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리우스 2세 콘스탄티누스(Tiberius II Constantine, AD.?~582) : 동로마 제국 제63대 황제(AD.578~582)
- 영문 : Tiberius II Constantine
- Latin : Tiberius Cōnstantīnus / Ancient Greek : Τιβέριος Κωνσταντῖνος / romanized : Tibérios Kōnstantĩnos
- 출생 : 미상 / 트라키아(Thrace)
- 사망 : 582년 8월 14일 / 콘스탄티노플
- 부친 : 유스티누스 2세(Justin II, 입양)
- 배우자 : 이노 아나스타시아(Ino Anastasia)
- 자녀 : Unknown, 차리토(Charito), 콘스탄티나(Constantina)
- 재위 :
Caesar : 574년 12월 7일 ~ 578년
Augustus : 578년 9월 26일 ~ 582년 8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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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리우스 2세 콘스탄티누스(Tiberius II Constantine, AD.?~582) : 동로마 제국 제63대 황제(AD.578~582) |
유스티니아누스 시대의 그림자에서 : 동로마 티베리우스 2세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치세 (574-582)
6세기 후반, 동로마 제국은 유스티니아누스 1세(Justinian I, 482–565) 대제가 남긴 광대한 유산과 그로 인한 재정적 부담, 그리고 사방에서 밀려오는 외부의 위협이라는 이중고를 겪고 있었다. 유스티누스 2세(Justin II, 사망 578)의 불안정한 치세가 끝나갈 무렵, 이러한 제국의 위기 속에서 새로운 희망을 품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 바로 티베리우스 2세 콘스탄티누스(Tiberius II Constantine, 520–582) 황제이다. 그는 비교적 짧은 재위 기간(574–582) 동안 선대의 실패한 정책을 만회하고 제국의 재정을 개선하려 노력했으나, 그의 사후 다시금 혼란을 예고하는 비운의 황제였다.
1. 평범한 시작 : 트라키아 출신 군인 티베리우스의 부상
티베리우스는 6세기 중반 트라키아(Thracia)의 라틴어 사용 지역에서 태어났다. 그는 그리스계 가문 출신이었으며, 정규 군인이 아닌 행정 관료로 제국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노타리우스(notarius)라는 직책을 통해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황실 행정에 발을 들였다 .
그의 삶의 전환점은 당시 동로마 제국의 핵심 인물이던 유스티누스 2세와의 인연이었다. 티베리우스는 552년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에우티키우스(Eutychius)를 통해 미래의 황제인 유스티누스 2세에게 소개되었고, 곧 그와 친분을 쌓게 된다. 유스티누스 2세의 후원 아래, 티베리우스는 565년부터 574년까지 황제의 개인 경호 부대장이자 동로마 제국의 중요한 군사 지휘관 중 한 명인 코메스 엑스쿠비토룸(Comes Excubitorum) 직책을 맡게 된다.
그는 565년 유스티누스 2세의 즉위식과 566년 그의 집정관(consul) 취임식에 모두 참석하며 황제의 측근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티베리우스는 569년, 아바르족(Avars)의 요구에 대응하기 위해 유스티누스 2세에 의해 마기스테르 우트리우스퀘 밀리티아이(Magister utriusque militiae, 육군과 기병의 총사령관)로 임명되기도 했다. 그는 아바르족과 협상을 통해 그들이 로마 영토 내에 정착하는 것을 허용하고 인질 교환을 제안했으나, 유스티누스 2세가 아바르 칸의 가족에게서 직접 인질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협상이 결렬되자 전쟁 준비에 돌입했다.
2. 황제권으로의 부상 : 카이사르에서 아우구스투스까지 (574-578)
티베리우스의 운명은 유스티누스 2세의 갑작스러운 정신 질환과 함께 극적인 전환점을 맞이한다. 574년, 유스티누스 2세는 정신적 붕괴를 겪으며 제국을 통치할 수 없는 상태에 빠졌다. 이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유스티누스 2세의 아내이자 정치적 수완이 뛰어났던 소피아 황후(Sophia, 사망 578)는 티베리우스를 불러 제국의 통치를 맡아줄 것을 요청했다. 당시 제국은 동쪽에서 사산조 페르시아(Sasanian Empire)와 전쟁 중이었고, 내부는 흑사병(Plague)으로 인한 위기에 시달리고 있었다.
티베리우스와 소피아 황후는 우선 페르시아와의 1년간 휴전 협정을 맺고, 이를 위해 45,000 솔리두스(solidi)라는 거액을 지불하며 한숨 돌릴 시간을 벌었다. 그리고 574년 12월 7일, 유스티누스 2세는 잠시 의식이 또렷해진 순간, 티베리우스를 정식으로 ‘카이사르(Caesar)’로 선포하고 자신의 양자로 삼았다. 이때 티베리우스는 자신의 이름에 ‘콘스탄티누스(Constantine)’를 추가하며 황실과의 연결을 강화했다.
비록 그는 공식적으로 카이사르가 되었지만, 유스티누스 2세가 578년에 사망할 때까지 소피아 황후의 강력한 통제하에 있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황권을 유지하려 노력했고, 티베리우스의 모든 행동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578년, 병세가 악화된 유스티누스 2세는 공식적으로 티베리우스를 ‘아우구스투스(Augustus)’로 임명하며 자신의 공동 황제로 삼았다. 유스티누스 2세는 이로부터 2주도 채 되지 않아 사망했고, 티베리우스는 로마 제국의 단독 황제가 되었다. 그는 ‘콘스탄티누스’라는 이름으로 제국을 통치했다.
