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스티누스 1세(Justin I, AD.c.450~527) : 동로마 제국 제60대 황제(AD.518~527)
- 유스티누스 1세(Justin I)
- Latin : Iustinus / Ancient Greek : Ἰουστῖνος / romanized : Ioustînos
- Justin the Thracian
- Latin : Iustinus Thrax / Ancient Greek : Ἰουστῖνος ὁ Θρᾷξ / romanized : Ioustînos ho Thrâix
- 출생 : 기원후 450년경 / 베데리아나(Bederiana)
- 사망 : 기원후 527년 8월 1일 / 콘스탄티노플
- 배우자 : 에우페미아(Euphemia)
- 자녀 : 유스티니아누스 1세(Justinian I, 입양)
- 재위 : 기원후 518년 7월 9일 ~ 527년 8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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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스티누스 1세(Justin I, AD.c.450~527) : 동로마 제국 제60대 황제(AD.518~527) |
로마 제국의 숨은 거인 : 소박한 군인에서 대황제로, 유스티누스 1세의 치세 (518-527)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 로마 제국은 커다란 변화를 겪고 있었다.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동방 로마 제국만이 유일한 로마의 계승자로 남았다. 이 시기, 동로마 제국은 내부의 정치적 불안정과 이단 문제, 그리고 끊이지 않는 외부 위협에 직면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평범한 농민 출신으로 시작하여 동로마 제국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고, 이후 '위대한 황제'로 불리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Justinian I, 482–565) 시대를 위한 중요한 발판을 마련한 인물이 바로 유스티누스 1세(Justin I, 450경 – 527)이다. 그의 재위 9년은 비록 짧았지만, 제국의 안정과 정통성을 재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 소박한 시작 : 트라키아 농부에서 근위대장까지
유스티누스는 서기 450년경 동로마 제국 영토였던 일리리아(Illyria) 지방의 작은 농촌 마을 베데리아나(Bederiana)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유피아(Upia)’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의 아들, 즉 유스티누스 바르즈니쿠스(Justin Barznikus)로 알려져 있다. 그는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고 글을 읽거나 쓸 줄도 몰랐다.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유스티누스는 어린 시절 삼촌과 함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이주하여 제국 군대에 입대했다. 그는 키가 크고 덩치가 좋았으며 군사적 능력도 뛰어났기에, 황제의 개인 경호 부대인 근위대(Excubitors)에 배속될 수 있었다. 그는 충실한 군 생활을 통해 점진적으로 승진하여 고위 장교의 반열에 올랐고, 아나스타시우스 1세(Anastasius I Dicorus, 430경 – 518) 황제의 치세 말기에는 근위대장(Comes Excubitorum)이라는 중요한 지위까지 오르게 된다.
이 시기, 유스티누스에게는 인생의 가장 중요한 인물이 나타난다. 바로 그의 조카 페트루스 사바티우스(Petrus Sabbatius)이다. 유스티누스는 그를 양자로 삼고 자신의 이름을 따 ‘유스티니아누스’로 개명하게 한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유스티누스의 보호와 지원 아래 성장하며 후일 로마 제국의 황금기를 이끄는 대황제가 될 준비를 시작했다.
2. 황위 계승 : 혼돈 속에서 빛난 기회 (518)
518년 7월 9일, 아나스타시우스 1세 황제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동로마 제국은 다시 한번 황위 계승의 혼란에 휩싸였다. 당시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궁정은 황제 사망 후의 권력 공백을 차지하려는 여러 파벌들로 들끓었다. 특히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환관 아만티우스(Amantius)는 자신의 꼭두각시를 황제로 세우려 계획했다. 그는 이사우리아(Isaurian) 출신의 군 지휘관인 테오크리투스(Theocritus)를 황제로 옹립할 생각이었고, 이를 위해 유스티누스에게 돈을 주어 근위대를 매수하도록 지시했다. 아만티우스는 근위대장 유스티누스를 쉽게 조종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유스티누스는 예상 밖의 행동을 했다. 그는 아만티우스에게서 받은 돈을 자신의 개인적인 권력 기반을 다지는 데 사용했다. 돈으로 근위대원들의 충성심을 사고, 군사력을 장악한 유스티누스는 518년 7월 10일, 근위대와 원로원의 지지를 받아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히포드롬에서 로마 제국의 황제로 즉위했다. 당시 그의 나이 68세로, 이는 비교적 늦은 나이의 즉위였다. 군사적 능력이 있었지만 글을 읽거나 쓸 줄 몰랐던 한 평범한 농민 출신이 최고 권력의 정점에 오르는 드라마틱한 순간이었다.
3. 유스티누스 1세의 치세 : 안정과 정통성의 확보 (518-527)
유스티누스 1세의 통치는 약 9년간 이어졌지만, 이 기간 동안 그는 제국의 내부적 안정을 꾀하고 외부 관계를 재정립하며 후대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개혁을 위한 굳건한 기반을 마련했다.
1) 권력 공고화 : 황제 암살 시도와 반란 진압
즉위 직후, 유스티누스는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한 숙청 작업을 시작했다. 그는 자신을 황제로 만들려 했던 환관 아만티우스와 그의 동조자들을 제거하며 황제에게 도전할 수 있는 세력을 뿌리 뽑았다. 이사우리아인 세력에 대한 숙청도 단행했는데, 이는 전임 황제 제논의 치세 동안 지나치게 막강해졌던 이사우리아 세력을 약화시키고 황제권을 강화하려는 의도였다. 이러한 숙청 작업은 때로 잔혹했지만, 새로운 황제가 제국의 모든 권력을 확고히 장악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강력한 메시지였다.
