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스타시우스 2세(Anastasius II, AD.?~719) : 동로마 제국 제74대 황제(AD.713~715)
- Anastasius II [Greek : Ἀναστάσιος / romanized : Anastásios]
- Artemius [Greek : Ἀρτέμιος / romanized : Artémios]
- 출생 : 미상
- 사망 : 719년 6월 1일 / Church of the Holy Apostles, Constantinople
- 배우자 : 이레네(Irene)
- 재위 : 713년 6월 4일 ~ 715년
8세기 로마의 혼돈 속 짧은 통치 : 비운의 황제 아나스타시우스 2세의 삶과 죽음 (713-715)
8세기 초, 동로마 제국은 ‘20년 무정부 시대(Twenty Years' Anarchy)’라 불리는 극심한 혼란과 정치적 불안정의 시기를 겪고 있었다. 695년부터 717년까지, 단 22년 동안 무려 7명의 황제가 교체될 정도로 황위는 극도로 불안정했다. 이러한 격동의 시기에 제국의 황제 자리에 올라 약 2년 동안(713–715) 동로마 제국을 통치한 인물이 바로 아나스타시우스 2세(Anastasius II, 사망 719)이다. 그의 통치는 비교적 안정과 개혁을 지향했으나, 결국 또 다른 군사 반란에 의해 막을 내리고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다.
1. 비상한 시기, 평범한 관료의 황위 등극 : 아르테미우스에서 아나스타시우스로
아나스타시우스 2세의 본명은 ‘아르테미우스(Artemius)’였다. 그의 출신이나 정확한 출생 연도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황위에 오르기 전 그는 고위 관료이자 황실 서기관(asekretis)으로 재직하며 행정 시스템에 대한 깊은 이해를 쌓았다. 이는 그가 혈통이나 순전히 군사적 기반으로 황제가 된 다른 인물들과는 다른 면모를 지녔음을 시사한다.
그가 황제에 오르게 된 배경은 당시 로마 제국의 황위가 얼마나 불안정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아르테미우스의 전임자인 필리피쿠스(Philippicus, 711–713) 황제는 자신의 독단적인 종교 정책(단일 의지론 옹호)과 무능한 대외 정책으로 군부와 민중의 불만을 사고 있었다. 결국 713년, 소아시아의 주요 테마(thema, 군관구) 중 하나인 옵시키온 테마(thema of Opsikion) 소속 군대가 트라키아(Thrace)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필리피쿠스를 폐위시키고 그의 눈을 뽑아 황위 계승 자격을 박탈했다.
이 혼란 속에서 반란군은 새로운 황제로 아르테미우스를 선택했다. 그는 713년 6월 4일, ‘아나스타시우스’라는 황제명을 사용하며 동로마 제국의 황제 자리에 올랐다. 아나스타시우스라는 이름은 제국을 안정시킨 것으로 평가받는 아나스타시우스 1세(Anastasius I Dicorus, 430경–518)를 연상시키며, 새로운 통치에 대한 기대를 불러일으키는 이름이었다.
2. 안정과 개혁의 시도 : 종교적 화합과 제국 방어력 강화
황위에 오른 아나스타시우스 2세는 전임 황제 필리피쿠스와는 달리 제국을 안정시키고 방어력을 강화하는 데 주력했다.
1) 종교 정책과 화합
아나스타시우스 2세는 필리피쿠스가 강요했던 ‘단일 의지론(Monothelitism)’을 즉각적으로 폐지하고, 정통 ‘칼케돈 공의회(Council of Chalcedon)’의 교리인 ‘두 의지론(Dyothelitism)’을 다시 제국의 공식 교리로 선포했다.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게르마누스 1세(Germanus I)를 임명하여 교회와의 관계를 정상화하고, 교황 콘스탄티누스(Pope Constantine)에게도 공의회 결정을 존중한다는 서신을 보내 동서 교회 간의 화합을 꾀했다. 이러한 정책은 제국 내 종교적 분열을 해소하고 황제에 대한 지지를 확보하는 데 기여했다.
2) 제국 방어력 강화와 외교
아나스타시우스 2세의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하나는 당시 제국을 위협하던 이슬람 우마이야 칼리파국(Umayyad Caliphate)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한 철저한 방어 준비였다. 그는 이슬람군의 다음 목표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될 것임을 예상하고 다음과 같은 조치를 취했다.
- 수도 방어 시설 재정비 :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육상 성벽과 해상 방어 시설을 보수하고 강화했다.
- 물자 비축 : 장기적인 공성전을 대비하여 식량과 군수 물자를 비축하도록 명령했다.
- 해군력 강화 : 로도스(Rhodes) 섬에 대규모 병력과 함대를 파견하여 이슬람 해군의 접근을 차단하고, 그들의 해상력을 파괴할 준비를 했다.
- 외교적 노력 : 그는 이슬람 세력과의 평화적인 해결을 모색하기 위해 다마스쿠스(Damascus)의 칼리파에게 사절을 보내 협상을 시도했으나, 이는 성공하지 못했다.
