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17일 일요일

바실리우스 1세(Basil I, AD.c.811~886) : 동로마 제국 제89대 황제(AD.867~886)

바실리우스 1(Basil I, AD.c.811~886) : 동로마 제국 제89대 황제(AD.867~886)

 
  • 바실리우스 1(Basil I, nicknamed “the Macedonian”)
  • [Greek : Βασίλειος Μακεδών / romanized : Basíleios ō Makedṓn]
  • 출생 : 811년경
  • 사망 : 886829
  • 부친 : Bardas/Constantine
  • 모친 : Pankalo
  • 배우자 : Eudokia Ingerina, Maria
  • 자녀 : Constantine, Alexander, Leo VI, Patriarch Stephen I
  • 재위 : 867924~ 886829
  • 대관식 : 877526(공동 황제)
  • 공동 통치 :
    Constantine : 868~879년
    Leo VI : 870~886년
    Alexander : 879~886년
 
파리 그레고리 사본에 있는 바실리오스 1세의 밑그림 (약 879–883년경)
파리 그레고리 사본에 있는 바실리오스 1세의 밑그림 (약 879883년경)
 

1. 바실리우스 1세 황제 : 미천한 탄생, 위대한 업적의 비잔틴 통치자

 
바실리우스 1(Basil I, 811년경886829)867년부터 886년까지 비잔틴 제국을 통치했던 황제였다. 그는 마케도니아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렸으며, 비잔틴 역사상 가장 중요한 시기 중 하나인 마케도니아 왕조(Macedonian dynasty)의 창시자이기도 했다. 그의 재위 기간은 비잔틴 제국이 군사적, 법적, 문화적으로 부흥하는 마케도니아 르네상스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미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황제의 자리에 오르기까지의 그의 삶은 극적인 변화와 권력 투쟁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2. 미천한 시작과 황실 입성

 
바실리우스 1세는 테마(군관구) 마케도니아의 아드리아노폴리스(Adrianople) 지역에서 811년경에 아르메니아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와 가족은 불가리아인에 의해 마케도니아 지역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836년 비잔틴 영토로 탈출해 정착했다고 전해진다. 바실리우스는 강인한 육체와 대단한 의지를 가진 인물로 성장했다. 그는 수도 콘스탄티노플에서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생계를 유지했고, 말 훈련에 능숙하여 미카엘 3(Michael III, 840867) 황제의 시종으로 발탁되었다. 타고난 카리스마와 충성심으로 그는 빠르게 황제의 총애를 얻었으며, 황제의 경호 책임자인 수석 시종(parakoimomenos)’ 직위에 오르게 된다.
 

3. 권력의 길 : 미카엘 3세와의 관계

 
바실리우스는 미카엘 3세 황제의 궁정에서 그의 가장 가까운 동반자이자 조언자 역할을 수행했다. 미카엘 3세는 학식 있는 카이사르 바르다스(Bardas, 9세기)에게 크게 의존했지만, 점차 바르다스의 영향력을 경계하게 된다. 이 틈을 타 바실리우스는 황제의 신임을 바탕으로 바르다스를 제거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866, 그는 미카엘 3세의 명령 혹은 묵인 하에 바르다스를 암살했고, 그 해 526일 바실리우스는 공동 황제(Basileus)로 임명된다. 이는 미카엘 3세가 자신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고, 새로운 동맹을 통해 안정화를 꾀하려는 시도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이는 결국 미카엘 3세 자신의 몰락을 초래했다.
 
바실리우스는 공동 황제가 된 후에도 미카엘 3세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미카엘 3세의 무책임한 행동과 부적절한 언행에 점차 환멸을 느끼기 시작했다. 또한, 미카엘 3세가 자신을 새로운 황제로 교체할 계획이라는 소문이 돌자, 바실리우스는 선제적인 행동을 취하기로 결심한다. 867924일 밤, 바실리우스는 자신의 추종자들과 함께 궁정을 습격하여 미카엘 3세를 암살하고 단독 황제로 즉위했다.
 

4. 군사적 업적 : 동서양에서의 확장

 
바실리우스 1세는 군사적 재능이 뛰어난 황제였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비잔틴 제국은 여러 전선에서 상당한 군사적 성공을 거두었다.
 
