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모리아 왕조(Amorian dynasty, AD.820~867) : 혼란을 넘어 재도약을 꿈꾼 시기
1. 제국의 새로운 전환점, 아모리아 왕조의 등장
820년부터 867년까지 약 47년간 이어진 아모리아 왕조(Amorian dynasty)는 비잔틴 제국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한 시기였다. 이 왕조는 제국이 ‘20년의 무정부기’와 니케포로스 왕조의 불안정을 겪은 후, 상대적인 안정과 함께 아랍 칼리프국과의 지속적인 전쟁, 그리고 가장 중요한 종교적 변화인 ‘두 번째 성상 파괴 운동’(Second Iconoclasm)의 지속과 최종 종식을 경험했다. 아모리아 왕조는 이사우리아 왕조와 마케도니아 왕조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하며, 비잔틴 제국이 새로운 황금기로 나아가는 데 필요한 기반을 다졌다.
이 시기 제국은 내부적으로는 권력 다툼과 종교적 갈등에 시달렸지만, 동시에 강력한 군사적 리더십과 외교적 노력을 통해 아랍의 위협에 맞서 싸웠다. 특히 문화적, 지성적 부흥의 씨앗이 뿌려지기 시작하여 이후 ‘마케도니아 르네상스’(Macedonian Renaissance)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2. 시대적 배경 : 니케포로스 왕조의 불안정과 아모리아의 전조
아모리아 왕조가 시작되기 직전, 비잔틴 제국은 니케포로스 왕조(Nikephorian dynasty)의 통치 아래 혼란스러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802년 이레네 여제(Irene, 752-803)를 폐위하고 즉위한 니케포로스 1세(Nikephoros I, ?-811)는 제국의 재정을 회복하고 군사력을 강화하려 했으나, 811년 불가리아와의 전쟁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그의 뒤를 이은 스타우라키오스(Staurakios, ?-811)는 짧고 병약한 통치 끝에 황위를 동생에게 물려주었고, 미카엘 1세 랑가베(Michael I Rangabe, ?-844)는 불가리아와의 전투에서 패배한 후 군부의 압력으로 퇴위당했다.
이러한 불안정한 계승의 흐름 속에서 813년 아르메니아 출신의 유능한 장군 레오 5세(Leo V the Armenian, 775-820)가 황제에 즉위하며 이사우리아 왕조 이후의 첫 성상 파괴주의 황제 시대를 열었다. 레오 5세는 니케포로스 왕조가 완화했던 성상 파괴 정책을 다시 강화하여 ‘두 번째 성상 파괴 운동’(Second Iconoclasm)을 재개했다. 이는 제국 내부에 다시 종교적 갈등의 씨앗을 뿌렸다. 그러나 레오 5세의 강력한 통치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책에 불만을 품은 세력들이 암살을 모의했고, 820년 크리스마스 날,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던 레오 5세는 그의 신하 미카엘 2세(Michael II)가 보낸 자객들에 의해 암살당한다. 이 사건으로 레오 5세의 짧은 통치는 막을 내리고, 미카엘 2세가 즉위하며 아모리아 왕조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2. 미카엘 2세 : 아모리아 왕조의 개창과 불안정한 출발(820-829)
1) 쿠데타와 왕조의 시작
미카엘 2세(Michael II, ?-829)는 소아시아 서부 아모리아(Amorium) 출신의 장군으로, 레오 5세와 오랜 동료이자 친구였다. 그러나 레오 5세의 성상 파괴 정책과 그의 통치 방식에 불만을 품고 암살을 주도하여 스스로 황제에 올랐다. 그는 아모리아 왕조의 첫 번째 황제가 되었으나, 그의 즉위는 피로 얼룩진 쿠데타로 시작되었기에 그의 통치는 처음부터 정당성 문제와 내부 불안정에 직면했다.
2) 토마스 반란 : 내전의 위기
미카엘 2세가 즉위하자마자 직면한 가장 큰 위협은 토마스(Thomas the Slav, ?-823/824)가 이끄는 대규모 반란이었다. 토마스는 아나톨리아 테마(Anatolikon Theme)의 군사 지휘관이었으며, 레오 5세의 친한 동료이자 미카엘 2세의 오랜 친구였다. 그는 레오 5세의 암살과 미카엘 2세의 즉위에 반발하며 스스로를 폐위된 콘스탄티누스 6세(Constantine VI, 771-797)로 자칭하거나, 혹은 콘스탄티누스 5세의 죽은 아들로 가장하여 대중의 지지를 얻었다. 토마스 반란은 비잔틴 제국의 동부와 해군 대부분을 장악할 정도로 심각했으며, 821년에는 콘스탄티노플까지 포위하며 미카엘 2세의 권위를 심각하게 위협했다.