3) 반격 시도
외교적 노력이 실패하자, 아나스타시우스 2세는 공세로 전환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이사우리아(Isauria) 출신으로 훗날 레오 3세(Leo III, 717–741)가 되는 유능한 장군 레오를 동부 국경으로 파견하여 시리아(Syria) 지역의 이슬람군을 공격하게 했다. 동시에 강력한 해군을 로도스 섬으로 보내 적의 해상력을 약화시키고, 이슬람 해군이 이집트와 레반트에서 에게 해로 진입하는 것을 막으려 했다.
아나스타시우스 2세는 짧은 치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제국을 안정시키고 다가오는 거대한 위협에 대비하는 데 모든 역량을 집중했다.
3. 황위 상실과 유배 : 불운한 운명의 시작 (715)
아나스타시우스 2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통치기는 갑작스럽게 막을 내렸다. 그에게는 전임자 필리피쿠스와 마찬가지로 ‘옵시키온 테마’의 군사적 반란이 재앙이 되었다. 715년, 로도스 섬에 주둔해 있던 옵시키온 테마 소속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황제 아나스타시우스 2세의 명령에 불복하고, 그의 강압적인 훈련 방식과 훈령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반란군들은 자신들의 반란을 제압하러 온 지휘관 요한(John)을 살해하고, 엉뚱하게도 무명에 가까운 세금 징수원인 테오도시우스(Theodosius)를 황제로 추대했다. 이 인물이 바로 테오도시우스 3세(Theodosius III, 715–717)이다.
테오도시우스 3세가 이끄는 반란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했다. 수도는 약 6개월간의 긴 공성전 끝에 함락되었다. 아나스타시우스 2세는 수도가 함락되기 전 소아시아의 니카이아(Nicaea)로 도피했으나, 결국 새로운 황제 테오도시우스 3세에게 투항했다.
황제 테오도시우스 3세는 아나스타시우스 2세에게 해를 가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아나스타시우스 2세는 수도사의 신분으로 트라키아의 테살로니카(Thessalonica)에 위치한 수도원에 유폐되어 여생을 보내게 되었다. 그의 재위 기간은 1년 3개월이었으며, 715년 9월 또는 11월에 폐위되었다.
4. 황위 탈환 시도와 비극적인 최후 (719)
수도사의 삶을 살던 아나스타시우스 2세는 그러나 황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그에게 두 번째 기회가 찾아오는 듯 보였다. 717년, 테오도시우스 3세는 유능한 장군 레오(Leo, 훗날 레오 3세)가 일으킨 반란에 의해 황위에서 물러나고, 레오가 로마 제국의 황제로 등극했다. 레오 3세는 제논(Zeno, 425경–491) 이래 가장 강력한 황제 중 한 명으로 평가되며, 그의 치세는 ‘이사우리아 왕조(Isaurian dynasty)’의 시작을 알렸다.
레오 3세의 초기 통치기는 불안정했다. 717년부터 718년까지 우마이야 칼리파국은 다시금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대대적으로 공략했고, 수도는 길고 힘든 공성전을 견뎌야 했다. 이러한 혼란을 틈타 시칠리아에서도 반란이 일어나면서 레오 3세의 정권은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이 상황을 기회라고 판단한 아나스타시우스 2세는 719년, 불가르족의 칸 테르벨(Tervel)의 지원을 받아 황위 탈환을 시도했다. 그는 불가르 병력과 함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했다. 그러나 그의 기대와는 달리 수도의 성문은 열리지 않았다. 레오 3세는 이미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성전을 성공적으로 막아내며 제국 내에서 강력한 지지를 확보한 상태였다. 오히려 테르벨은 레오 3세의 설득에 넘어가 아나스타시우스 2세와 그의 동조자들을 레오 3세에게 넘겨주었다.
결국 아나스타시우스 2세는 레오 3세에게 체포되었고, 719년 6월 1일에 처형당했다.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성 사도 교회(Church of the Holy Apostles)에 안장되었다. 이로써 아나스타시우스 2세의 파란만장했던 삶은 완전히 막을 내렸다.
5. 아나스타시우스 2세의 역사적 평가와 유산 : 혼란기의 비운의 황제
아나스타시우스 2세는 8세기 초 로마 제국의 혼란을 대변하는 황제 중 한 명이다. 그의 치세는 짧았지만, 몇 가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 ‘20년 무정부 시대’의 상징 : 그의 황위 등극과 폐위, 그리고 재차 황위 탈환 시도는 이 시기 황위가 얼마나 불안정하고 예측 불가능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황제 자리는 무력과 군부의 지지에 따라 끊임없이 뒤바뀌었다.
- 개혁과 대비의 노력 : 혼란스러운 시기에도 불구하고, 그는 제국의 방어를 강화하고 이슬람의 대규모 침공에 대비하는 데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의 치세 동안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잘 방비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역할도 한몫했다고 평가된다.
- 종교적 화합의 시도 : 단일 의지론을 폐지하고 정통 교리를 재확립한 것은 제국 내 종교적 분열을 봉합하려는 긍정적인 시도였다.
- 비극적인 결말 : 그는 유능한 행정가였고 개혁적 마인드를 지녔지만, 권력 투쟁의 격류에 휘말려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그의 삶은 불안정한 시대에 한 인물이 마주해야 할 운명의 무게를 보여준다.
아나스타시우스 2세는 제국을 구원할 기회가 있었지만, 시대의 격류와 자신의 한계, 그리고 예상치 못한 배신 속에서 희생양이 된 비운의 황제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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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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