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마 폼필리우스(Numa Pompilius, BC.c.753~672) : 로마의 종교적 기초를 다진 제2대 왕(BC.715~672)
- 누마 폼필리우스(Numa Pompilius)
- 출생 : 기원전 753년경
- 사망 : 기원전 672년
- 부친 : 폼포니우스(Pomponius)
- 배우자 : 타티아(Tatia)
- 자녀 : 폼필리아(Pompillia)
- 재위 : 기원전 715년 ~ 672년
- 전임 : 로물루스(Romulus)
- 후임 : 툴루스 호스틸리우스(Tullus Hostilius)
누마 폼필리우스(Numa Pompilius)는 로물루스(Romulus)에 이어 로마의 제2대 왕으로, 기원전 715년부터 기원전 672년까지 통치했다. 그는 로마의 가장 중요한 종교적, 정치적 제도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으며, 로마력(Roman calendar), 베스타 여신의 성녀들(Vestal Virgins), 마르스 신앙, 주피터 신앙, 로물루스 신앙, 그리고 대제사장(pontifex maximus) 직위 등을 제정했다고 전해진다. 로물루스가 로마의 군사적 기반을 다졌다면, 누마는 로마의 종교적, 법적 기초를 확립한 인물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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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마 폼필리우스의 조각상, 루브르 박물관 소장 장 기욤 무아트 작품 |
1. 출생과 계보
플루타르코스(Plutarch)에 따르면, 누마는 폼포니우스(Pomponius)의 네 아들 중 막내로, 로마가 건국된 날(전통적으로 기원전 753년 4월 21일)에 태어났다고 한다. 그는 사비니(Sabine) 출신으로, 엄격한 규율과 검소한 생활을 추구했으며, 모든 사치를 배척했다고 알려져 있다. 로물루스의 동료였던 사비니족의 왕 티투스 타티우스(Titus Tatius)는 자신의 외동딸 타티아(Tatia)를 누마와 결혼시켰다. 13년간의 결혼 생활 후 타티아가 사망하자, 누마는 시골로 은퇴했다. 리비우스(Livy)에 따르면, 누마는 왕으로 선출되기 직전 쿠레스(Cures)에 거주했다고 한다.
티투스 리비우스(Titus Livius)와 플루타르코스는 누마가 피타고라스(Pythagoras)에게서 철학을 배웠다는 이야기를 언급하지만, 시간적, 지리적으로 불가능했을 것이라며 이를 부정한다. 실제로 피타고라스는 누마보다 약 200년 후에 살았던 인물이다.
2. 왕위 계승과 통치 초기
로물루스의 사망 후, 로마는 1년간의 공위기(interregnum)를 거쳤다. 이 기간 동안 원로원(Senate)은 번갈아가며 통치했다. 결국 로마 시민들과 원로원은 누마를 새로운 왕으로 선출했다. 그러나 누마는 처음에 이 제안을 거절했다고 한다. 그는 평화롭고 조용한 삶을 살아왔기에 전쟁과 확장에 집중했던 로물루스의 뒤를 이어 통치하는 것을 꺼렸다. 하지만 로마인들과 그의 고향 사비니인들의 간청에 결국 왕위를 수락했다.
누마의 통치는 로물루스의 군사적 확장 정책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그는 평화를 추구하고, 로마의 내적 발전과 사회적 통합에 중점을 두었다. 특히 종교적 제도와 의식을 확립함으로써 로마인들에게 신성한 법칙과 도덕적 기준을 제공하고자 했다.
3. 종교적 개혁과 제도 확립
누마 폼필리우스의 가장 큰 업적은 로마의 종교적 기반을 확립한 것이다. 그는 여러 신전을 건립하고, 사제직을 제정하며, 다양한 종교 의식을 도입했다. 그의 주요 종교적 개혁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 로마력(Roman Calendar) 제정 : 누마는 10개월이었던 로물루스의 달력에 1월(January)과 2월(February)을 추가하여 12개월 달력을 완성했다. 또한 그는 종교적 축제일과 공휴일을 지정하고, 어떤 날이 종교적 의식을 행하기에 적합한지(dies fasti), 적합하지 않은지(dies nefasti)를 구분했다.
- 베스타 여신의 성녀들(Vestal Virgins) 제도 : 누마는 로마의 수호신인 베스타(Vesta) 여신을 섬기는 성녀 제도를 확립했다. 이들은 로마에서 가장 존경받는 여성들로, 30년 동안 순결을 지키며 베스타 신전의 신성한 불을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
- 대제사장(Pontifex Maximus) 직위 창설 : 로마의 모든 종교적 의식을 총괄하는 대제사장 직위를 만들었다. 이 직위는 후에 로마 공화정과 제국 시대를 거쳐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후에도 유지되었다.
- 야누스(Janus) 신전 건립 : 누마는 전쟁과 평화의 상징인 야누스 신전을 건립했다. 이 신전의 문은 로마가 전쟁 중일 때는 열려 있고, 평화로울 때는 닫혀 있었다. 누마의 평화로운 통치 기간 동안 이 문은 계속해서 닫혀 있었다고 전해진다.