미카엘 2세는 콘스탄티노플 성벽의 굳건한 방어력과 불가리아의 크룸 칸 후계자인 오무르타그(Omurtag, ?-831)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반란을 진압할 수 있었다. 불가리아군의 개입은 비잔틴 제국에 불리한 외교적 조건을 가져올 수도 있었으나, 급박한 내전 상황에서 미카엘 2세에게는 절실한 도움이 되었다. 이 반란의 진압은 미카엘 2세가 비잔틴 제국을 장악하고 자신의 통치 기반을 확립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3) 성상 파괴 정책의 유지와 대외 정책
미카엘 2세는 레오 5세와 마찬가지로 성상 파괴주의자였으나, 그의 정책은 전임자들보다는 다소 온건했다. 그는 성상 숭배를 금지하고 이를 강제했지만, 754년 히에리아 공의회와 같은 대규모 탄압은 피했다. 대신 성상 숭배자들을 설득하고, 교회 내 신학적 논쟁을 조용히 해결하려는 접근 방식을 취했다. 그러나 로마 교황(Pope)과의 관계는 여전히 경색되었고, 서방과의 종교적 분열은 지속되었다.
대외적으로 미카엘 2세의 통치 기간 동안 비잔틴 제국은 중요한 영토를 상실했다. 824년 아랍군은 이집트를 통해 크레타 섬(Crete)을 침공하여 점령했으며, 827년에는 이프리키아(Ifriqiya, 현대 튀니지) 출신 무슬림들이 시칠리아(Sicily)를 침공하기 시작했다. 비록 비잔틴 제국이 크레타와 시칠리아를 되찾으려는 시도를 했으나, 이 두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를 결국 상실하게 되는 비극을 맞이했다. 이러한 영토 상실은 미카엘 2세의 통치에 대한 부정적인 그림자를 드리웠다.
3. 테오필로스 : 황금기적 노력과 성상 파괴 운동의 강화(829-842)
1) 재위와 개인적 특성
미카엘 2세의 아들 테오필로스(Theophilos, 800-842)는 829년에 황제로 즉위했다. 그는 유년 시절부터 아버지와 함께 공동 황제(co-emperor)로서 통치에 참여하여 권력 승계가 순조로웠다. 테오필로스는 학식이 뛰어나고 정의를 사랑하며, 개인적으로는 이슬람 문화와 과학에 깊은 흥미를 보였다. 그는 건축과 예술에 관심이 많아 콘스탄티노플의 건축물들을 화려하게 장식했으며, 직접 사법 개혁에 참여하여 ‘모두에게 정의를 구현’하려 노력했다.
2) 아랍과의 지속적인 전쟁
테오필로스의 통치 기간은 아랍 칼리프국과의 끊임없는 전쟁으로 점철되었다. 그는 강력한 군사적 지휘관으로서 아랍과의 전쟁을 통해 제국의 명예를 회복하고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으려 했다. 830년대 초, 테오필로스는 여러 차례 아랍 영토를 직접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었으며, 특히 아바스 칼리프국의 수도 바그다드 근처까지 진격하기도 했다. 이러한 승리는 비잔틴 제국의 군사적 사기를 크게 고취시켰다.
그러나 아랍 칼리프국 역시 강력한 세력이었다. 838년, 아바스 칼리프 무타심(al-Mu'tasim, 794-842)이 이끄는 대규모 아랍군은 비잔틴 제국에 대한 대대적인 침공을 감행했다. 이 침공의 정점은 테오필로스의 고향이자 아모리아 왕조의 발상지였던 아모리아의 함락이었다. 아모리아는 처참하게 약탈되고 파괴되었으며, 이는 비잔틴 제국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테오필로스는 아모리아 함락의 복수를 다짐했지만, 이내 병에 걸려 842년에 사망하면서 그의 숙원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3) 성상 파괴 운동의 강화
테오필로스는 아버지 미카엘 2세보다 더 강력한 성상 파괴주의자였다. 그는 자신의 통치 기간 동안 성상 숭배를 단호하게 탄압했으며, 특히 성상 숭배에 대한 대규모 박해를 다시 시작했다. 수도사들과 성상 숭배를 지지하는 성직자들은 감금되거나 고문당했으며, 심지어 강제로 독실한 성상 파괴주의자들의 모욕을 당하도록 강요당하기도 했다. 테오필로스는 수도원들을 폐쇄하고 성상을 파괴하는 등 성상 파괴 운동을 자신의 통치 이념의 핵심으로 삼았다. 그의 이러한 정책은 제국 내부의 종교적 분열을 심화시켰으며, 성상 숭배자들에게는 가장 암울한 시기 중 하나로 기억된다.
