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Lucius Tarquinius Priscus, BC.?~c.579) : 로마에 에트루리아의 문명을 심은 왕(BC.c.616~c.579)
-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Lucius Tarquinius Priscus)
- 출생 : 미상
- 사망 : 기원전 578년경
- 부친 : Demaratus of Corinth
- 배우자 : Tanaquil
- 자녀 : Tarquinia, Lucius Tarquinius, Arruns Tarquinius
- 재위 : 기원전 616년경 ~ 기원전 578년경
- 전임 : 안쿠스 마르키우스(Ancus Marcius)
- 후임 : 세르비우스 툴리우스(Servius Tullius)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Lucius Tarquinius Priscus)는 기원전 616년경부터 기원전 579년경까지 로마를 통치했던 전설적인 다섯 번째 왕이자, 로마 최초의 에트루리아계 왕조를 연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38년간의 재위 기간 동안 군사적 정복을 통해 로마의 세력을 확장하고, 웅장한 건축 사업들을 통해 로마의 도시적 면모를 크게 발전시켰다. 그의 통치는 로마의 정치, 사회, 그리고 문화적 기반을 한 단계 격상시키는 중요한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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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욤 루이예가 1553년에 펴낸 『저명 인물 초상집』에 실린 초상화 |
1. 에트루리아 출신 이민자의 등장 : 타르퀴니우스의 로마 입성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는 에트루리아(Etruria)의 도시 타르퀴니이(Tarquinii) 출신이었다. 그의 원래 에트루리아 이름은 ‘루쿠모(Lucumo)’였는데, 이는 에트루리아어로 ‘왕’을 의미하는 ‘라우쿠메(lauchume)’의 라틴어화된 형태였기 때문에, 그의 이름과 칭호가 혼동되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그의 아버지 데마라투스(Demaratus of Corinth, 생몰년 미상)는 코린토스(Corinth) 출신의 그리스 상인이자 망명자였다. 데마라투스의 외국인 혈통 때문에 루키우스는 타르퀴니이에서 정치적 지위를 얻는 것이 불가능했다. 당시 에트루리아 사회는 혈통과 가문의 배경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의 현명한 아내 타나퀼(Tanaquil, 생몰년 미상)의 조언은 그의 인생 항로를 바꾼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타나퀼은 재능 있는 자에게 더 개방적인 로마로 이주할 것을 권유했다. 그들이 마차를 타고 로마에 도착했을 때, 독수리가 그의 모자를 가져갔다가 다시 머리에 씌워주는 상서로운 징조가 나타났다. 예언에 능했던 타나퀼은 이를 남편의 위대한 미래를 예고하는 길조로 해석했다.
로마에서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는 그의 예의 바른 태도를 통해 빠르게 존경을 얻었다. 당시 로마의 왕이었던 안쿠스 마르키우스(Ancus Marcius, 기원전 642년경~기원전 617년경 재위)는 그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자신의 아들들의 후견인으로 임명하며 그를 왕실에 들이게 된다. 이는 그가 로마의 최고 권력층에 접근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2. 왕위 계승 : 로마 왕정의 새로운 전통을 열다
안쿠스 마르키우스는 제2대 왕 누마 폼필리우스(Numa Pompilius)의 손자였지만, 당시 로마에서는 아직 왕위가 세습되는 전통이 확고히 자리 잡지 않았다. 초기 세 명의 왕 중 누구도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지 않았으며, 모든 왕은 시민들의 추대로 선출되었다.
안쿠스 마르키우스가 사망하자,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는 원로원(Senate)과 민회(Comitia Curiata)에 직접 나서 자신이 왕위에 오를 것을 설득했다. 그는 안쿠스 마르키우스의 아들들이 아직 어리고 미숙하다는 점을 강조하며, 자신의 능력과 경험을 내세워 지지를 얻었다. 일부 전승에 따르면, 안쿠스 마르키우스의 아들들은 당시 사냥을 나가 있어 민회의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없었다고도 한다.
결국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는 로마 역사상 최초로 스스로 적극적인 로비를 통해 왕위에 오른 인물이 되었다. 그의 즉위는 로마의 전통적인 왕위 계승 방식에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3.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의 통치 : 로마의 군사적 확장과 도시의 발전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는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로마의 국력 강화와 도시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1) 정치적 개혁
- 원로원 확대 : 그는 원로원의 의원 수를 100명 추가하여 전체 원로원 의원 수를 300명으로 늘렸다. 새롭게 추가된 의원들은 기존 귀족 가문보다 낮은 신분의 가문들(minores gentes) 출신이었다. 이는 새로운 엘리트 계층을 정치 시스템에 편입시켜 왕권의 지지 기반을 확대하려는 시도였다.
- 기사 계급 증대 : 그는 로마의 기사 계급(equites)을 두 배로 늘렸다. 기사 계급은 로마 군대의 핵심 병력으로,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로마의 군사력이 더욱 강화되었음을 의미한다.
2) 군사적 정복
- 라틴인 정복 : 그는 로마의 이웃이었던 라틴 부족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여 아피올라(Apiolae)를 점령하는 등 상당한 승리를 거두고 막대한 전리품을 확보했다.
