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16일 토요일

유스티누스 2세(Justin II, AD.?~578) : 동로마 제국 제62대 황제(AD.565~578)

유스티누스 2(Justin II, AD.?~578) : 동로마 제국 제62대 황제(AD.565~578)

 
  • 영문 : Justin II
  • Latin : Iustinus / Ancient Greek : Ἰουστνος / romanized : Ioustînos
  • 출생 : 미상 / 콘스탄티노플
  • 사망 : 578105/ 콘스탄티노플
  • 부친 : 둘키디오(Dulcidio) 혹은 둘키시무스(Dulcissimus)
  • 모친 : 비길란티아(Vigilantia)
  • 배우자 : 소피아(Sophia)
  • 자녀 : 유스투스(Justus), 아라비아(Arabia), 티베리우스 2(Tiberius II, 입양)
  • 재위 : 5651114~ 578105

유스티누스 2세(Justin II, AD.?~578) : 동로마 제국 제62대 황제(AD.565~578)
유스티누스 2세(Justin II, AD.?~578) : 동로마 제국 제62대 황제(AD.565~578)
 

유산과 고뇌 사이 : 동로마 제국 유스티누스 2세의 불안했던 치세 (565-578)

 
6세기 중반의 동로마 제국은 유스티니아누스 1(Justinian I, 482565) 대제 치세의 영광스러운 계승을 기대했다. 하지만 유스티니아누스가 남긴 광활하지만 과도하게 확장된 제국과 고갈된 재정은 그의 후계자에게 엄청난 부담으로 다가왔다. 이러한 도전적인 환경 속에서 황제의 자리에 올라 약 13년 동안(565578) 동로마 제국을 통치한 인물이 바로 유스티누스 2(Justin II, 사망 578)이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조카였던 그는 선대의 정책을 뒤집고 강경한 외교 노선을 추구했으나, 이는 제국을 끊임없는 전쟁과 영토 상실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는 결과를 낳았다.
 

1. 배경과 황위 계승 : 유스티니아누스 가문의 일원

 
유스티누스 2세는 578105일에 사망했으며, 정확한 출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511년 혹은 520년 이전으로 추정된다.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Constantinople)에서 태어났고, 당시 동로마 제국을 통치하던 유스티니아누스 왕조의 핵심 인물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둘키디오(Dulcidio) 또는 둘키시무스(Dulcissimus)이고, 어머니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여동생인 비길란티아(Vigilantia)이다. 따라서 유스티누스 2세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친조카가 되는 셈이다. 그는 황후 소피아(Sophia, 사망 578)와 결혼했다.
 
유스티누스는 황제에 오르기 전 유스티니아누스 1세 치하에서 쿠로팔라테스(curopalates)라는 고위 관직을 지냈고, 교황 비질리우스(Pope Vigilius)에게 파견된 사절단 일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또한 559년에는 도나우 강을 건너 후퇴하는 쿠트리구르족(Kutrigur) 습격자들을 호송했으며, 562년과 563년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블루스(Blues)와 그린스(Greens) 파벌로 인해 발생한 도시 폭동을 진압하는 데 기여하며 군사적, 행정적 경험을 쌓았다. 이러한 활동들을 통해 그는 궁정 내에서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을 구축했고, 학자 시홍 린(Sihong Lin)은 유스티누스를 정력적이고 심지어 인기가 많았던 인물로 묘사하기도 했다.
 
