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물루스(Romulus, BC.771~716) : 고대 로마 초대 왕(BC.753~716)
- 로물루스(Romulus)
- 출생 : 알바 롱가(Alba Longa)
- 사망 : 로마(Rome)
- 부친 : 마르스(Mars)
- 모친 : 레아 실비아(Rhea Silvia)
- 배우자 : 헤르실리아(Hersilia)
- 재위 : 기원전 753년 ~ 716년
로물루스(Romulus)는 고대 로마의 전설적인 건국자이자 초대 왕이다. 로마의 가장 오래된 법적,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 제도들을 로물루스와 그의 동시대 인물들의 공으로 돌리는 다양한 전승이 전해진다. 이러한 전승들은 비록 민간 설화 요소를 많이 포함하고 있으며, 로물루스라는 신화적 인물 뒤에 얼마나 역사적 실존 인물이 있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그에게 부여된 사건들과 제도들은 로마의 기원과 문화적 전통에 대한 신화의 중심이었다 .
1. 로물루스와 레무스 : 신화적 탄생과 유년기
로물루스 신화는 몇 가지 뚜렷한 에피소드와 인물들을 포함한다. 여기에는 로물루스와 그의 쌍둥이 동생 레무스(Remus)의 기적적인 탄생과 유년기, 레무스의 살해와 로마 건국, 사비니 여인들의 강탈(Rape of the Sabine Women)과 그에 따른 사비니족(Sabines)과의 전쟁, 티투스 타티우스(Titus Tatius)와의 공동 통치 기간, 다양한 로마 제도의 설립, 로물루스의 죽음 또는 신격화(apotheosis), 그리고 누마 폼필리우스(Numa Pompilius)의 계승 등이 포함된다.
로마 신화에 따르면,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레아 실비아(Rhea Silvia)와 군신 마르스(Mars)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었다. 이들의 외할아버지는 알바 롱가(Alba Longa)의 정당한 왕 누미토르(Numitor)였다. 쌍둥이는 누미토르를 통해 트로이(Troy)의 영웅 아이네아스(Aeneas)와 라티움(Latium) 왕 라티누스(Latinus)의 후손이었다. 쌍둥이가 태어나기 전, 누미토르의 왕좌는 그의 동생 아물리우스(Amulius)에게 찬탈당했다. 아물리우스는 누미토르의 아들들을 살해하고, 레아 실비아를 베스타(Vestal)의 성녀로 서품시켜 영원히 처녀로 살도록 선고했다.
레아가 임신하자 그녀는 자신이 군신 마르스의 방문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아물리우스는 그녀를 감옥에 가두고, 쌍둥이가 태어나자 그들을 테베레(Tiber) 강에 버리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비가 많이 와 강물이 불어 강둑에 닿을 수 없었기 때문에, 아이들을 버리라는 명령을 받은 하인들은 쌍둥이를 팔라티노 언덕(Palatine Hill) 기슭의 무화과나무 아래에 방치했다. 신화에 따르면, 쌍둥이는 암늑대에게 젖을 먹여 키워졌고, 나중에 양치기 파우스툴루스(Faustulus)와 그의 아내 아카 라렌티아(Acca Larentia)에게 발견되어 길러졌다. 이 이야기는 로마 건국 신화의 핵심 요소로, 로마인의 기원과 강인함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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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조각은 로마 신화 속 인물인 로물루스와 레무스를 묘사한 것으로, 15세기에 제작되어 파비아의 체르토사 수도원에 보존되어 있다 |
2. 레무스의 죽음과 로마의 건국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성장한 후 아물리우스를 전복시키고 누미토르를 알바 롱가의 왕좌에 복위시켰다. 이후 그들은 새로운 도시를 세우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도시를 어디에 세울지, 그리고 누가 통치할지를 놓고 쌍둥이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다. 로마 건국 신화의 중요한 부분인 ‘새점(augury) 논쟁’은 이러한 분쟁의 핵심이었다.
레무스는 아벤티노 언덕(Aventine Hill)에서, 로물루스는 팔라티노 언덕에서 새를 통해 신의 뜻을 묻는 의식을 행했다. 레무스가 먼저 여섯 마리의 새를 보았다고 주장했고, 이어서 로물루스는 열두 마리의 새를 보았다고 주장했다. 이 논쟁은 누가 더 큰 징조를 받았는지를 놓고 의견이 갈렸으며, 결국 로물루스가 이겼다고 선언되었다. 로물루스는 팔라티노 언덕에 도시 성벽을 쌓기 시작했고, 레무스는 이를 비웃으며 새로 쌓아 올린 성벽을 넘나들었다. 이 행동은 로물루스의 분노를 샀고, 결국 로물루스는 레무스를 죽였다. 일부 전승에서는 로물루스가 직접 레무스를 죽였다고 하고, 다른 전승에서는 로물루스를 따르는 이가 죽였다고도 한다. “내 성벽을 넘는 자는 누구든 이렇게 될 것이다!”라고 로물루스가 외쳤다는 말은 로마의 국경과 법을 수호하는 단호한 의지를 보여준다.
