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카디우스(Arcadius, AD.c.377~408) : 동로마 제국 제52대 황제(AD.395~408)
- 플라비우스 아르카디우스(Flavius Arcadius)
- Ancient Greek : Ἀρκάδιος, Arkadios
- 황제 칭호 : 임페라토르 카에사르 플라비우스 아르카디우스 아우구스투스(Imperator Caesar Flavius Arcadius Augustus)
- 출생 : 기원후 377년경 / 히스파니아
- 사망 : 기원후 408년 5월 1일 / 콘스탄티노플
- 부친 : 테오도시우스 1세
- 모친 : 아엘리아 플라킬라(Aelia Flaccilla)
- 배우자 : 아엘리아 에우독시아(Aelia Eudoxia)
- 자식들 : 플라킬라(Flacilla), 풀케리아(Pulcheria), 아르카디아(Arcadia), 테오도시우스 2세(Theodosius II), 마리나(Marina)
- 재위 : 기원후 383년 1월 19일(395년 1월 17일) ~ 408년 5월 1일
- 공동 통치 :
테오도시우스 1세(Theodosius I, 383–395)
호노리우스(Honorius, 393–408) 서방
테오도시우스 2세(Theodosius II, 402–408)
아르카디우스(Arcadius, AD.c.377~408) : 로마 제국 제52대 황제(AD.395~408) 동로마 |
로마 제국 동방의 나약한 황제
로마 제국이 광대한 영토를 양분하여 통치하기 시작한 4세기 후반, 제국의 동방에서는 이름뿐인 황제 한 명이 즉위했다. 바로 테오도시우스 1세(Theodosius I)의 장남이자, 동로마 제국을 처음으로 통치했던 아르카디우스(Arcadius)이다. 그는 겉으로는 황제였지만, 평생을 강력한 신하들과 아내의 그늘 아래에서 지냈고, 스스로는 제국의 정치나 군사 문제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그의 통치는 로마 제국 동방의 불안정한 시작과 함께, 황제의 권위가 강력한 측근들에게 어떻게 휘둘릴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되었다. 이 글에서는 아르카디우스의 생애와 그가 겪었던 치세, 그리고 그의 나약한 통치가 로마 제국 동방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자세히 살펴본다.
1. 로마 제국 동방의 공동 황제로 지명되다
플라비우스 아르카디우스(Flavius Arcadius)는 377년경 히스파니아(Hispania)에서 태어났다. 그는 강력한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와 그의 첫 번째 아내 아일리아 플라킬라(Aelia Flaccilla)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이었다.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지만, 황제의 아들로서 특별한 교육을 받았을 것이다. 383년 1월 19일, 불과 다섯 살의 어린 나이에 아르카디우스는 아버지 테오도시우스에 의해 ‘아우구스투스(Augustus)’로 선포되고 로마 제국 동방의 공동 통치자가 되었다. 이는 아버지의 통치권을 강화하고 자신의 후계 구도를 공고히 하기 위한 조치였다.
10년 후, 그의 동생 호노리우스(Honorius)는 서방의 아우구스투스로 지명되었다. 아르카디우스는 수사학자 테미스티우스(Themistius)와 수도승 아르세니우스 조나라스(Arsenius Zonaras)에게서 교육을 받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훗날 그의 성격과 통치 방식에서 드러나듯이, 이러한 교육이 그를 강력한 지도자로 만들지는 못했다.
2. 테오도시우스 1세의 사망과 신하들의 각축장
395년 1월 17일, 아버지 테오도시우스 1세가 사망하면서 아르카디우스는 불과 17세의 나이로 동로마 제국의 단독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어리고 정치 경험이 부족했으며, 심약한 성정 때문에 곧 강력한 측근들의 영향 아래 놓이게 되었다. 그의 통치 기간 내내, 동로마 제국의 궁정은 황제를 등에 업고 권력을 장악하려는 신하들과 아내의 치열한 암투장이 되었다.
- 루피누스(Rufinus)의 야심 : 테오도시우스 1세 사망 후, 동방 제국의 프라이토리안 프리펙트(Praetorian Prefect)였던 루피누스(Rufinus)가 아르카디우스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루피누스는 자신의 딸을 아르카디우스에게 시집보내 황제의 장인이 됨으로써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려 했다.
- 에우트로피우스(Eutropius)의 등장과 유도키아(Eudoxia)의 혼인 : 그러나 루피누스가 안티오키아(Antioch)로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환관 에우트로피우스(Eutropius)가 기회를 포착했다. 그는 아르카디우스에게 프랑크족 고위 장군 바우토(Bauto)의 딸 아일리아 유도키아(Aelia Eudoxia)의 초상화를 보여주었다. 아르카디우스가 유도키아에게 관심을 보이자, 에우트로피우스는 빠르게 혼인을 주선하여 395년 4월 27일 둘을 결혼시켰다. 루피누스는 자신의 딸이 황후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혼인 행렬이 유도키아의 저택으로 향하는 것을 보고 나서야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동방 궁정의 권력 지형이 루피누스에게서 에우트로피우스와 유도키아에게로 옮겨갔다.