4) 문화적 진흥과 법률 개혁
테오필로스는 전쟁과 종교 논쟁 속에서도 문화와 법률 분야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에 새로운 궁전과 성당을 짓고, 시민들을 위한 수로를 건설하는 등 대규모 건설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특히 그의 건축물들은 동방적인 요소와 비잔틴 양식이 결합된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녔다. 또한, 그는 사법 제도 개혁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에클로가’(Ecloga) 법전을 개정하여 정의로운 재판을 구현하려 노력했다. 테오필로스의 시대는 비록 종교적으로는 어두웠지만, 문화적, 행정적으로는 훗날 마케도니아 르네상스의 기반을 다진 중요한 시기였다.
4. 미카엘 3세 : 아모리아 왕조의 절정, 그리고 종말(842-867)
[참고] 미카엘 3세 【☞ 바로가기】
1) 어린 황제의 즉위와 섭정 통치
테오필로스가 사망하자 그의 어린 아들 미카엘 3세(Michael III, 838-867)가 842년에 황제로 즉위했다. 그의 나이 불과 4살이었다. 따라서 실질적인 권력은 그의 어머니 테오도라 황후(Empress Theodora, 815경-867 이후)와 재상 테옥티스토스(Theoktistos, ?-855)를 중심으로 한 섭정 위원회에 있었다. 섭정 위원회는 불안정한 제국을 안정시키기 위한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했다.
2) 성상 숭배의 최종 복원(843년) : 정교회 승리의 날
섭정 통치 기간 중 가장 중요하고 역사적인 사건은 ‘성상 숭배의 최종 복원’이었다. 미카엘 3세의 어머니 테오도라 황후는 독실한 성상 숭배자였다. 그녀와 테옥티스토스는 843년 3월 11일, 성상 파괴 운동을 종식시키고 성상 숭배를 공식적으로 복원하는 ‘정교회 승리의 날’(Triumph of Orthodoxy)을 선포했다. 이는 콘스탄티노플에서 대규모 행사를 통해 기념되었으며, 이후 매년 정교회의 중요한 축일로 지켜지게 되었다. 이로써 1세기 이상 지속된 비잔틴 제국의 종교적 대립은 일단락되었고, 제국 내부는 종교적 안정기를 맞이했다. 성상 숭배의 복원은 교황권과의 관계 개선에도 기여했다.
3) 섭정 체제의 붕괴와 미카엘 3세의 친정
미카엘 3세는 성장하면서 어머니와 재상 테옥티스토스의 섭정 통치에서 벗어나 자신의 권력을 확립하려 했다. 855년, 그는 테옥티스토스를 암살하고 이듬해 어머니 테오도라 황후마저 축출하며 실질적인 통치를 시작했다. 미카엘 3세는 점차 방탕한 생활과 향락에 빠져들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유능한 군사적 지휘관이자 지성적인 통치자였다는 재평가를 받기도 한다.
4) 군사적 재부흥과 마케도니아 르네상스의 서곡
미카엘 3세의 통치 기간 동안 비잔틴 제국은 군사적으로 중요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직접 아랍과의 전쟁에 참여하여 860년, 아랍 침공에 맞서 중요한 승리를 거두었다. 또한, 불가리아의 영향력 확대에 대한 압박을 가하여 불가리아의 보리스 1세(Boris I, ?-907)를 기독교로 개종시키고 비잔틴 문화권으로 편입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는 비잔틴 제국의 외교적, 종교적 승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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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리아의 기독교화 이후인 서기 864년의 비잔틴 제국 |
미카엘 3세는 또한 문화적, 지성적 부흥을 강력하게 지지했다. 그는 폐쇄되었던 콘스탄티노플 대학을 재건하고, 학자들을 후원하여 고전 문학과 철학 연구를 장려했다. 이는 이후 비잔틴 제국의 황금기인 ‘마케도니아 르네상스’(Macedonian Renaissance)의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특히, 총대주교 포티오스 1세(Photios I, 810-893)와 같은 당대 최고의 지성인을 등용하여 학문적, 종교적 발전을 이끌었다.
5) 포티오스 분열(Photian Schism)과 서방과의 관계 악화
그러나 미카엘 3세의 통치 기간 동안 로마 교황권과의 관계는 ‘포티오스 분열’(Photian Schism)이라는 중요한 사건으로 인해 다시 악화되었다. 미카엘 3세는 이그나티오스(Ignatius, 799-877) 총대주교를 폐위하고 평신도였던 학자 포티오스 1세를 새로운 총대주교로 임명했다. 로마 교황 니콜라스 1세(Pope Nicholas I, ?-867)는 이그나티오스의 폐위와 포티오스의 임명 절차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며 포티오스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 사건은 로마 교황의 우월권 주장과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독립성 주장 사이의 갈등을 심화시켰고, 훗날 동서 교회의 분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6) 미카엘 3세의 비극적인 종말
미카엘 3세는 말년에 바실리우스 1세(Basil I, 811경-886)를 신뢰하여 궁정에서 중요한 위치를 부여했다. 그러나 바실리우스 1세는 점차 권력을 탐했고, 866년에는 미카엘 3세의 삼촌이자 유력한 경쟁자였던 바르다스(Bardas)를 암살하는 데 가담했다. 이듬해인 867년, 바실리우스 1세는 미카엘 3세마저 암살하고 스스로 황제에 오르며 마케도니아 왕조(Macedonian dynasty)를 개창했다. 이로써 아모리아 왕조는 미카엘 3세의 죽음과 함께 막을 내렸다.
