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노리우스(Honorius, AD.384~423) : 서로마 제국 제52대 황제(AD.393~423)
- 황제 명칭 : 임페라토르 카에사르 플라비우스 호노리우스 아우구스투스(Imperator Caesar Flavius Honorius Augustus)
- 출생 : 기원후 384년 9월 9일 / 콘스탄티노플
- 사망 : 기원후 423년 8월 15일 / 라벤나
- 부친 : 테오도시우스 1세
- 모친 : 아엘리아 플라킬라(Aelia Flaccilla)
- 배우자 :
마리아(Maria) : 398년 결혼, 407년 사망
테르만티아(Thermantia) : 408년 결혼, 이후 이혼 - 재위 : 393년 1월 23일(395년 1월 17일) ~ 423년 8월 15일
- 공동 통치 :
아르카디우스(Arcadius, 393–408) 동방
테오도시우스 2세(Theodosius II, 402–423) 동방
아탈루스(Attalus, 409–410) Rome
콘스탄티누스 3세(Constantine III, 409–411) Gaul
콘스탄스 2세(Constans II, 409–411) Gaul
콘스탄티우스 3세(Constantius III, 421) 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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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노리우스(Honorius, AD.384~423) : 서로마 제국 제52대 황제(AD.393~423) |
서방 로마 제국 멸망의 전조를 알린 황제
로마 제국은 4세기 말 테오도시우스 1세(Theodosius I)의 통치 아래 잠시나마 통일을 이루었지만, 그의 죽음과 함께 동방과 서방으로 영구히 분열되는 길을 걷게 된다. 이때 서방 로마 제국의 첫 번째 황제 자리에 오른 인물이 바로 호노리우스(Honorius)이다. 그는 395년 제위에 올랐을 때 불과 10살의 어린 나이였으며, 이후 30년간의 재위 기간 내내 무능하고 무기력한 황제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의 통치 기간은 서방 로마 제국이 심각한 내부 혼란과 외부 침략에 시달리며 서서히 멸망의 길을 걷기 시작한 시기와 정확히 일치한다. 410년, 로마가 서고트족에게 약탈당하는 충격적인 사건을 겪으며, 호노리우스는 서방 로마 제국 멸망의 전조를 알린 비운의 황제로 역사에 기록된다. 이 글에서는 호노리우스의 생애, 실리코(Stilicho)의 섭정, 그리고 그가 직면했던 수많은 위기와 비참한 최후를 자세히 살펴본다.
1. 어린 시절과 서방 황제로서의 등극
플라비우스 호노리우스(Flavius Honorius)는 384년 9월 9일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에서 태어났다. 그는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와 그의 첫 번째 아내 아일리아 플라킬라(Aelia Flaccilla)의 둘째 아들이자, 동방 황제 아르카디우스(Arcadius)의 동생이었다. 어린 호노리우스는 393년 1월 23일, 불과 8살의 나이로 아버지에 의해 ‘아우구스투스(Augustus)’로 선포되며 공동 황제가 되었다. 이는 테오도시우스 1세가 자신의 후계 구도를 공고히 하고, 제국의 동서 분할 통치를 미리 계획했음을 보여주는 조치였다.
395년 1월 17일, 테오도시우스 1세가 사망하자 로마 제국은 공식적으로 동방과 서방으로 분할되었다. 호노리우스는 서방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었고, 그의 형 아르카디우스는 동방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너무 어린 나이였던 호노리우스는 스스로 제국을 통치할 능력이 없었고, 그의 권력은 당시 제국의 최고 군 사령관이었던 실리코(Stilicho)의 손에 맡겨지게 되었다.
2. 실리코(Stilicho)의 섭정 : 제국의 방패이자 황제의 보호자
호노리우스의 재위 초기 13년간, 서방 로마 제국의 실질적인 통치자는 그의 장인이자 유능한 반달족(Vandal) 출신 장군 실리코였다. 실리코는 호노리우스의 아버지 테오도시우스 1세로부터 죽기 직전 “두 아들을 돌봐달라”는 유언을 들었다고 주장하며 제국의 서방과 동방 모두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 이는 동방 궁정, 특히 아르카디우스의 측근인 루피누스(Rufinus)와의 심각한 갈등으로 이어졌다. 실리코는 호노리우스의 무능함을 보완하며 침략하는 게르만 부족들로부터 서방 로마 제국을 방어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
- 서고트족과의 대결 : 실리코는 서고트족(Visigoths)의 지도자 알라리크(Alaric)의 침략에 맞서 제국을 방어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는 402년 폴렌티아 전투(Battle of Pollentia)와 406년 피에솔레 전투(Battle of Faesulae)에서 알라리크를 격파하며 이탈리아 본토를 지켜냈다. 특히 402년의 승리 이후 호노리우스는 방어가 취약한 로마를 떠나 서방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라벤나(Ravenna)를 선택하여 그곳으로 천도했다. 라벤나는 습지로 둘러싸여 천연의 요새였고, 이후 서방 로마 제국의 행정 중심지가 된다.
- 라인 강 국경의 붕괴 : 그러나 406년 12월 31일, 라인 강 국경이 동결되면서 반달족, 알란족(Alans), 수에비족(Suebi) 등이 대규모로 갈리아(Gaul)로 침입해 들어오는 대사건이 발생했다. 실리코는 제국의 다양한 위협에 동시에 대처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다.
실리코는 자신의 딸 마리아(Maria)를 호노리우스와 결혼시키고, 그녀가 죽자 다시 자신의 또 다른 딸 테르만티아(Thermantia)를 황제와 결혼시키며 황제와의 인척 관계를 통해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려 했다.