5651114,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자식 없이 사망하자, 황위 계승을 둘러싸고 경쟁이 벌어졌다. 유스티니아누스의 사촌인 또 다른 유스티누스(Justin, 540년 집정관)도 유력한 후보였다. 하지만 프라이포시투스 사크리 큐비쿨리(praepositus sacri cubiculi, 내실 시종장)인 칼리니쿠스(Callinicus)가 유스티니아누스가 임종 직전에 자신의 조카 유스티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했다고 주장하며 유스티누스 2세의 황위 계승을 도왔다. 현대 역사가들은 칼리니쿠스가 자신의 정치적 동맹인 유스티누스를 위해 유스티니아누스의 유언을 조작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어찌 되었든, 유스티누스 2세는 이처럼 논란 속에서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2. 초기 정책 : 강경 외교와 재정 회복의 시도

 
유스티누스 2세는 막대한 영토를 물려받았으나, 이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과도한 정복 사업과 건축 지출로 인해 재정적으로 지쳐 있었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는 540년대 유스티니아누스 역병(Plague of Justinian)의 창궐 이후, 고갈된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주변 국가들에게 보조금이나 조공을 지급하는 정책을 펼쳤다.
 
유스티누스 2세는 이러한 정책을 즉각적으로 뒤집었다. 그는 재정 부담을 줄이기 위해 조공 지급을 중단하고 주변 민족들에게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특히 사산조 페르시아(Sasanian Empire)에게 더 이상 조공을 지불하지 않을 것이며, 외교 협상 대신 군사적 우위를 통해 제국의 안전을 확보하려 했다. 이는 그의 통치 전반에 걸쳐 제국을 끊임없는 전쟁에 휘말리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는 재정 압박을 완화하기 위해 새로운 세금 징수를 시도했으나, 이는 백성들의 불만을 가중시켰다.
 
초기에는 내각 재편을 통해 재정 전문가 티베리우스(Tiberius, 574년부터 Tiberius II Constantine, 520582)를 중용하고, 시민들 앞에서 대대적인 인자함을 과시하기도 했다. 그는 전임자의 고관대작들의 빚을 탕감하고, 칙령으로 특정 유형의 채무자를 석방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여 민심을 얻으려 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그의 강경 정책은 곧바로 여러 전선에서 제국을 위협에 빠뜨렸다.
 

3. 전쟁의 시대 : 페르시아와의 충돌과 이탈리아 상실

 
유스티누스 2세의 강경한 외교 정책은 제국에 평화를 가져다주지 못했다. 오히려 여러 전선에서 동시다발적인 분쟁을 야기했다.
 
  •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572-578) : 페르시아 왕 호스로 1(Khosrow I)는 유스티니아누스 시대부터 제국에 조공을 요구하고 있었는데, 유스티누스 2세는 이 지급을 단호히 거부했다. 이는 572년 동부 국경에서 로마-페르시아 전쟁이 재개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초반에는 로마군이 아르메니아에서 일부 승리를 거두었지만, 곧이어 페르시아군이 시리아를 침공하고 주요 도시인 다라(Dara)를 함락시키는 등 제국은 큰 위기를 겪었다. 이 전쟁은 유스티누스 2세의 치세 내내 제국의 자원을 소모시켰다.
  • 이탈리아 롬바르드족의 침략(568) : 유스티누스 2세의 통치 기간 동안 가장 큰 영토 상실은 이탈리아에서 발생했다. 568, 롬바르드족(Lombards)은 동고트 왕국을 정복했던 동로마 제국의 이탈리아를 침공했다. 동로마 제국은 페르시아와의 전쟁으로 인해 이탈리아에 충분한 병력을 파견할 여력이 없었고, 결국 롬바르드족은 이탈리아 북부를 빠르게 장악하며 롬바르드 왕국을 세웠다. 로마 제국은 이탈리아 영토의 대부분을 상실했고, 이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피땀 흘려 수복했던 이탈리아를 유스티누스 2세가 사실상 상실한 결과를 초래했다.
  • 아바르족과 슬라브족의 위협 : 도나우 강 유역에서는 아바르족(Avars)이 침입하여 발칸반도를 위협했으며, 슬라브족(Slavs) 또한 발칸반도 깊숙이 침투하기 시작했다. 제국은 이들에게 막대한 조공을 바쳐야 했다. 서방의 스페인에서는 서고트족(Visigoths)과 전쟁을 벌여 제국이 얻은 이베리아반도 남부 영토도 점차 잃어갔다.
 
