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스티니아누스 왕조(Justinian dynasty, AD.518~602) : 비잔티움 제국의 황금기를 이끈 역동의 시대
서기 6세기 초, 로마 제국은 동방과 서방으로 완전히 분리된 채 각자의 길을 걷고 있었다. 서로마 제국이 이미 붕괴된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동로마 제국, 즉 비잔티움 제국은 새로운 전성기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으니, 그 중심에 바로 유스티니아누스 왕조(Justinian dynasty)가 있었다. 518년 유스티누스 1세(Justin I)의 즉위로 시작하여 602년 마우리키우스(Maurice) 황제의 폐위와 포카스(Phocas)의 즉위로 막을 내린 이 왕조는 약 80여 년간 비잔티움 제국의 영광과 시련을 함께하며 제국의 역사에 가장 빛나는 한 장을 기록했다.
특히 이 왕조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Justinian I)의 통치 기간은 비잔티움 역사상 제국의 영토가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최대 범위로 확장되었던 시기였다. 북아프리카, 남부 일리리아, 남부 스페인, 그리고 이탈리아까지 재편입하며 로마 제국의 옛 영광을 되찾으려 했던 야심 찬 노력은 이 왕조의 상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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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565년, 유스티니아누스 치하의 동로마 제국 영토 |
1. 왕조의 여명 : 유스티누스 1세의 즉위 (518-527)
유스티니아누스 왕조는 518년 유스티누스 1세(Justin I, 450년대–527)의 즉위로 막을 열었다. 그는 소아시아의 베데리아나(Bederiana)라는 작은 마을 출신으로, 450년대에 태어났다. 여느 시골 청년들처럼 그는 콘스탄티노플로 상경하여 군에 입대했고, 뛰어난 신체 능력 덕분에 황제의 궁정 수비대인 익스쿠비토레스(Excubitors)에 합류했다. 이사우리아 전쟁과 페르시아 전쟁에 참전하며 공을 세운 그는 점차 승진하여 익스쿠비토레스의 사령관이 되었고, 이는 매우 영향력 있는 직책이었다. 동시에 그는 원로원 의원의 지위도 얻었다.
황제 아나스타시우스(Anastasius I Dicorus)가 명확한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황위 계승을 둘러싸고 큰 분쟁이 일어났다. 히포드롬에서 대규모 회의가 소집되었고, 원로원은 궁전의 대회의실에 모였다. 여러 후보가 거론되었지만, 여러 파벌의 반대로 모두 거부되었다. 치열한 논쟁 끝에 유스티누스가 합의된 후보로 떠올랐고, 518년 7월 10일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카파도키아의 요한(John of Cappadocia)에게 대관식을 받아 황제에 즉위했다.
라틴어 사용 지역 출신인 유스티누스는 그리스어를 거의 구사하지 못했으며, 대부분 문맹이었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능력 있는 조언자들을 주변에 두었으며, 그중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그의 조카인 유스티니아누스 1세(Justinian I)였다. 일부 역사가들, 예를 들어 프로코피우스(Procopius)는 유스티니아누스가 삼촌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사실상 ‘막후 실력자(power behind the throne)’였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유스티누스는 즉위 후 황위 경쟁자들을 제거했는데, 두 명은 처형되고 세 명은 사형 또는 추방당했다.
역대 대부분의 황제들이 단성론자(Monophysite)였던 것과 달리, 유스티누스는 독실한 칼케돈 기독교인(Chalcedonian Christian)이었다. 단성론자와 칼케돈파는 그리스도의 이중성(신성과 인성)에 대한 견해 차이로 오랫동안 갈등을 겪었으며, 이전 황제들은 단성론을 지지하여 교황의 칼케돈 가르침과 직접적으로 충돌하며 아카키우스 분열(Acacian schism)을 초래했다. 칼케돈파인 유스티누스와 카파도키아의 요한은 즉시 로마와의 관계 회복에 착수했다. 신중한 협상 끝에 아카키우스 분열은 519년 3월 말에 종식되었다.
이 초기 종교적 갈등 이후, 유스티누스의 재위는 비교적 평온했다. 525년에는 유스티니아누스의 강권에 의한 것인지, 황실 관리들이 낮은 계급의 사람들과 결혼하는 것을 사실상 금지했던 법을 폐지했다. 이는 유스티니아누스가 낮은 신분의 테오도라(Theodora)와 결혼할 수 있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재위 말년에는 제국 주변의 갈등이 고조되었다. 이탈리아 반도의 동고트 왕국(Ostrogothic Kingdom)과의 충돌이 증가했다. 동고트 왕국의 왕 테오도리크 대왕(Theodoric the Great)은 비잔티움 제국의 음모를 의심하여 로마 원로원 계층을 탄압했고, 박해를 끝내려던 철학자 보이티우스(Boethius)를 처형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테오도리크는 526년에 사망하며 박해는 끝났다. 동시에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Sasanian Empire) 역시 비잔티움과의 적대 행위를 재개하여 동부에서는 이베리아 전쟁(Iberian War)이 발발했으며, 이 전쟁은 유스티니아누스의 재위 기간에야 종식되었다. 527년, 유스티누스는 병이 위독해지자 유스티니아누스를 공동 황제로 임명했다. 유스티누스는 병에서 회복되었으나 몇 달 후 오래된 상처의 궤양으로 사망했고, 유스티니아누스가 제위에 올랐다.
2. 제국의 황금기 :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대업 (527-565)
유스티니아누스 1세(Justinian I, 482/483–565)는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 중 한 명으로 꼽힌다. 그의 통치는 ‘로마 제국의 재건’이라는 야심 찬 목표 아래 법전 편찬, 대규모 건설 사업, 그리고 옛 서로마 제국 영토의 재정복이라는 세 가지 주요 목표를 추구했다.