- 사제단 조직 : 누마는 플라멘(Flamens), 살리이(Salii)와 같은 다양한 사제단을 조직했다. 플라멘은 특정 신을 섬기는 사제들이었고, 살리이는 군신 마르스(Mars)를 숭배하며 의례적인 춤과 노래를 수행하는 사제단이었다. 이 외에도 피에탈레스(Fetiales)라는 사제단을 만들어 전쟁 선포와 평화 협상 시 신성한 의례를 주관하도록 했다. 이는 로마의 군사적 행위에도 종교적 정당성을 부여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 큐리누스(Quirinus) 신앙 통합 : 로물루스의 신격화된 형태인 큐리누스를 로마 신화에 통합하여, 로마 건국자의 신성성을 공고히 했다.
- 에게리아(Egeria) 여신과의 교류 : 누마는 심신이 맑아질 때마다 아리치아(Aricia) 근처의 숲에 있는 동굴에서 샘의 여신 에게리아를 만났다고 전해진다. 에게리아는 그에게 신성한 법률과 지혜를 가르쳐주었고, 누마는 이를 바탕으로 로마의 법과 종교 체계를 정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전설은 누마의 지혜와 종교적 권위에 신성함을 부여하는 역할을 했다.
이러한 종교적 제도들은 로마인들에게 신성한 법칙과 도덕적 기준을 제공했으며, 도시의 안정과 사회적 통합에 기여했다. 누마는 신들의 이름으로 자신의 법률을 정당화함으로써 로마 사회에 규율과 질서를 가져왔다.
4. 평화로운 통치와 사회 개혁
누마의 통치 기간 동안 로마는 거의 전쟁을 하지 않았다. 그의 주요 목표는 로마인들의 삶을 문명화하고, 폭력적이었던 초기 로마의 분위기를 평화롭고 경건하게 바꾸는 것이었다. 그는 야누스 신전의 문을 닫아 평화의 시대를 상징했으며, 이는 그의 통치 철학을 잘 보여준다.
그는 사회적으로도 중요한 개혁을 추진했다.
- 시민들 조직화 : 로물루스 시대에는 부족에 따라 나뉘었던 로마 시민들을 직업과 기술에 따라 길드(guilds) 또는 조합으로 조직했다. 이는 직업 간의 평등을 강조하고 사회적 화합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피리 연주자, 금세공인, 목수, 염색공, 제혁공, 구리세공인, 도예공 등 다양한 직업군이 독립적인 조직을 형성했다.
- 토지 재분배 : 로물루스가 정복한 토지를 시민들에게 공정하게 분배하여 재산 불균형으로 인한 갈등을 줄이고 시민들의 생활 안정을 도모했다.
- 종교적 정화 : 그는 사치와 무절제한 생활을 금하고, 신에 대한 경외심과 겸손을 강조하며 로마인들의 도덕성을 고양시키려 했다.
이러한 개혁들은 로마 사회의 결속력을 강화하고, 질서를 확립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누마의 통치는 로마가 단순히 군사적 강국을 넘어, 체계적인 사회 시스템을 갖춘 문명 국가로 발전하는 기반을 다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5. 죽음과 유산
누마 폼필리우스는 43년간의 평화롭고 현명한 통치를 마치고 평온하게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시신은 야니쿨룸 언덕(Janiculum Hill) 기슭에 있는 돌로 만든 관 두 개에 안치되었다. 한 관에는 그의 시신이, 다른 관에는 그의 저서들이 보관되었다고 한다. 이 저서들에는 철학적 성찰, 종교적 의례에 대한 설명 등이 담겨 있었는데, 후대에 발견되어 종교적 파장을 일으킬 것을 우려하여 파괴되기도 했다.
누마의 죽음은 로마 시민들에게 깊은 슬픔을 안겨주었고, 그가 로마에 가져다준 평화와 질서에 대한 존경심은 매우 컸다. 그의 유산은 로마의 역사와 문화에 깊이 뿌리내렸다. 로마인들은 그를 단순한 왕이 아니라, 신성한 지혜를 바탕으로 로마 문명을 창조한 현인으로 기억했다.
후대의 동로마 제국(Eastern Roman Empire) 시대에도 누마 폼필리우스는 긍정적으로 기억되었다. 6세기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Justinian I)는 그의 법전을 편찬하면서 로물루스와 누마를 로마 건국의 두 축으로 보았으며, 누마를 로마를 “법률로 조직하고 발전시킨” 인물로 묘사했다. 11세기 학자 미카일 프셀로스(Michael Psellos)는 로마의 7대 왕을 평가하면서 누마를 “경건하고 평화로우며 정신적 미덕을 갖추고 모든 지혜를 사랑하는 자”라고 극찬했다. 이러한 평가는 누마 폼필리우스가 로마의 단순한 초기 통치자를 넘어, 현명하고 경건한 지도자의 전형으로서 후대에도 큰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준다.
누마의 통치는 로마가 단순한 무력 국가가 아니라, 법과 종교, 도덕을 바탕으로 한 문명 국가로 성장하는 데 필수적인 토대를 마련했다. 그의 평화주의적이고 지혜로운 리더십은 로마 역사상 가장 중요한 전환점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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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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