3. 통치 정책과 개혁 : 관대함과 재정적 논란
티베리우스 2세 콘스탄티누스는 제위에 오른 후 선대의 정책을 뒤집으며 자신만의 통치 방식을 선보였다.
1) 관대한 통치와 재정
그는 타고난 관대함으로 널리 알려졌다. 18세기의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은 티베리우스를 백성들에게 부를 자비롭게 분배한 모범적인 황제로 평가하기도 했다. 이는 아마도 선대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와 유스티누스 2세 시대의 과도한 세금 징수에 지쳐있던 백성들에게 큰 환영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19세기 역사가 존 배그널 베리(John Bagnall Bury)는 그의 이러한 관대함이 “재정적으로 무책임하다”고 비판했다. 황제의 과도한 지출과 선물은 제국의 재정을 고갈시키고 후대 황제들에게 큰 부담을 안겨주었다는 지적이다. 티베리우스는 군인들의 급여를 늘리고, 관직 매매를 금지하는 등 제국의 재정 시스템을 개혁하려 노력했지만, 그의 타고난 관대함과 전쟁 비용이 이러한 노력을 상쇄했을 것이다.
2) 군사 정책과 외교
티베리우스의 재위 동안 제국은 여러 전선에서 외부 위협에 직면했다.
- 아바르족과의 관계 : 570년에 그는 트라키아에서 아바르족 군대를 격파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왔다. 그러나 570년 말 또는 571년 초, 다뉴브 지역에서 아바르족과의 전투에서 패배하며 간신히 죽음을 모면하기도 했다. 결국 582년에는 아바르족에게 지불하던 공물을 재개하고, 중요한 도시 시르미움(Sirmium)까지 넘겨주는 조건으로 휴전해야 했다. 이사이에 슬라브족(Slavs)의 침입은 아테네 남부까지 이르렀다.
- 페르시아와의 전쟁 : 제국은 동쪽에서 여전히 페르시아와 전쟁 중이었다. 티베리우스 2세는 유능한 장군 마우리키우스(Maurice, 539–602)를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580년, 마우리키우스는 티그리스 강 너머까지 원정을 감행했으며, 581년에는 페르시아령 아르메니아를 침공하여 거의 크테시폰(Ctesiphon)까지 도달할 뻔했다. 비록 582년 6월 콘스탄티나(Constantina) 전투에서 페르시아의 새로운 침략을 막아냈지만, 이 전쟁은 티베리우스의 통치 내내 계속되었다.
3) 종교 정책
그는 이전 유스티누스 2세 시대의 단성론(Monophysites) 박해를 대부분 중단하고, 비교적 관용적인 종교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서방의 아리우스주의(Arianism) 신자들에 대해서는 이러한 관용이 적용되지 않았다. 그는 또한 대규모 건축 사업에 많은 자금을 쏟아부었는데, 특히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대궁전(Great Palace of Constantinople)을 확장하는 데 힘썼다.
4. 죽음과 계승 : 예상치 못한 변화
티베리우스 2세 콘스탄티누스는 582년에 병에 걸려 사망했는데, 아마도 잘못 조리된 음식을 먹은 것이 원인으로 추정된다. 그가 병들자, 황위 계승 문제가 다시 제기되었다. 티베리우스는 처음에 두 명의 후계자를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각자 자신의 딸과 결혼시켰다. 마우리키우스는 콘스탄티나(Constantina)와 결혼했고,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와 연관이 있는 게르마누스(Germanus)는 카리토(Charito)와 결혼했다.
일부 역사가들은 티베리우스가 제국을 동방(마우리키우스)과 서방(게르마누스)으로 나눌 계획이었다고 믿었으나, 이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다. 결국 582년 8월 11일, 티베리우스는 자신의 법률 서명에서 마우리키우스만을 ‘카이사르’로 기록했다. 그리고 582년 8월 13일, 티베리우스는 마우리키우스를 ‘아우구스투스’로 승격시키며 공동 황제로 삼았다. 불과 다음 날인 582년 8월 14일, 티베리우스 2세 콘스탄티누스는 사망했다.
5. 가족 관계와 유산
티베리우스 2세는 젊은 시절 이노(Ino)의 딸과 약혼했으나, 이노의 딸과 남편이 사망한 후 이노와 결혼했다. 이노는 578년 티베리우스의 즉위 후 ‘아나스타시아(Anastasia)’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그들은 세 명의 자녀를 두었지만, 한 명은 티베리우스가 574년에 카이사르가 되기 전에 사망했다. 나머지 두 딸, 콘스탄티나와 카리토는 각각 마우리키우스와 게르마누스와 결혼했다. 그의 아내와 두 딸 모두 티베리우스보다 오래 살았다.
티베리우스 2세 콘스탄티누스는 키가 크고 잘생겼으며, 위엄 있는 풍채를 지녔다. 그는 개인적으로도 온화하고 인간적인 성품을 지녔으며, 관대함으로 명성이 높았다. 단성론자들을 크게 박해하지 않은 반면, 아리우스주의자들에게는 관대하지 않았다. 그는 또한 많은 건축 프로젝트에 자금을 썼는데, 특히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대궁전 확장 공사가 유명하다.
그는 유스티니아누스 왕조의 재정적 어려움 속에서 나름대로 제국의 활로를 찾으려 노력했고, 마우리키우스라는 유능한 후계자를 남겼다. 그러나 그의 관대한 재정 정책은 제국의 재정난을 심화시켜 후대 황제들에게 더 큰 부담을 안겨주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티베리우스 2세는 로마 제국의 끊임없는 변화 속에서 선대와 후대를 잇는 중요한 과도기적 황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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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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