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21일 목요일

고대 로마 왕정(Roman Kingdom, BC.753~509) : 천년 로마의 시작

고대 로마 왕정(Roman Kingdom, BC.753~509) : 천년 로마의 시작

 
로마 왕정(Roman Kingdom)은 전승에 따르면 기원전 753년경 도시 로마가 건국된 시점부터 기원전 509년경 공화정으로 전환되기까지의 시기를 일컫는다. 이 시기 로마는 일곱 명의 왕에 의해 통치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며, 이들은 로마의 초기 제도와 기반을 다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당시의 기록이 거의 남아있지 않아 이 시기의 역사는 주로 후대 로마 역사가들의 전승과 고고학적 발굴에 의존하며, 역사적 사실과 신화적 요소가 뒤섞여 있다.
 

1. 로마의 탄생: 지리적 이점과 전설의 시작

 
로마의 발상지는 이탈리아 중부 테베레(Tiber) 강을 가로지를 수 있는 여울목 근처였다. 팔라티노 언덕(Palatine Hill)과 그 주변 언덕들은 넓고 비옥한 평야 속에 방어하기 쉬운 위치를 제공했다. 이러한 지리적 이점들이 로마의 성공에 기여했다.
 
고대 로마 구역들
고대 로마 구역들

로마 건국 신화는 다음과 같다 : 트로이 전쟁 영웅 아이네아스(Aeneas)의 후손이자 알바 롱가(Alba Longa)의 정당한 왕 누미토르(Numitor)의 딸 레아 실비아(Rhea Silvia)는 군신 마르스(Mars)와의 사이에서 쌍둥이 로물루스(Romulus)와 레무스(Remus)를 낳았다. 누미토르의 동생 아물리우스(Amulius)가 왕위를 찬탈하고 쌍둥이를 테베레 강에 버렸지만, 이들은 암늑대의 젖을 먹고 자랐으며 양치기에게 발견되어 길러졌다. 성장한 쌍둥이는 아물리우스를 전복하고 누미토르를 복위시킨 후, 기원전 753421일 팔라티노 언덕에 로마를 건설했다. 그러나 누가 도시를 통치할지, 이름은 무엇으로 할지를 놓고 다투다 로물루스가 레무스를 죽이면서 로물루스가 도시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다.
 

2. 왕정의 통치 체계 : , 원로원, 민회

 
로마 왕정은 세 가지 주요 통치 요소로 구성되었다 : (Rex), 원로원(Senate), 그리고 민회(Assemblies)이다.
 
  • (Rex) : 왕은 최고 행정관, 군대 총사령관, 최고 사제, 최고 판사, 그리고 입법관의 역할을 수행하는 강력한 인물이었다. 왕은 종신제로 통치했으며, 선거를 통해 선출되는 방식이었다. 왕의 권위는 열두 명의 릭토르(lictors)가 휘두르는 파스케스(fasces), 보좌 의자, 자주색 토가, 붉은 신발, 흰색 머리띠 등 상징적인 휘장을 통해 드러났다.
  • 원로원(Senate) : 로물루스가 100명의 유력자를 선정하여 창설했다고 전해지는 원로원은 왕의 자문 기구였다. 원로원 의원들은 '파트레스(patres, 아버지들)'라고 불렸으며, 이들의 후손이 훗날 로마의 귀족 계급인 파트리키(patricians)가 되었다. 원로원은 왕이 제시하는 법안에 대한 자문과 왕위 계승 후보를 제시하는 역할을 했다.
  • 민회(Assemblies) : 로마 왕정 시기에는 주로 쿠리아 민회(Comitia Curiata)가 존재했다. 로물루스가 시민들을 30개의 쿠리아(curiae)로 나눈 것에 기반을 둔 이 민회는 주로 왕의 권한을 승인하거나 종교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3. 로마의 일곱 왕 : 영웅과 폭군

 
전통적으로 로마는 일곱 명의 왕에 의해 통치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들은 각각 로마의 서로 다른 측면에 기여하며 도시의 성장을 이끌었다.
 

1) 로물루스(Romulus, 기원전 753~716년경)

 
 
로마의 건국자이자 초대 왕. 로물루스는 로마의 기본적인 정치, 사회, 종교 제도를 확립했다. 그는 원로원을 창설하고, 릭토르와 파트리키 계급의 기원을 마련했으며, 30개의 쿠리아를 조직했다. 사비니족 여성들을 납치하는 '사비니 여인들의 강탈' 사건으로 사비니족과 전쟁을 벌였으나, 결국 통합을 이루고 사비니족의 왕 티투스 타티우스(Titus Tatius)와 공동 통치했다. 로물루스는 군사적 리더십을 통해 로마의 기초를 다졌다.
 

