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16일 토요일

마우리키우스(Maurice, AD.539~602) : 동로마 제국 제64대 황제(AD.582~602)

마우리키우스(Maurice, AD.539~602) : 동로마 제국 제64대 황제(AD.582~602)

 
  • 영문 : Maurice
  • Latin : Mauricius / Ancient Greek : Μαυρίκιος / romanized : Maurikios
  • 출생 : 539/ 아라비수스(Arabissus)
  • 사망 : 6021127/ 콘스탄티노플
  • 부친 : 파울(Paul)
  • 배우자 : 콘스탄티나(Constantina)
  • 자녀들 테오도시우스(Theodosius, 602년 사망), 티베리우스(Tiberius, 620년 사망), 페트루스(Petrus, 602년 사망), 파울루스(Paulus, 602년 사망), 유스틴(Justin, 602년 사망), 유스티니안(Justinian, 602년 사망), 아나스타시아(Anastasia, 605년경 사망), 테오크티스타(Theoctista, 605년경 사망), 클레오파트라(Cleopatra, 605년경 사망)
  • 재위 :
    Caesar : 582년 85~ 582813
    Augustus : 582년 813~ 6021127

마우리키우스(Maurice, AD.539~602) : 동로마 제국 제64대 황제(AD.582~602)
마우리키우스(Maurice, AD.539~602) : 동로마 제국 제64대 황제(AD.582~602)
 

전사의 지혜, 통치자의 비극 : 동로마 마우리키우스 황제의 치세 (582-602)

 
6세기 후반 로마 제국은 끊임없는 외부의 압력과 내부의 재정 문제로 시험받는 시기였다. 특히 유스티니아누스 1(Justinian I, 482565) 대제가 남긴 광대한 유산은 제국에 영광만큼이나 막대한 부담을 안겼다. 이러한 난국 속에서 등장하여 탁월한 군사적 재능과 뛰어난 행정 능력을 바탕으로 제국을 안정시키고 번영을 추구했던 황제가 바로 마우리키우스(Maurice, 539602)이다. 그는 582년부터 602년까지 20년간 동로마 제국을 통치하며, ‘전사의 지혜를 담은 군사 서적인 전략론(Strategikon)의 저자로도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그의 말년은 비극적인 결말을 맞으며, 로마 역사상 가장 비운의 황제 중 한 명으로 기억된다.
 

1. 카파도키아의 젊은 전사, 황제의 눈에 들다 : 마우리키우스의 초기 생애와 황위 등극

 
마우리키우스는 서기 539, 소아시아 카파도키아(Cappadocia)의 아라비수스(Arabissus)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파울(Paul)이었고, 형제 페트루스(Peter)와 두 누이 테옥티스타(Theoctista), 고르디아(Gordia)가 있었다. 특히 누이 고르디아는 장군 필리피쿠스(Philippicus)의 아내가 되며 황실과의 인척 관계를 형성한다. 그는 모국어인 그리스어를 구사하는 사람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아나스타시우스 1(Anastasius I Dicorus, 430518) 이래로 그리스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첫 번째 황제였음을 시사한다. 당시 고대 로마인들은 카파도키아 출신 사람들을 종종 무식하다고 비하했으나, 마우리키우스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엘리트 출신임을 자처하기도 했다.
 
그의 초기 경력은 황궁의 고위 관리로 시작되었다.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노타리우스(notarius)’, 즉 황실 서기관으로 처음 들어왔다. 이때 그는 당시 동로마 제국의 군사적 실력자이자 훗날 황제가 되는 티베리우스 2세 콘스탄티누스(Tiberius II Constantine, 520582)의 비서로 일했다. 574년 티베리우스가 카이사르(Caesar)’가 되자, 마우리키우스는 티베리우스의 후임으로 황제 직속 근위대장인 코메스 엑스쿠비토룸(Comes Excubitorum)’에 임명되며 군사적 요직을 맡게 된다.
 
근위대장 마우리키우스는 유능한 군사 지휘관으로서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는 사산조 페르시아(Sasanian Persia)와의 동부 전선에서 큰 공을 세우며 티베리우스 황제의 신임을 얻었다. 티베리우스는 그의 군사적 업적에 깊이 감동하여 마우리키우스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하고, 자신의 딸 콘스탄티나(Constantina)와 결혼시켰다. 결국 582813, 마우리키우스는 아우구스투스(Augustus)’로 승격하며 공동 황제가 되었고, 불과 다음 날 티베리우스가 사망하면서 로마 제국의 단독 황제가 되었다. 그는 814일부터 813일까지 카이사르(Caesar)’였다. 이로써 평범한 군인의 아들이자 행정 관리였던 마우리키우스는 제국의 최고 통치자에 오르는 드라마틱한 삶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2. 위대한 정복과 안정화 : 마우리키우스의 군사적 업적

 
마우리키우스 황제는 자신의 군사적 재능을 바탕으로 제국의 안정과 확장을 위해 노력했다. 그의 치세는 제국에게 비교적 성공적인 군사적 성과를 안겨주었다.
 
