로 부상했다. 하지만 갈라 플라키디아는 아에티우스의 강력한 영향력을 견제하려 했고, 이는 서로마 제국 군부 내 파벌 싸움으로 이어졌다. 이로 인해 제국의 국경 방어에 집중해야 할 병력과 자원이 내부 갈등으로 소모되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4.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 : 제국의 방패와 그림자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통치 기간 내내, 서로마 제국의 군사적 방위는 거의 전적으로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Flavius Aetius, 390?~454)의 손에 달려 있었다. 아에티우스는 훈족과 다른 게르만 부족들과의 관계에 능숙했으며, 이들을 이용하여 제국 방어에 활용하기도 했다. 그는 서로마 제국이 직면한 수많은 군사적 위협으로부터 제국을 지켜내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 훈족의 위협 : 훈족의 지도자 아틸라(Attila, ?~453)는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치세 동안 서로마 제국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이었다. 아틸라가 갈리아를 침공하자, 아에티우스는 451년 카탈라우눔 평원 전투(Battle of the Catalaunian Plains)에서 훈족과 게르만족 연합군에 맞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는 서로마 제국이 거둔 마지막 대승 중 하나로 평가되며, 아에티우스의 군사적 역량을 입증하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 이탈리아 침공 : 그러나 아틸라는 이듬해인 452년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아퀼레이아(Aquileia)를 비롯한 여러 도시들을 파괴하며 로마를 위협했다. 이때 아에티우스의 군사적 역량으로는 훈족의 진격을 완전히 막기 어려웠고, 결국 교황 레오 1세(Pope Leo I)가 아틸라를 직접 만나 협상을 벌여 이탈리아 철수를 이끌어냈다.
아에티우스는 사실상 황제 이상의 권력을 누렸다.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그의 그늘에 가려 있었고, 이는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잠재된 질투와 불만을 키웠다.
5. 아에티우스의 암살과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비극적인 최후
점차 성인이 된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아에티우스의 막강한 권력에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통치가 아에티우스의 그늘에 가려져 있다고 생각했으며, 재상으로서의 아에티우스의 영향력을 견제하려 했다. 결국 이러한 갈등은 비극적인 결말로 이어졌다.
454년,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궁정에서 직접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를 암살하는 데 가담했다. 황제가 직접 제국의 가장 유능한 군사 지도자를 제거한 이 사건은 서로마 제국의 몰락을 가속화시킨 결정적인 실수로 평가된다. 아에티우스가 제거되자 제국을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방어할 능력은 거의 사라졌다.
아에티우스의 죽음은 황제 자신에게도 비극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아에티우스의 측근들은 황제의 배신에 분노했다. 455년 3월 16일, 아에티우스의 전직 경호대원들이 로마의 캄피돌리오 언덕에서 발렌티니아누스 3세를 암살했다. 그의 나이 35세였다. 이로써 발렌티니아누스 1세로부터 이어진 발렌티니아누스 왕조는 막을 내렸다.
6. 가족과 후대 : 몰락의 가속화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437년 동방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의 딸 리키니아 에우독시아(Licinia Eudoxia)와 결혼하여 두 딸을 두었다. 에우독시아(Eudocia)와 플라키디아(Placidia)였다. 그의 죽음 이후, 서로마 제국은 새로운 권력 투쟁과 외세의 침략에 더욱 취약해졌다. 그의 암살 이후, 페트로니우스 막시무스(Petronius Maximus)가 황제로 등극했지만 그의 통치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발렌티니아누스 3세의 죽음은 서로마 제국이 다시는 안정된 통치 체제를 유지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 되었다. 그의 사후 제국은 혼란에 빠졌고, 급격한 붕괴의 길을 걸어 불과 20여 년 후인 476년 공식적으로 멸망하게 된다.
7. 역사적 평가 : 무능과 질투가 빚어낸 제국의 종말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서로마 제국의 황제로서 30년이라는 긴 기간을 통치했지만, 그의 재위는 제국 붕괴를 막지 못하고 오히려 가속화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개인적으로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했으며, 제국을 수호하는 유능한 장군들을 통제하기보다는 제거하려 했다.
그의 통치는 외부의 위협(훈족의 침입)과 내부의 권력 투쟁이 심화되는 시기였다.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이러한 위기를 극복할 만한 통치 능력이 부족했으며, 결국 자신을 보호하던 마지막 방패인 아에티우스를 제거함으로써 스스로의 파멸과 제국의 붕괴를 앞당겼다. 그는 서로마 제국 멸망 직전의 마지막 황제들 중 한 명으로 기억되며, 그의 삶은 제국의 쇠퇴 과정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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