이처럼 유스티누스 2세의 강경한 외교 노선은 제국을 사방에서 압박하는 상황으로 몰아넣었으며, 이는 과도한 재정 지출과 영토 상실이라는 치명적인 결과를 낳았다.
 

4. 정신 질환과 소피아 황후의 영향력

 
계속되는 전쟁의 패배와 제국의 위기 속에서 유스티누스 2세의 건강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572년부터 574년경, 그는 정신 착란과 발작을 겪기 시작했고, 점차 통치 불능 상태에 빠졌다. 그의 정신 질환은 제국의 혼란을 더욱 가중시켰다. 그는 정신적 불안정으로 인해 폭력적인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의 황후 소피아(Sophia)가 제국의 실질적인 통치권을 행사하며 섭정 역할을 수행했다. 소피아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황후 테오도라(Theodora)의 조카였다. 그녀는 뛰어난 정치 감각과 단호한 의지를 지닌 여성이었고, 병든 황제를 대신하여 국정을 운영하고 제국의 안정을 위해 노력했다.
 
574, 소피아는 유스티누스 2세의 병세가 회복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황제에게 후계자를 지명하도록 설득했다. 그녀의 설득에 따라 유스티누스 2세는 티베리우스(Tiberius, 520582)를 자신의 양자로 삼고, 574127일 티베리우스를 '카이사르'로 임명하며 제국의 후계자로 삼았다. 이 행위는 유스티누스 2세 본인이 겪었던 황위 계승의 불안정성을 되풀이하지 않고, 평화로운 권력 이양을 보장하려는 시도였다.
 

5. 죽음과 유산 : 실패로 점철된 치세의 끝

 
티베리우스는 카이사르가 된 후 병든 유스티누스 2세를 대신하여 제국의 실질적인 통치권을 행사했다. 그는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지휘하고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이는 제국의 상황을 다소 안정시키는 데 기여했다. 유스티누스 2세는 578105일 사망했고, 그의 죽음과 함께 티베리우스는 티베리우스 2세 콘스탄티누스(Tiberius II Constantine)로 즉위하며 정식 황제가 되었다.
 
유스티누스 2세의 치세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 어렵다. 그의 유산은 대부분 실패와 후퇴로 점철되었다.
  • 영토 상실 :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어렵게 수복했던 이탈리아의 대부분을 롬바르드족에게 잃었으며, 스페인 영토와 발칸반도 국경도 위협받았다.
  • 재정 소모와 위기 : 그의 강경한 외교 정책은 끊임없는 전쟁을 야기했고, 이는 제국의 재정을 더욱 악화시켰다.
  • 종교적 강압 : 그는 단성론자(Monophysites)에 대한 박해를 재개하여 제국 내 종교적 분열을 심화시키고 반발을 샀다. 이는 후대에 계속될 동로마 제국 내 종교 갈등의 씨앗이 되었다.
  • 병으로 인한 통치 공백 : 말년의 정신 질환은 황제로서의 통치력을 상실하게 만들어 제국을 더욱 혼란에 빠뜨렸다.
 
일부 역사가들은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지나친 정복 사업으로 인해 이미 제국이 과도하게 확장되고 재정적으로 피폐해진 상태였기에, 유스티누스 2세가 어쩔 수 없는 난관에 부딪혔다고 옹호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강경하고 유연하지 못한 외교 정책은 제국의 위기를 오히려 심화시킨 주된 원인으로 지적된다.
 
유스티누스 2세의 치세는 유스티니아누스 시대의 막을 내리고, 동로마 제국이 7세기의 더 큰 위기 시대로 접어들기 전의 불안정한 전환기를 대표하는 시기였다. 그의 통치는 제국의 재정을 고갈시키고 국경을 약화시켜 후대 황제들에게 해결해야 할 막대한 숙제를 안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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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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