1) 로마법 대전 편찬(Corpus Juris Civilis)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로마법을 체계적으로 집대성한 ‘코르푸스 유리스 키빌리스(Corpus Juris Civilis)’, 즉 ‘로마법 대전’을 편찬한 것이다. 이는 로마의 수많은 법령, 학자들의 주석, 그리고 그의 새로운 법률들을 통합한 것으로, 후대 서양 법체계의 근간이 되었다. 이 법전은 혼란스러웠던 법체계를 명료화하고, 제국 전체에 걸쳐 일관된 법 적용을 가능하게 했다.
2) 대규모 건설 사업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막대한 투자를 하여 도시의 위용을 드높였다. 그의 지시로 건설된 하기아 소피아(Hagia Sophia) 대성당은 비잔티움 건축의 걸작이자 당시 세계에서 가장 웅장한 건축물 중 하나로 손꼽힌다. 또한 그는 교량, 도로, 수도교 등 기반 시설을 재건하고 확장하여 제국의 인프라를 강화했다.
3) 서로마 제국 영토 재정복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서로마 제국이 게르만족에게 넘어간 영토를 재정복하여 옛 로마 제국의 영광을 되찾으려는 원대한 야심을 품었다. 이른바 ‘렉스 아우레아(Rex Aurea, 황금 시대)’ 또는 ‘레노바티오 임페리(Renovatio Imperii, 제국 재건)’ 정책이었다.
- 반달 전쟁(533-534) : 북아프리카의 반달 왕국을 정복하기 위해 벨리사리우스(Belisarius, 505경–565) 장군을 파견했다. 짧은 전쟁 끝에 반달 왕국은 붕괴되었고, 북아프리카는 비잔티움 제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이는 막대한 경제적 이득과 함께 제국의 권위를 드높였다.
- 고트 전쟁(535-554) : 이탈리아 반도를 지배하던 동고트 왕국을 정복하기 위한 길고 치열한 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거의 20년간 지속되었으며, 이탈리아 반도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지만 결국 비잔티움의 승리로 끝났다. 이로써 이탈리아는 로마의 지배 아래로 재편입되었다.
- 스페인 남부 정복 :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에서의 성공 이후,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서고트 왕국(Visigothic Kingdom)이 지배하던 이베리아 반도 남부까지 진출하여 일부 영토를 회복했다.
이러한 정복 전쟁으로 유스티니아누스 1세 재위 기간 동안 비잔티움 제국은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가장 넓은 영토를 확보했다. 그러나 이 전쟁들은 제국의 재정에도 막대한 부담을 주었으며, 장기적으로는 제국 방어에 필요한 병력을 분산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3. 후기 유스티니아누스 왕조의 황제들
유스티니아누스 1세 사후, 그의 계승자들은 제국의 광대한 영토를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 유스티누스 2세(Justin II, 520경–578) :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조카로, 그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 그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평화 정책을 버리고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재개하여 제국에 부담을 안겼다. 또한 롬바르드족(Lombards)의 이탈리아 침공을 막지 못하여 이탈리아의 많은 부분이 상실되는 비극을 겪었다. 말년에는 정신병에 시달렸으며, 그의 아내 소피아(Sophia)와 공동 황제 티베리우스 2세(Tiberius II Constantine)가 섭정을 맡았다. [☞ 바로가기]
- 티베리우스 2세 콘스탄티누스(Tiberius II Constantine, 520경–582) : 유스티누스 2세의 후계자로, 그의 재위 기간 동안 페르시아와의 전쟁이 계속되었고, 아바르족(Avars)과 슬라브족(Slavs)의 발칸 반도 침략이 시작되었다. 그는 사치스러운 생활 방식으로 재정을 낭비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 바로가기]
- 마우리키우스(Maurice, 539–602) : 유스티니아누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로, 티베리우스 2세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그는 군사적 재능이 뛰어나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아바르족과 슬라브족의 침략에 맞서 제국을 방어했다. 그러나 엄격한 재정 정책과 군대에 대한 가혹한 대우로 인해 인기를 잃었다. 602년, 병사들의 반란으로 폐위되고 처형되었으며, 이는 유스티니아누스 왕조의 비극적인 종말을 알렸다. [☞ 바로가기]
4. 유스티니아누스 왕조의 유산
유스티니아누스 왕조는 비잔티움 제국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미래를 결정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 영토 확장과 제국 재건의 꿈 :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정복 전쟁은 비록 막대한 비용이 들었지만, 한때 서방의 심장부였던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를 수복함으로써 '하나의 로마 제국'이라는 꿈을 잠시나마 실현시켰다.
- 법률 체계의 확립 : ‘로마법 대전’은 비잔티움 법률의 기초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훗날 서유럽 법 체계 발전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쳐 로마의 법률적 유산을 전 세계에 전파하는 데 기여했다.
- 기독교와 제국의 결합 :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기독교, 특히 정통 기독교(칼케돈파)를 제국의 통일된 이념으로 확립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는 비잔티움 제국이 동방 정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독자적인 종교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 건축과 예술의 발전 : 하기아 소피아와 같은 위대한 건축물들은 비잔티움 예술과 건축의 정수를 보여주며, 이 시대의 문화적 황금기를 상징한다.
유스티니아누스 왕조는 영광과 성공으로 가득 찬 시대였지만, 동시에 과도한 전쟁과 재정 부담, 그리고 종교적 갈등의 씨앗을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이 이룬 업적은 비잔티움 제국이 천 년 이상을 더 존속할 수 있는 견고한 기반을 마련했으며, 고대 로마의 유산을 중세 시대로 이어주는 중요한 다리 역할을 했다. 이 왕조의 역사는 로마 제국의 위대한 정신이 어떻게 동방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꽃피웠는지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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