5. 아모리아 왕조 시대의 사회경제적 변화와 특징
아모리아 왕조는 비잔틴 제국이 여러 가지 중요한 사회경제적 변화를 겪은 시기였다. 특히 두 가지 주목할 만한 변화가 있었다.
1) 봉건제 유사 시스템의 출현
아모리아 왕조 시대에 비잔틴 제국은 서유럽의 봉건제와 유사한 시스템이 점진적으로 형성되는 경향을 보였다. 이는 특히 ‘두 번째 성상 파괴 운동’ 시기에 두드러졌다. 제국은 지방의 대규모 토지 소유자(large landholders)들이 더욱 강력해지는 현상을 경험했다. 이들은 중앙 정부에 군사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대가로 토지를 받거나, 자체적으로 군사력을 보유하여 지방의 지배력을 강화했다.
이러한 시스템은 고대 로마 제국에서도 존재했던 형태였다. 예를 들어, 3세기 로마 황제 세베루스 알렉산더(Severus Alexander, 208-235)의 재위 이래 로마 군인들과 그 후손들에게는 황제에 대한 복무를 조건으로 토지가 지급되었다. 비잔틴 제국에서도 이러한 형태의 토지 지급과 군사적 의무가 결합된 형태가 다시 나타났는데, 이는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고 지방의 자립적인 군사력을 필요로 하는 시대적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변화는 훗날 비잔틴 사회의 사회경제적 구조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2) 지성적 활동의 부활
성상 파괴 운동이 종식된 미카엘 3세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비잔틴 제국은 지성적 활동의 중요한 부흥기를 맞이했다. 이는 주로 미카엘 3세와 그의 학자들, 특히 총대주교 포티오스 1세의 후원에 힘입은 바가 컸다. 콘스탄티노플 대학의 재건은 학문 연구와 고전 그리스 문학 연구를 장려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시기의 지성적 부흥은 비잔틴 제국이 고대 그리스-로마의 유산을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중요한 통로가 되었으며, 훗날 10세기 ‘마케도니아 르네상스’라는 문화적 황금기로 이어지는 토대가 되었다.
이 시기 비잔틴 학자들은 고대 문헌을 필사하고 주석을 달았으며, 철학, 수학, 천문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연구를 심화시켰다. 이러한 지성적 활력은 제국의 문화적 역량을 강화하고, 종교적 혼란기를 벗어나 새로운 활력을 찾는 데 기여했다.
6. 결론 : 아모리아 왕조의 유산과 비잔틴 제국의 재도약
아모리아 왕조는 비잔틴 제국 역사에서 짧았지만, 그 영향력은 지대했다. 미카엘 2세의 불안정한 출발, 테오필로스의 강력한 군사적 노력과 문화적 진흥, 그리고 미카엘 3세 시기의 성상 숭배 복원과 지성적 부흥은 제국의 운명을 바꾼 중요한 사건들이었다.
아모리아 왕조는 아랍과의 지속적인 전쟁 속에서도 제국의 국경을 수호하고, 종교적 안정기를 찾아냄으로써 제국의 기반을 굳건히 했다. 특히 성상 파괴 운동의 최종 종식은 제국 내부의 오랜 종교적 갈등을 해소하고, 대외적으로는 로마 교황권과의 관계 개선의 가능성을 열었다(물론 포티오스 분열로 다시 경색되기도 했지만). 이 시기에 봉건제와 유사한 시스템이 출현하고 지성적 활동이 부활한 것은 비잔틴 사회의 변화와 발전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비록 아모리아 왕조는 미카엘 3세의 비극적인 죽음과 함께 막을 내렸지만, 그들은 이후 등장할 마케도니아 왕조의 황금기를 위한 중요한 발판을 마련했다. 아모리아 황제들은 불안정한 시기에 제국을 이끌고 개혁을 추진하며, 비잔틴 제국이 중세 시대의 강력한 문명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필요한 기틀을 제공했다. 그들의 유산은 제국의 회복 탄력성과 끊임없이 변화하는 역사적 흐름 속에서 생존하고 번영하려는 비잔틴의 강인한 의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로 남아있다. 아모리아 왕조는 단순한 과도기가 아니라, 비잔틴 제국이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기 위한 필수적인 징검다리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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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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