로마의 전통적인 건국 연대는 기원전 753년 4월 21일로 알려져 있다. 이 날은 ‘파릴리아(Parilia)’라는 축제일과 일치하며, 로마인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날이었다.
3. 사비니 여인들의 강탈과 사비니족과의 통합
새롭게 세워진 로마는 도시를 유지하고 성장시키기 위한 인구가 부족했다. 특히 여성의 수가 턱없이 부족하여 도시의 지속적인 발전에 위협이 되었다. 로물루스는 주변 부족들에게 로마와 통혼할 것을 제안했으나, 그의 새로운 도시는 이민자와 범죄자들의 피난처로 여겨져 거절당했다. 이에 로물루스는 교묘한 계략을 꾸몄다.
그는 대규모 축제를 열고 주변 사비니족에게 참여를 권유했다. 사비니족과 다른 이웃 부족들이 축제에 모였을 때, 로마 병사들은 신호에 따라 사비니족의 처녀들을 납치했다. 이 사건은 ‘사비니 여인들의 강탈’로 불린다. 이로 인해 사비니족과 로마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다.
사비니족의 왕 티투스 타티우스(Titus Tatius)는 로마를 공격했고, 로마와 사비니족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그러나 납치되었던 사비니 여인들이 남편이 된 로마 남자들과 가족이 된 사비니 남자들 사이에서 중재에 나서면서 극적으로 평화 협상이 이루어졌다. 이들은 이미 로마 남자들과 결혼하여 아이를 낳았고, 양측의 피해를 막기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결과적으로 로마와 사비니족은 단일 국가로 통합하기로 합의했다. 티투스 타티우스는 로물루스와 함께 로마를 공동으로 통치하는 왕이 되었다. 비록 티투스 타티우스가 이후 곧 살해되면서 로물루스가 다시 단독 왕이 되었지만, 이 사건은 로마가 외부의 문화를 포용하고 통합하여 성장하는 기초를 다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로마는 사비니족의 많은 풍습과 신앙을 받아들이며 사회적, 문화적으로 더욱 풍부해졌다.
4. 로마 제도의 설립
로물루스는 로마의 정치, 사회, 종교적 기초를 다진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로마의 주요 제도들이 확립되었다고 전해진다.
- 원로원(Senate)의 창설 : 로물루스는 로마 사회의 중요한 기둥인 원로원을 설립했다고 한다. 그는 백 명의 ‘아버지들(patres)’을 선정하여 원로원 의원으로 삼았는데, 이들이 로마 공화정 시대 귀족 계급인 ‘파트리키(patricians)’의 시초가 되었다. 원로원은 왕에게 자문하고 정책을 논의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 기사 계급(equites)의 창설 : 로물루스는 군사적 목적을 위해 ‘기사 계급’을 만들었다. 이들은 부유한 시민들로 구성되었으며, 말을 타고 전투에 참여하는 핵심 병력이었다.
- 쿠리아(curiae) 제도 : 로물루스는 로마 시민을 30개의 ‘쿠리아’로 나누어 조직했는데, 이는 시민들의 정치적 참여와 군사적 조직화를 위한 단위였다.
- 파트론-클리엔트(patron-client) 시스템 : 로물루스는 로마 사회의 핵심적인 사회 관계망인 파트론-클리엔트 시스템을 도입했다고 한다. 이는 강력한 귀족(patron)이 약한 평민(client)을 보호하고 후원하며, 클리엔트는 파트론에게 충성과 봉사를 제공하는 상호 의존적인 관계였다.
- 군사 및 종교 제도 : 그는 로마 군대를 조직하고, 다양한 종교 의례와 신앙을 정비하여 로마인들의 사회적 통합과 정신적 지주를 마련했다. 그는 ‘퀴리누스(Quirinus)’라는 사비니족의 신을 로마 신화에 통합하기도 했다.
이러한 제도들은 로마가 작은 정착지에서 강력한 도시 국가로 성장하는 데 필수적인 기반이 되었다. 로물루스는 단순히 도시를 세운 것을 넘어, 로마라는 국가의 정체성과 질서를 부여한 입법가이자 통치자로 기억된다.