1)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전쟁 종결(572-591) : 마우리키우스의 가장 큰 군사적 성과는 동방의 숙적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20여 년에 걸친 전쟁을 마침내 로마 제국의 승리로 종결시킨 것이다 . 그는 복잡한 페르시아의 내정에 개입하여 반란자들에게 지원을 제공했고, 결국 샤 한드로그스(Khosrow II)가 권력을 되찾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에 대한 대가로 페르시아는 로마 제국에게 아르메니아(Armenia) 북부와 이베리아(Iberia) 서부를 포함한 광대한 동방 영토를 할양했으며, 무엇보다도 제국이 페르시아에게 매년 지불하던 막대한 조공을 영구적으로 중단할 수 있었다. 이로써 로마 제국의 동방 국경은 거의 2세기 만에 최대 규모로 확장되었고, 재정적 부담도 크게 줄어들었다.
 
2) 발칸 반도 캠페인과 아바르족 격퇴 : 동부 전선이 안정되자, 마우리키우스는 이제 다뉴브 강 북쪽에서 지속적으로 제국을 위협하던 아바르족(Avars)과 슬라브족(Slavs)에 대한 관심을 돌렸다. 그는 일련의 성공적인 발칸 반도 캠페인을 통해 아바르족을 다뉴브 강 건너편으로 밀어냈고, 심지어 2세기 만에 처음으로 로마군이 다뉴브 강을 건너 야만족의 본거지를 공격하는 전례를 만들었다. 이 캠페인은 발칸반도 지역에 로마의 지배력을 다시 확고히 하는 데 기여했으며, 슬라브족의 침입을 한동안 지연시켰다.
 
3) 서방의 재편과 엑사르카투스(Exarchate) 설립 : 서방 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에도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 지역은 여전히 로마 제국의 명목상 지배 아래 있었지만, 롬바르드족(Lombards)과 기타 게르만족 세력의 침입으로 인해 통제력이 약화되고 있었다. 마우리키우스는 이 지역에 대한 제국의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해 혁신적인 행정 개혁을 단행했다. 그는 584년 이탈리아에 라벤나 엑사르카투스(Exarchate of Ravenna)’, 591년에는 북아프리카에 아프리카 엑사르카투스(Exarchate of Africa)’를 설립했다. 이 엑사르카투스들은 황제의 총독(Exarch)이 군사적, 민간 행정권을 모두 행사하는 준자율적인 형태로, 변경 지역의 방어를 강화하고 제국의 통제력을 효과적으로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 이는 동로마 제국이 서방의 남은 영토를 포기하지 않고 지중해 패권을 유지하려는 의지를 보여준 것이었다.
 

3. 전략론(Strategikon)의 저자 : 군사 사상가 마우리키우스

 
마우리키우스 황제는 단순한 군인이 아니라, 뛰어난 군사 이론가이기도 했다. 그에게 귀속되는 가장 중요한 유산 중 하나는 바로 전략론(Strategikon)이라는 군사 서적이다. 이 책은 중세 유럽과 중동의 군사 전통에 천 년 이상 영향을 미친 전쟁 교범으로, 전술, 훈련, 군사 조직, 그리고 다양한 적들에 대한 대응 전략 등 군사 전반에 걸친 실용적인 지식을 담고 있다.
 
전략론은 주로 로마군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고, 다양한 야만족(게르만족, 아바르족, 페르시아인 등)의 전투 방식에 대한 분석을 통해 그에 맞는 로마군의 대응 전략을 제시한다. 마우리키우스가 직접 저술했는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지만, 그의 치세 동안 편찬되었고 그의 군사 사상이 반영된 책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이 책은 마우리키우스가 단순히 군사적 성공만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제국의 군사력을 체계적으로 발전시키려는 깊은 통찰력을 지녔음을 보여준다.
 

