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Lucius Tarquinius Superbus, BC.?~495) : 폭정으로 막을 내린 로마 왕정(BC.c.534~c.509)
-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Lucius Tarquinius Superbus)
- 출생 : 로마
- 사망 : 기원전 495년경 / 쿠마이(Cumae)
- 부친 : Lucius Tarquinius Priscus (possibly grandfather)
- 모친 : Tanaquil
- 배우자 : Tullia Major, Tullia Minor
- 자녀 : Titus Tarquinius, Arruns Tarquinius, Sextus Tarquinius
- 재위 : 기원전 534년경 ~ 509년경
- 전임 : 세르비우스 툴리우스
- 후임(집정관) :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Lucius Junius Brutus),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콜라티누스(Lucius Tarquinius Collatin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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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욤 루이예가 1553년에 펴낸 『저명 인물 초상집』에 수록된 초상화 |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Lucius Tarquinius Superbus, 라틴어로 "오만한 타르퀴니우스"라는 뜻, 기원전 534년경~기원전 509년경 재위, 사망 기원전 495년)는 고대 로마의 전설적인 일곱 번째이자 마지막 왕이다. 그의 25년간의 통치는 폭정으로 특징지어지며, 이는 결국 로마 왕정을 폐지하고 로마 공화정(Roman Republic)이 수립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의 통치 방식은 잔혹한 권력 쟁취와 끊임없는 독재로 점철되었고, 이는 로마 역사에서 왕정 시대의 종말을 상징하는 비극적인 사건들을 낳았다.
1. 출생과 잔혹한 왕위 계승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는 로마의 다섯 번째 왕이었던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Lucius Tarquinius Priscus, 기원전 616년경~기원전 579년경 재위)의 아들이거나 손자였다. 고대 문헌에서는 그를 프리스쿠스의 아들로 기록했지만, 현대 역사가들은 연대기적으로 그의 손자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본다. 그의 어머니는 타나퀼(Tanaquil)로 전해진다.
그의 왕위 계승 과정은 피로 물들었다. 세르비우스 툴리우스(Servius Tullius, 기원전 578년경~기원전 535년경 재위) 왕은 왕위 계승으로 인한 갈등을 막기 위해 자신의 딸들인 툴리아 마이오르(Tullia Major)와 툴리아 미노르(Tullia Minor)를 각각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와 그의 형제 아룬스 타르퀴니우스(Arruns Tarquinius)에게 결혼시켰다. 그러나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는 자신의 아내와 형을 살해하는 잔혹한 방법으로 권력을 쟁취하려 했다.
그리고 기원전 535년경, 그는 자신의 장인이자 선대 왕인 세르비우스 툴리우스를 암살하고 왕위에 올랐다. 그의 이러한 방식은 이후 그의 폭정을 예고하는 서곡과도 같았다.
2. 오만과 폭정의 통치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의 재위 기간은 그의 별칭 '수페르부스(Superbus)'처럼 오만과 독선으로 가득했다. 그는 원로원(Senate)의 권한을 무시하고, 백성들에게 강제 노동과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며 로마를 독재적으로 통치했다. 그의 통치에 대한 평가는 로마 왕정 폐지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주요한 근거가 되었다.
- 군사적 성과 : 그는 이웃 국가들과의 전쟁에서도 성공을 거두었다. 아에퀴족(Aequi)과 평화 조약을 맺고, 에트루리아족(Etruscans)과의 조약도 갱신했다. 사비니족(Sabines)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으며, 시그니아(Signia)와 키르케이(Circeii)에 로마 식민지를 건설하며 로마의 영토를 확장했다.
- 대규모 건축 사업 : 타르퀴니우스는 로마의 웅장함을 과시하기 위한 대규모 건축 사업에 매달렸다. 그는 카피톨리노 언덕(Capitoline Hill)에 유피테르 옵티무스 막시무스 신전(Temple of Jupiter Optimus Maximus)을 짓기 위해 타르페이아 바위(Tarpeian Rock) 꼭대기를 평평하게 하고 고대 사비니 신사들을 제거했다. 또한 키르쿠스 막시무스(Circus Maximus)에 관중석을 건설하고, 로마의 거대한 하수도인 클로아카 막시마(Cloaca Maxima)의 굴착을 명령하는 등 대규모 공사를 추진했다. 이러한 건축물들은 로마의 발전에 기여했지만, 그 과정에서 백성들에게는 막대한 노동력과 재정적 부담을 안겨주었다.