5. 로물루스의 죽음과 신격화
로물루스는 37년간의 통치 끝에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죽음에 대한 전승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유명한 것은 ‘신격화’ 설화이다. 리비우스(Livy)에 따르면, 로물루스가 캄푸스 마르티우스(Campus Martius)에서 군대를 사열하던 중 갑작스럽고 맹렬한 폭풍우 속에서 회오리바람에 휩쓸려 사라졌다고 한다. 이는 그가 죽은 것이 아니라 군신 마르스에 의해 하늘로 올려져 신이 되었다는 전설이다. 이후 그는 ‘퀴리누스(Quirinus)’라는 신으로 숭배되었다. 리비우스는 이러한 신격화 설화가 로마인들에게 신들이 자신들 편이라는 믿음을 주고, 로물루스의 이름 아래 계속해서 확장해나갈 수 있는 명분을 제공했다고 본다.
다른 전승에서는 로물루스가 원로원 의원들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들이 로물루스의 독재에 불만을 품고 질투심에 그를 찢어 죽였다는 설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은 신격화 설화에 비해 대중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로물루스는 로마인들의 민족 신인 퀴리누스 신앙과 합쳐져 숭배되었고, 그의 후계자로는 사비니족 출신의 누마 폼필리우스가 왕위에 올랐다. 누마는 로마의 종교적 기초를 다진 왕으로 기억된다. 오비디우스(Ovid)의 “변신 이야기”에는 마르스가 로물루스와 그의 아내 헤르실리아(Hersilia)가 퀴리누스와 호라(Hora)로 신격화되는 과정을 묘사한다.
6. 로물루스에 대한 학문적 평가
현대의 학자들은 로물루스 신화를 로마인들이 스스로의 기원과 도덕적 가치를 이해했던 방식을 담고 있다고 본다. 고대 역사가들은 로물루스가 로마라는 도시에 자신의 이름을 부여했다는 것에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현대 역사가들은 그의 이름이 도시 이름에서 역형성된 것(back-formation)이라고 믿는다. 즉, ‘로마(Roma)’에서 ‘로물루스(Romulus)’라는 이름이 파생되었다는 견해이다.
로마 역사가들은 로마의 건국 연대를 기원전 758년에서 728년 사이라고 추정했으며, 플루타르코스(Plutarch)는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Marcus Terentius Varro)의 친구 타르티우스(Tarutius)의 계산에 따라 기원전 771년을 로물루스와 레무스의 출생 연도로 기록했다고 전한다.
로물루스 이야기가 로마 건국 신화의 원래 요소였는지, 아니면 나중에 추가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현대 고고학자 중에는 로물루스와 레무스를 역사적 인물로 받아들이는 소수도 있다. 고고학자 안드레아 카란디니(Andrea Carandini)는 1988년 팔라티노 언덕 북쪽 경사면에서 발견된 고대 벽(murulomuli)을 바탕으로 로물루스의 역사성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이 구조물이 기원전 8세기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이를 ‘로물루스의 벽'이라고 명명했다.
7. 로물루스와 원천 자료
로물루스 신화에 대한 주요 원천 자료들은 로마의 역사가들과 작가들의 저술에 기반한다. 리비우스(Livy), 디오니시우스(Dionysius), 플루타르코스(Plutarch)는 모두 퀸투스 파비우스 픽토르(Quintus Fabius Pictor)를 주요 자료로 삼았다고 한다. 이 외에도 오비디우스(Ovid)의 “파스티(Fasti)”, 베르길리우스(Virgil)의 “아이네이스(Aeneid)” 등 문학 작품들도 로물루스 신화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리스 역사가들은 전통적으로 로마가 그리스인들에 의해 건국되었다고 주장했다. 기원전 5세기경의 로고그라포스(logographer) 레스보스의 헬라니코스(Hellanicus of Lesbos)는 아이네아스를 로마의 건국자로 언급했다. 로마 역사가들은 로물루스를 아이네아스의 후손으로 연결 지으며, 팔라티노 언덕에 에반더(Evander)와 그의 그리스 식민 개척자들이 세운 초기 정착촌이 있었다는 전승을 언급하기도 했다. 로마인들에게 로물루스는 단순한 왕이 아니라, 그들의 제도와 전통을 부여한 첫 번째 “로마인”이자 그들의 정체성의 핵심이었다.
로물루스에 대한 이야기는 수천 년 동안 로마인의 정체성과 로마가 지향하는 가치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비록 그가 실제 역사 속 인물이었는지 여부는 논쟁의 대상이지만, 그가 로마의 영혼 속에 영원히 살아있는 상징적인 존재임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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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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