2) 종교 정책 : 동서 교회의 재통합과 이단 박해
유스티누스 1세의 치세에서 가장 중요한 종교적 성과는 ‘아카키우스 분열(Acacian Schism)’의 종식이었다. 484년 아나스타시우스 황제 시대에 시작되어 35년간 이어져 오던 로마 교황청과의 단절을 유스티누스 1세는 적극적으로 해결하려 했다. 그는 이단으로 낙인찍힌 단성론(Monophysitism)에 대한 정책을 버리고 정통 칼케돈파(Chalcedonian Christianity)를 강력히 지지했다.
그는 로마 교황 요한 1세(Pope John I)와 협력하여 교회의 통합을 추진했고, 519년에 로마 교황청과의 일치가 회복되었다. 이는 동서 교회가 교리적으로 분열되지 않고 하나였음을 보여준 중요한 상징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통일 노력은 단성론자들에 대한 강력한 박해로 이어졌고, 이들에게는 새로운 고통의 시작이었다. 유스티누스는 또한 이교도와 유대교도에 대한 박해를 지속하여 기독교가 제국 내에서 더욱 확고한 지위를 누리게 했다.
3) 대외 관계 : 페르시아 및 주변국과의 복잡한 외교
유스티누스의 치세 동안 동로마 제국은 외부와의 복잡한 관계를 유지했다. 사산조 페르시아(Sasanian Empire)는 동방 국경에서 로마 제국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었고, 두 제국은 메조포타미아(Mesopotamia) 지역에서 산발적인 충돌을 이어갔다. 그는 유능한 장군들을 국경에 배치하여 페르시아의 침입에 대비했으며, 특히 조카 유스티니아누스는 이 시기 동안 군사적 재능을 발휘하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서방에서는 동고트 왕국(Ostrogothic Kingdom)이 이탈리아를 지배하고 있었고, 그들과는 비교적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유스티누스는 동고트족의 왕 테오도리쿠스 대제(Theodoric the Great, 454–526)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했지만, 테오도리쿠스의 딸 아말라순타(Amalasuntha)의 교육 문제로 인해 일시적으로 갈등이 발생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아바르족(Avars), 슬라브족(Slavs) 등 주변 민족들과의 관계에서도 제국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정책을 펼쳤다.
4. 유스티니아누스의 부상 : 황제의 그림자에서 공동 황제로
유스티누스 1세의 치세는 조카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정치적 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시기이기도 하다. 유스티니아누스는 노령의 황제를 대신하여 실질적으로 제국의 행정을 관리하며 국정을 운영했다. 그는 유스티누스 황제의 비서관이자 조언자 역할을 하며 제국의 주요 정책 결정에 깊이 관여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강력한 정보망과 뛰어난 정치적 감각으로 궁정 내의 반대파를 효과적으로 제압하고, 이사우리아 전쟁에 직접 참전하며 군사적 경험도 쌓았다. 그는 대규모 건설 사업에 참여하고, 특히 로마법 개혁에 깊이 관여하며 자신의 능력을 입증했다. 이 시기에 유스티니아누스의 아내 테오도라(Theodora, 500경 – 548)와의 결혼도 이루어졌다.
527년 4월 1일, 유스티누스 1세의 건강이 악화되자 그는 유스티니아누스를 정식으로 공동 황제(Augustus)로 임명했다. 이는 유스티니아누스에게 황위 계승의 정통성을 부여하고, 황제 사망 시의 혼란을 방지하려는 의도였다. 약 네 달 후인 527년 8월 1일, 유스티누스 1세는 7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자신의 후계자가 될 유스티니아누스를 직접 자신의 손으로 황위에 올린 후 세상을 떠났다.
5. 유산과 영향 : 유스티니아누스 시대의 초석
유스티누스 1세는 로마 제국사에서 비교적 짧은 기간 재위했지만, 그의 영향력은 매우 지대하다.
- 동서 교회의 재통합 : 그의 아카키우스 분열 종식은 동로마 제국이 다시금 서방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기독교 세계의 통합을 시도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 재정적 안정 : 전임자 아나스타시우스 1세가 남긴 막대한 재정 흑자는 유스티누스 치세 동안 잘 유지되었으며, 이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야심찬 재정 투자와 영토 확장 전쟁을 벌일 수 있는 든든한 기반이 되었다.
-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등극 : 무엇보다도 유스티누스 1세의 가장 큰 유산은 ‘유스티니아누스 1세’를 제국 역사에 등장시켰다는 점이다. 그의 조카를 황제로 만든 결정은 단순한 개인의 승계가 아니라, 로마 제국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여는 중요한 순간이었다. 유스티니아누스의 통치는 로마 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기 중 하나로 평가되며, 유스티누스는 이 위대한 시대를 위한 안정적인 기반을 다졌다.
- 권력의 이동 : 그의 치세는 점차 군사 귀족 출신 황제에서 재상이나 행정가와 같은 비군인 출신 황제들이 등장하는 경향을 보여주었다. 그의 소박한 출신 성분은 능력만 있다면 누구든 최고 자리에 오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이기도 했다.
유스티누스 1세는 격동의 시기에 안정적인 리더십으로 제국의 기틀을 다지고, 로마 제국을 새로운 번영의 시대로 이끈 숨은 영웅이었다. 그의 삶과 치세는 한 개인이 제국의 운명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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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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