- 시빌린 북스(Sibylline Books) 일화 : 고대 로마 전승에 따르면, 타르퀴니우스는 쿠마이의 시빌(Cumaean Sibyl)로부터 예언서 아홉 권을 엄청난 가격에 제안받았다. 그는 두 번이나 거절했지만, 시빌은 매번 세 권씩 태우면서도 남은 예언서의 가격은 낮추지 않았다. 결국 타르퀴니우스는 남은 세 권의 예언서를 원래 아홉 권의 가격에 구매했는데, 이 책들이 바로 로마의 운명을 점치는 중요한 역할을 했던 시빌린 북스이다. 이 일화는 그의 고집스러움과 뒤늦은 후회를 보여준다.
3. 몰락의 서곡 : 루크레티아 사건
기원전 509년, 타르퀴니우스의 폭정과 끊임없는 건설 프로젝트로 로마인들의 불만이 최고조에 달했다. 이 시기 타르퀴니우스는 부유한 루툴리(Rutuli) 부족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고, 그들의 수도 아르데아(Ardea)를 포위했다.
아르데아를 공성하던 중, 타르퀴니우스의 아들 섹스투스 타르퀴니우스(Sextus Tarquinius)는 자신의 사촌인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콜라티누스(Lucius Tarquinius Collatinus)의 아내 루크레티아(Lucretia)의 아름다움과 미덕에 반해 그녀를 강간했다. 이에 충격을 받은 루크레티아는 가족들에게 모든 사실을 폭로한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사건은 로마인들의 분노를 폭발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루크레티아의 남편 콜라티누스와 그의 친구이자 타르퀴니우스의 조카인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Lucius Junius Brutus)는 루크레티아의 시신을 로마 광장에 내걸고 타르퀴니우스 왕과 그의 폭정에 대항하는 봉기를 선동했다.
4. 왕정의 종말과 망명 생활
봉기 소식을 들은 타르퀴니우스는 아르데아를 포기하고 에트루리아의 동맹 세력인 베이(Veii)와 타르퀴니이(Tarquinii)의 지원을 받아 로마로 돌아오려 했다. 그러나 브루투스는 군대를 이끌고 타르퀴니우스 군과 맞섰다. 왕정 폐지 후 로마 공화정이 수립되었으며, 브루투스와 콜라티누스가 초대 집정관(Consuls)으로 선출되었다.
타르퀴니우스는 로마에 머물던 측근들을 통해 로마 지배층을 전복하려 했으나, 이 음모가 발각되면서 브루투스는 자신의 두 아들(티투스와 티베리우스)까지 사형에 처하는 결단력을 보여주며 반역 세력을 진압했다.
타르퀴니우스는 왕위를 되찾기 위해 여러 차례 시도했다.
- 실바 아르시아 전투(Battle of Silva Arsia) : 로마는 에트루리아 동맹군과 맞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브루투스는 타르퀴니우스의 아들 아룬스 타르퀴니우스와 일대일로 맞서 싸우다 전사했다.
- 라르스 포르세나(Lars Porsena)의 개입 : 타르퀴니우스는 클루시움(Clusium)의 왕 라르스 포르세나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포르세나는 로마를 포위했다. 이 시기에 호라티우스(Horatius)와 가이우스 무키우스 스카이볼라(Gaius Mucius Scaevola)와 같은 로마 영웅들의 전설적인 저항이 펼쳐졌다. 비록 포르세나가 잠시 로마를 점령했다는 설도 있지만, 결국 그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타르퀴니우스의 왕위 복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 레길루스 호수 전투(Battle of Lake Regillus) : 기원전 499년 또는 496년, 타르퀴니우스는 사위인 투스쿨룸(Tusculum)의 독재관 옥타비우스 마밀리우스(Octavius Mamilius)를 설득하여 라틴 군대를 이끌고 로마를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타르퀴니우스의 마지막 아들 티투스 타르퀴니우스(Titus Tarquinius)도 참전했지만, 전투는 양측 모두에게 큰 피해를 안겼고, 마밀리우스는 전사했으며, 결국 라틴 동맹군은 후퇴했다.
5. 비극적인 최후와 역사적 의미
왕위 복귀를 위한 모든 시도가 좌절된 후,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는 쿠마이(Cumae)의 아리스토데무스(Aristodemus of Cumae)의 궁정으로 망명했다. 그는 기원전 495년에 그곳에서 사망했으며, 이는 왕정 폐지 후 약 14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의 통치와 그가 야기한 사건들은 로마 왕정의 종말을 고하고 공화정이 시작되는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그의 폭정은 로마인들에게 '왕'이라는 존재에 대한 깊은 불신을 심어주었으며, 이후 공화정 시대에 '왕(rex)'이라는 칭호는 독재와 폭력의 상징으로 여겨져 금기시되었다. 그는 로마의 역사에서 가장 오만하고 잔인한 왕으로 기억되며, 로마 공화정이라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촉발시킨 인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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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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