3. 황후 유도키아의 강력한 영향력과 종교적 갈등
유도키아는 아르카디우스의 아내이자 동로마 제국의 황후로서 매우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녀는 사실상 남편을 대신하여 제국의 정치적 실세로 군림했다. 그녀의 정치적 간섭은 동로마 궁정에 끊임없는 파벌 싸움과 갈등을 야기했다.
특히 유도키아는 당시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였던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John Chrysostom)와 극심한 대립을 겪었다. 크리소스토무스 대주교는 황후의 사치스러운 생활 방식과 영향력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그는 403년 9월, 유도키아의 은상이 아우구스타이온(Augustaion)에 세워진 것에 대해 “헤로디아(Herodias)가 또다시 날뛴다. 또다시 괴로워한다. 다시 춤을 추고, 다시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받고 싶어 한다”며 그녀를 비난했다. 이는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주도했던 헤로디아에 비유하며 유도키아의 탐욕을 질책한 것이었다.
아르카디우스는 자신의 아내에 대한 이러한 모욕을 더 이상 묵과할 수 없었고, 결국 404년 초 새로운 종교 회의가 소집되어 크리소스토무스는 단죄되었다. 아르카디우스는 처음에 추방 명령 집행을 주저했지만, 404년 6월 20일 크리소스토무스를 아브하지아(Abkhazia)로 유배 보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유도키아는 자신의 승리를 오래 즐기지 못하고 그해 말 사망했다.
4. 나약한 황제 아르카디우스의 평가
아르카디우스는 학자 J. B. 버리(J. B. Bury)에 의해 “키가 작고, 피부색이 어두우며, 마르고 활력이 없었다. 그의 우둔한 재치는 말과 졸린 눈빛으로 드러났으며, 정신적 미숙함과 나약한 성격 때문에 궁정의 강력한 인물들에게 지배당하는 것이 불가피했다”고 평가된다. 그는 정치적, 군사적 문제보다 경건한 기독교인으로 비치는 것에 더 관심이 많았다.
- 종교적 정책 : 그는 전통적인 군사적 업적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경건함을 통해 새로운 형태의 황제적 승리를 추구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이교 신앙을 완전히 폐지하려는 노력이 강화되었다. 399년 7월 13일, 아르카디우스는 모든 비기독교 신전을 즉시 파괴하라는 칙령을 내렸다.
- 건축과 기념물 : 콘스탄티노플의 일곱 언덕 중 하나인 크세롤로포스(Xerophos)에 아르카디우스의 이름을 딴 새로운 포럼(Forum of Arcadius)이 건설되었다. 이곳에는 고트족 장군 가이나스(Gainas)에 대한 그의 ‘승리’를 기념하는 원주(Column of Arcadius)가 세워지기 시작했지만, 이 원주는 아르카디우스 사후 테오도시우스 2세(Theodosius II)에 의해 완성되었다.
- 역사가들의 재평가 : 역사가 워렌 트레드골드(Warren Treadgold)는 아르카디우스의 통치에 대해 “제대로 통치하지 못함으로써 많은 행정적 문제를 초래했지만, 동시에 너무나 해를 끼치지 않아 누구도 그를 폐위하려 하지 않았고, 결국 혼란스러운 시기 동안 법적 연속성을 유지했다”고 평가했다. 이는 그의 무능함이 역설적으로 제국의 큰 혼란을 막는 데 기여했다는 다소 냉소적인 평가이다.
5. 후기 통치와 죽음
아르카디우스는 통치 후반기에 많은 책임을 프라이토리안 프리펙트인 안테미우스(Anthemius)에게 위임했다. 안테미우스는 지난 10년간의 분열을 치유하기 위해 서방의 스틸리코(Stilicho)와 평화를 모색했다. 그러나 스틸리코는 이미 동방 궁정에 인내심을 잃은 상태였고, 407년 알라리크(Alaric)와 서고트족에게 일리리쿰(Illyricum)을 점령하여 서방 제국에 넘기도록 부추겼다.
스틸리코의 계획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고, 곧이어 408년 5월 1일, 아르카디우스는 3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뒤는 그의 어린 아들 테오도시우스 2세가 이었다. 아르카디우스는 콘스탄티누스 대제를 포함한 여러 전임자들처럼 콘스탄티노플의 성 사도 교회(Church of the Holy Apostles)에 있는 포르피리움 석관에 안장되었다.
6. 아르카디우스의 유산과 동로마 제국의 초석
아르카디우스의 통치는 그의 개인적인 나약함으로 점철되었지만, 동시에 동로마 제국이 하나의 독립적인 정치적 실체로 자리매김하는 과도기였다. 그의 치세 동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은 더욱 발전했으며, 동방의 행정 체계는 점차 독자적인 특성을 갖추어 나갔다. 강력한 신하들의 영향력 아래 있었지만, 이러한 과정을 통해 동로마 제국은 서방 로마 제국과는 다른 궤적을 그리며 중세 비잔티움 제국으로의 길을 닦게 된다.
그는 개인적으로는 우유부단하고 무기력한 황제로 평가받지만,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동로마 제국은 서방의 혼란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안정된 기반을 다지기 시작했다. 이는 주로 그의 측근들이 유능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르카디우스는 로마 제국의 운명이 동과 서로 완전히 분리되는 과정을 상징하는 인물로 역사에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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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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