- 사비니족 격파 : 사비니족과의 전쟁에서 초기에는 어려움을 겪었으나, 아니오 강(Anio River)에 큰 다리를 건설하여 사비니족 영토를 장악하고 결국 승리했다. 이 승리는 로마의 북동쪽 국경을 안정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 에트루리아 도시들의 복종 : 프리스쿠스는 자신의 출신지이기도 한 에트루리아 도시 국가들과도 전쟁을 벌여 승리했다. 리비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로마의 왕이 에트루리아인들을 상대로 개선식을 거행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라고 한다. 이는 로마가 에트루리아에 대한 패권을 확립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3) 웅장한 건축 사업
프리스쿠스는 로마를 작은 도시에서 벗어나 위대한 제국의 수도로 만들겠다는 비전을 가지고 대규모 토목 공사와 건축 사업들을 시작했다.
- 키르쿠스 막시무스(Circus Maximus) 건설 : 팔라티노 언덕(Palatine Hill)과 아벤티노 언덕(Aventine Hill) 사이에 전차 경주를 위한 거대한 경기장인 키르쿠스 막시무스 건설을 시작했다. 이는 로마인들의 오락 문화를 발전시키고 도시의 위상을 높이는 상징적인 건축물이었다.
- 유피테르 옵티무스 막시무스 신전(Temple of Jupiter Optimus Maximus) 착공 : 카피톨리움 언덕(Capitoline Hill)에 로마의 최고신인 유피테르를 위한 웅장한 신전 건설을 시작했다. 이 신전은 로마의 종교적 중심이자 국가의 위대함을 상징하는 건축물이 되었다.
- 포룸 로마눔(Forum Romanum) 개선 : 도시 중심의 광장인 포룸 로마눔에 상점과 회랑(porticos)을 건설하여 도시의 상업 및 공공 활동을 위한 공간을 마련했다.
- 도시 성벽 건설 : 도시 주변에 성벽을 건설하여 로마의 방어력을 강화했다. (일부에서는 이후 왕인 세르비우스 툴리우스가 완공했다고도 한다.)
- 클로아카 막시마(Cloaca Maxima) 건설 : 로마 시내의 습지대를 배수하기 위한 거대한 하수도 시스템인 클로아카 막시마 건설을 시작했다. 이 공학적 걸작은 로마의 위생 상태를 개선하고 도시에 더 많은 건물을 지을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다.
- 로마 경기(Ludi Romani) 창설 : 로마인들을 위한 주요 축제와 오락 행사인 로마 경기를 제정하여 시민들의 결속을 다졌다.
프리스쿠스의 이러한 건축 사업들은 로마의 도시적 면모를 크게 개선하고, 에트루리아의 발달된 건축 기술과 공학적 역량을 로마에 도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4. 죽음과 권력 승계의 비극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는 38년간의 재위 기간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그의 통치 마지막은 비극적으로 끝났다. 전임 왕 안쿠스 마르키우스의 아들들은 자신들이 왕위를 계승했어야 한다고 믿었고, 타르퀴니우스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다.
이들은 폭동으로 위장하여 타르퀴니우스를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결국 타르퀴니우스는 폭동 중에 도끼로 머리를 맞아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다. 황후 타나퀼은 남편의 죽음을 감지했지만, 이를 외부에 알리지 않고 기지를 발휘했다. 그녀는 타르퀴니우스가 단순히 부상을 입었을 뿐이라고 선포하고, 자신들이 신임하던 사위 세르비우스 툴리우스(Servius Tullius, 기원전 578년경~기원전 535년경 재위)를 섭정으로 임명했다.
타나퀼은 세르비우스 툴리우스의 비범함을 일찍이 알아보고 그를 양자로 삼았으며, 자신의 딸 타르퀴니아(Tarquinia, 생몰년 미상)와 결혼시켰다. 타르퀴니우스의 사망이 확인된 후, 세르비우스 툴리우스는 타르퀴니우스의 아들들과 안쿠스 마르키우스의 아들들을 제치고 로마의 새로운 왕으로 등극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안쿠스의 아들들에게도 복수가 아니었으며, 결국 세르비우스 툴리우스의 두 딸이 타르퀴니우스의 아들들(혹은 손자들)인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Lucius Tarquinius Superbus, 기원전 535년경~기원전 510년경 재위)와 아룬스 타르퀴니우스(Arruns Tarquinius, 생몰년 미상)와 결혼하며 왕실의 복잡한 권력 관계가 이어졌다.
대부분의 고대 역사가들은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를 프리스쿠스의 아들이라고 보았으나, 일부는 그가 프리스쿠스의 손자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가 기원전 496년경 사망했는데, 이는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보다 80년 이상 뒤의 일이었으므로, 손자라는 설이 연대기적으로 더 합리적이다.
5.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의 유산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는 로마 왕정 시대의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한 인물이었다. 그는 로마를 에트루리아 문명과 기술의 영향을 받아들이게 했고, 이는 로마의 발전과 문명화에 큰 기여를 했다. 그의 대규모 건축 사업들은 로마를 단순한 정착지에서 벗어나 하나의 도시로서의 위상과 기능을 갖추게 했다.
또한 그는 군사적 성공을 통해 로마의 영토를 확장하고, 정치적 개혁을 통해 왕권과 국가 시스템을 강화했다. 비록 그의 삶이 비극적으로 끝났지만, 그는 로마가 이후 공화정과 제정 시대로 발전할 수 있는 굳건한 기반을 다진 왕으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그는 에트루리아의 문명을 로마에 심고, 로마를 위대한 미래로 이끌 첫걸음을 놓은 진정한 개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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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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