2) 누마 폼필리우스(Numa Pompilius, 기원전 715~672년경)

 
 
로마의 제2대 왕. 사비니족 출신으로, 로물루스의 군사적 통치와는 대조적으로 평화와 종교에 중점을 두었다. 그는 로마력(Roman calendar)을 제정하고, 베스타 여신의 성녀들(Vestal Virgins), 대제사장(Pontifex Maximus) 등 주요 종교 기관을 설립했다. 또한 야누스(Janus) 신전을 건립하여 로마가 평화로울 때 문을 닫는 전통을 세웠다. 누마의 통치는 로마의 종교적, 도덕적 기반을 다지고 시민들의 결속을 강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3) 툴루스 호스틸리우스(Tullus Hostilius, 기원전 672년경~640년경)

 
 
로마의 제3대 왕. 누마의 평화주의적 통치를 약점으로 간주하고 적극적으로 전쟁을 추구했다. 그의 통치 기간 중 가장 유명한 사건은 모도시 알바 롱가(Alba Longa)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이 도시를 파괴하여 로마로 주민들을 이주시킨 일이다. 또한 피데나이(Fidenae) 및 베이(Veii)와의 전쟁에서도 승리하며 로마의 군사적 확장을 이끌었다. 그러나 그는 종교를 경시하여 신들의 노여움을 샀고, 결국 벼락을 맞아 사망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4) 안쿠스 마르키우스(Ancus Marcius, 기원전 640년경~616년경)

 
 
로마의 제4대 왕. 그는 누마의 종교적 지혜와 툴루스의 군사적 호전성을 겸비한 균형 잡힌 통치자였다. 안쿠스는 누마의 종교 의례를 회복하는 동시에, 라틴 부족들과 전쟁을 벌여 로마의 영토를 확장하고 시민의 수를 늘렸다. 그는 또한 로마 최초의 항구인 오스티아(Ostia)를 건설하고, 테베레 강에 폰스 수블리키우스(Pons Sublicius)라는 목조 다리를 건설하며 로마의 사회 기반 시설을 확충했다.
 

5)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Lucius Tarquinius Priscus, 기원전 616년경~578년경)

 
 
로마의 제5대 왕. 그는 에트루리아(Etruria) 출신으로, 에트루리아계 왕조의 시작을 알렸다. 프리스쿠스는 군사적 정복을 통해 로마의 영향력을 확장하고, 키르쿠스 막시무스(Circus Maximus), 클로아카 막시마(Cloaca Maxima) 등 로마의 웅장한 건축 사업들을 시작하여 도시의 면모를 크게 발전시켰다. 또한 원로원의 의원 수를 늘리고 기사 계급을 재편성하는 등 정치적 개혁을 단행했다. 그는 로마에 에트루리아의 발달된 문화와 공학 기술을 도입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6) 세르비우스 툴리우스(Servius Tullius, 기원전 578년경~534년경)

 
 
로마의 제6대 왕. 그의 기원은 노예 신분에서 출발했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로 베일에 싸여 있다. 세르비우스 툴리우스는 로마의 사회, 군사, 정치 시스템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온 '세르비우스 개혁(Servian reforms)'으로 유명하다. 그는 로마 최초의 인구 조사를 실시하고 시민들을 재산에 따라 백인대(Centuries)로 분류하여 군사적 의무와 투표권을 부여하는 시스템을 확립했다. 또한 로마 성벽을 확장하고 도시 행정 구역을 개편하는 등 로마의 기반을 다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그의 통치는 비극적인 죽음으로 끝이 났다.
 

7)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Lucius Tarquinius Superbus, 기원전 534년경~509년경)

 
 
로마의 일곱 번째이자 마지막 왕. '수페르부스''오만한'이라는 뜻으로, 그의 폭정 때문에 붙여진 별칭이다. 그는 자신의 장인 세르비우스 툴리우스를 암살하고 왕위에 오르는 등 잔혹한 방식으로 권력을 쟁취했다. 타르퀴니우스는 원로원의 권한을 무시하고, 백성들에게 과도한 세금과 강제 노동을 부과하는 등 독재적인 통치를 펼쳤다. 그의 아들 섹스투스(Sextus Tarquinius)가 귀족 여인 루크레티아(Lucretia)를 강간하는 사건은 로마 시민들의 분노를 폭발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결국 기원전 509년 로마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정(Roman Republic)이 수립되었다.
 

4. 로마 왕정의 종말 : 공화정의 여명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의 폭정은 로마인들에게 왕권에 대한 깊은 불신을 심어주었다. 루크레티아 사건 이후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Lucius Junius Brutus)를 중심으로 한 로마 시민들이 봉기하여 타르퀴니우스 왕을 추방했고, 이로써 로마의 왕정은 244년 만에 막을 내렸다. 새로운 체제인 공화정에서는 두 명의 집정관(Consuls)이 매년 선출되어 권력을 분담하며 독재를 견제하는 형태가 되었다.
 

5. 역사적 의의와 평가 : 전설과 현실 사이

 
로마 왕정 시대의 역사는 주로 후대 역사가 리비우스(Livy), 플루타르코스(Plutarch), 디오니시우스(Dionysius of Halicarnassus) 등의 기록에 기반한다. 이들은 갈리아족의 침입으로 로마의 고대 기록이 대부분 소실된 기원전 390년 이후의 자료들을 바탕으로 로마의 건국 신화를 체계화했다. 따라서 로마 왕정 시대의 세부적인 내용은 상당 부분 신화적이거나 전설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으며, 역사적 사실 여부에 대해서는 현대 학자들 사이에서도 논쟁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왕정은 이후 로마 공화정과 제국 시대로 이어지는 기반을 다진 중요한 시기였다. 이 시대에 형성된 원로원, 민회, 군사 조직, 종교 제의 등은 로마의 사회, 정치, 군사 체계의 근간이 되었다. 로마 왕들의 이야기는 로마인들에게 자신들의 정체성, 도덕적 가치, 그리고 국가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중요한 교훈과 영감을 제공했다. 왕정 시대는 단순한 전설을 넘어, 천년 로마 제국의 위대한 역사를 시작한 첫 번째 장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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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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