3. 실리코의 몰락과 410년 로마 약탈의 비극
점차 성장한 호노리우스는 자신의 무능력을 인지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실리코의 권력이 커지는 것에 대한 불안감과 질투심을 품기 시작했다. 로마 궁정 내에서는 실리코가 제위를 노린다는 음모론이 퍼졌다. 게다가 그가 게르만족 혈통이라는 점은 로마인들의 강한 반감을 샀다.
결국 408년, 황궁의 환관 올림피우스(Olympius)의 주도로 실리코를 몰아내려는 쿠데타가 일어났다. 호노리우스는 올림피우스의 선동에 넘어가 408년 8월 22일 실리코의 처형을 명령했다. 제국의 가장 유능한 군사 지도자가 제거되면서 서방 로마 제국은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
실리코가 사라지자마자, 서고트족의 알라리크는 다시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로마로 진격했다. 408년, 알라리크는 로마를 포위했고, 로마 원로원은 막대한 금과 은, 비단을 지불하여 알라리크를 돌려보냈다. 하지만 호노리우스는 알라리크와 협상하기를 거부했고, 알라리크는 다시 로마를 포위했다. 409년, 알라리크는 로마 원로원과 협력하여 호노리우스를 폐위하고 플리스쿠스 아탈루스(Priscus Attalus)를 꼭두각시 황제로 옹립했다.
하지만 아탈루스는 무능했으며, 그의 통치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알라리크는 410년 아탈루스를 폐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노리우스는 계속해서 알라리크와 협상하기를 거부했다. 결국 410년 8월 24일, 알라리크가 이끄는 서고트족은 로마로 진입하여 도시를 약탈했다. 거의 800년 만에 로마가 외세에게 약탈당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로마의 함락 소식을 들은 호노리우스는 자신이 키우던 닭 ‘로마’가 죽었다는 말로 이해하고, ‘로마가 왜 이렇게 빨리 죽었냐’고 물었다고 한다. 병사들이 도시 로마가 함락된 것이라고 설명하자 그제야 황제는 오해를 풀었다는 일화는 호노리우스의 무능함과 현실 감각 부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회자된다.
4. 연이은 찬탈자들과 제국의 혼란
호노리우스의 통치 기간 동안 서방 로마 제국은 외부의 침략뿐만 아니라 내부의 찬탈자들로 인해 더욱 혼란에 빠졌다.
- 콘스탄티누스 3세(Constantine III)의 반란 : 407년, 브리튼에서 콘스탄티누스 3세가 스스로 황제를 칭하며 갈리아로 진출했다. 그는 곧 갈리아와 히스파니아(Hispania)를 장악하며 호노리우스에게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 그 외의 찬탈자들 : 그 외에도 갈리아의 요비누스(Jovinus), 아프리카의 헤라클리아누스(Heraclianus) 등 여러 찬탈자들이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켜 호노리우스의 권위를 흔들었다.
이러한 찬탈자들과의 싸움은 로마 제국의 자원과 병력을 소모시켰으며, 중앙 정부의 통제력을 더욱 약화시켰다.
5. 갈라 플라키디아(Galla Placidia)의 역할과 재건 노력
혼란 속에서도 서방 로마 제국의 안정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 있었다. 바로 호노리우스의 이복 여동생 갈라 플라키디아(Galla Placidia)였다. 그녀는 알라리크에 의해 로마에서 포로로 잡혀갔다가, 알라리크의 뒤를 이은 서고트족 왕 아타울프(Ataulf)와 결혼했다. 이후 아타울프의 사망과 함께 로마로 돌아온 갈라 플라키디아는 호노리우스에게 강력한 군사 지도자 콘스탄티우스 3세(Constantius III)와 결혼하도록 설득했다.
콘스탄티우스 3세는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발휘하여 콘스탄티누스 3세와 요비누스를 비롯한 대부분의 찬탈자들을 진압하고 제국의 질서를 회복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는 421년 호노리우스에 의해 공동 황제로 임명되기도 했으나, 불과 몇 달 만에 사망하며 제국의 희망은 다시 꺾이고 말았다.
6. 말년과 죽음
호노리우스는 콘스탄티우스 3세의 죽음 이후에도 약 2년간 더 재위했다. 그의 말년 역시 그다지 생산적이지 못했다. 그는 423년 8월 15일, 수종(浮腫, edema)으로 추정되는 병으로 라벤나에서 사망했다. 그의 나이 38세였다.
호노리우스는 로마 제국의 마지막 ‘단일 혈통 황제’라는 점에서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그의 죽음 이후, 서로마 제국은 조안네스(Joannes)라는 또 다른 찬탈자에게 통치권을 빼앗겼지만, 이후 호노리우스의 조카인 발렌티니아누스 3세(Valentinian III)가 제위에 오르게 된다.
7. 역사적 평가 : 혼란기의 꼭두각시 황제
호노리우스는 로마 제국 역사상 가장 무능하고 무기력한 황제 중 한 명으로 평가된다. 그의 재위 기간은 서방 로마 제국이 멸망하는 중요한 전환점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통치 기간 내내 강력한 신하들의 꼭두각시 역할에 머물렀다. 그는 유능한 실리코를 제거하며 제국 방어를 스스로 약화시켰고, 로마가 약탈당하는 초유의 사태를 막지 못했다.
역사가들은 호노리우스의 재위 기간 동안 로마 제국 서방의 붕괴가 가속화되었다는 데 동의한다. 그는 지도자로서의 자질이 부족했으며, 제국의 위기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호노리우스의 이야기는 강대국이 내부의 무능과 분열로 인해 어떻게 쇠퇴의 길을 걷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그는 이름뿐인 황제였지만, 서방 로마 제국의 종말을 알리는 상징적인 인물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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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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