4. 재정난과 불만 증폭 : 위대한 황제의 그림자

 
군사적 성공과 행정 개혁에도 불구하고, 마우리키우스의 치세는 재정적인 어려움과 백성들의 불만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시대부터 이어진 끊임없는 전쟁과 대규모 지출은 제국의 국고를 고갈시켰고, 마우리키우스는 이러한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육책을 택해야 했다.
 
그는 군사 예산을 절감하기 위해 병사들의 급여를 삭감하고, 장기간의 원정으로 지쳐 있던 군인들에게 겨울철에도 병영으로 돌아오지 않고 전선에서 숙영할 것을 명령했다. 또한, 전쟁 포로들을 몸값 없이 방치하여 병사들의 불만을 가중시켰다. 당시 로마군의 군인들은 적 포로를 잡았을 때 몸값을 받아 생계를 보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황제가 이를 금지하면서 군인들의 사기가 크게 저하되었다. 이와 더불어 엄격한 세금 징수와 새로운 세금 부과로 백성들의 불만도 커져갔다.
 
마우리키우스의 이러한 정책은 제국의 장기적인 재정 건전성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수도 있지만, 단기적으로는 군인과 민중 모두에게 큰 반감을 샀다. 그의 유능한 행정 능력과 뛰어난 군사적 통찰력은 결국 인색하다는 비판과 맞물려 그의 인기를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았다.
 

5. 포카스(Phocas)의 반란과 비극적 종말 (602)

 
마우리키우스에 대한 불만은 결국 군부의 대규모 반란으로 이어졌다. 602, 다뉴브 국경 지대에 주둔해 있던 로마군이 황제의 무리한 명령(겨울 숙영 지시)에 반발하여 폭동을 일으켰다. 이때 병사들은 백부장 출신인 포카스(Phocas, 사망 610)를 자신들의 지도자로 추대하고 그를 황제로 선포했다.
 
포카스가 이끄는 반란군은 거침없이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했다. 수도의 시민들 역시 마우리키우스의 가혹한 재정 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었기에, 포카스에게 큰 저항을 하지 않았다. 마우리키우스는 제위를 포기하고 가족들과 함께 니코메디아(Nicomedia)로 도피했으나, 결국 붙잡히고 말았다.
 
6021127, 마우리키우스는 자신의 여섯 아들들이 눈앞에서 차례로 처형되는 비극을 목도해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차례가 되었고, 그는 63세의 나이로 포카스에 의해 처형되었다. 그의 시신은 성 마마스 수도원(Saint Mamas Monastery)에 안치되었다.
 
마우리키우스의 죽음은 로마 제국, 특히 동로마 제국에게는 큰 재앙으로 다가왔다. 그의 죽음은 26년간 이어지는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새로운 대규모 전쟁의 불씨가 되었으며, 이는 양 제국 모두를 황폐화시키고 훗날 아랍의 침략에 취약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동시대 역사가 테오필락트 시모카타(Theophylact Simocatta)는 마우리키우스의 치세를 상세히 기록하며 그의 비극적인 운명을 전하고 있다.
 

6. 마우리키우스의 유산과 로마 역사에 미친 영향

 
마우리키우스의 통치기는 성공적인 군사적 정복, 혁신적인 행정 개혁, 그리고 심오한 군사 이론의 정립이라는 긍정적인 측면과, 재정적 어려움과 비극적인 죽음이라는 부정적인 측면이 교차한다.
 
  • 동서 국경의 안정화 : 페르시아와의 성공적인 평화 조약과 발칸반도 캠페인은 제국의 국경을 안정시키고 방어력을 강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 행정 개혁 : 엑사르카투스 설립은 지방 행정과 군사 통제를 효율적으로 통합한 모델로, 이는 후대 비잔티움 제국의 행정 시스템에 중요한 선례가 되었다.
  • 군사적 유산 : 전략론은 그의 군사적 천재성과 통찰력을 후대에 전파하며, 비잔티움 군사 사상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
  • 비극적 종말의 영향 : 그의 죽음은 제국에 장기간의 혼란을 가져왔지만, 동시에 그의 강경한 정책이 없었다면 제국은 더 빨리 붕괴했을 것이라는 반성적 평가도 존재한다.
 
마우리키우스는 로마 제국의 위기 속에서 제국을 지키고 번영시키려 애썼던 탁월한 황제이자 전략가였다. 그의 치세는 동로마 제국이 7세기와 8세기의 대규모 재앙을 겪기 전에 잠시 안정과 힘을 비축했던 시기로 기록된다. 비록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지만, 그의 지혜와 통치 업적은 로마 역사에 깊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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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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