  • 동부 전선 : 아랍에 대한 공격적인 정책을 추진하여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서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고 비잔틴의 동부 국경을 안정화했다. 특히 킬리키아(Cilicia)와 메시소포타미아(Mesopotamia) 지역에서 중요한 승리를 거두었다. 이 지역들에서 이슬람 세력의 주요 도시들을 점령하고 요새화했으며, 제국의 영향력을 확대했다.
  • 서부 전선 : 남부 이탈리아에서의 비잔틴 영향력 회복에 힘썼다. 그는 군사 작전을 통해 이탈리아 반도 내의 아랍 세력을 약화시키고, 달마티아(Dalmatia) 해안 지역에 대한 제국의 통제력을 강화했다. 그는 베네치아(Venice)와 라구사(Ragusa)의 함대를 이용하여 아드리아 해에서 사라센 해적들을 물리치고 이 지역 무역로의 안전을 확보하는 데 기여했다. 특히 876년에는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바리(Bari)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으며, 이는 남부 이탈리아에서의 비잔틴 세력의 중요한 거점을 확보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탈리아 남부에서는 카라브리아(Calabria)와 아풀리아(Apulia) 지역이 다시 비잔틴 제국의 통치 아래 들어왔고, 제국의 행정 체제가 재편되었다.
 
바실리우스는 뛰어난 군사 지휘관이자 전략가였으며, 그의 군사적 성공은 마케도니아 왕조 시대의 번영을 위한 기반을 다졌다.
 

5. 종교 정책과 포티오스 대주교

 
바실리우스 1세의 통치 기간 동안 교회와 관련된 가장 중요한 사건은 포티오스 대주교(Photius of Constantinople, 810/820893) 문제였다. 포티오스는 미카엘 3세 시대에 학식과 지성을 겸비한 뛰어난 인물로, 논란 끝에 콘스탄티노플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로마 교황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동서 교회 간의 포티오스 대분열(Photian Schism)’이 발생했다.
 
바실리우스는 즉위 후 정치적 안정과 로마 교회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포티오스를 해임하고, 전임 대주교였던 이그나티우스(Ignatius of Constantinople, 799877)를 복권시켰다. 이 조치는 로마 교황의 환영을 받았으며, 869년에는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포티오스의 해임과 이그나티우스의 복권을 공식화했다. 그러나 이그나티우스가 사망하자, 바실리우스는 정치적 필요에 따라 다시 포티오스를 대주교로 임명했다. 이는 동방 교회의 안정을 도모하고, 포티오스의 뛰어난 학식과 행정 능력을 활용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이로 인해 한동안 로마 교회와의 관계는 다시 경색되기도 했다.
 
결국, 바실리우스는 죽기 직전 포티오스를 다시 해임시키고 그의 아들 스테파노스 1(Stephen I of Constantinople, 867893)를 대주교로 앉혔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황제가 교회의 문제에 깊이 개입하며 자신의 정치적 목표에 따라 종교 지도자를 임명하고 해임할 수 있었던 비잔틴 황제의 강력한 권력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6. 법률 개혁 : 바실리카 법전

 
바실리우스 1세는 비잔틴 법률을 정비하고 개혁하는 데 큰 관심을 보였다. 그는 오랜 시간 동안 쌓여왔던 복잡한 로마 법률 체계를 현대화하고 재편하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 이 작업의 결실이 바로 후대의 바실리우스 왕조 황제들에 의해 완성된 바실리카(Basilica)’ 법전이다. 비록 바실리카 법전 자체는 그의 통치 이후에 최종적으로 완성되었지만, 그 기초는 바실리우스 1세의 명령으로 시작된 법률 개정 작업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이전 황제들이 제정한 법률들을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중복되거나 모순되는 부분을 제거하여 더욱 명확하고 실용적인 법전을 만들고자 했다. 이러한 노력은 비잔틴 제국의 법률 시스템을 강화하고, 행정의 효율성을 높이며, 사법 정의를 실현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바실리카 법전은 이후 수세기 동안 비잔틴 제국의 주요 법전으로 사용되었으며, 비잔틴 법학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7. 경제 및 행정 정책

 
바실리우스 1세는 재위 기간 동안 제국의 재정 상황을 안정시키고 경제를 부흥시키는 데 노력했다. 그는 세금 제도를 합리화하고 부패를 척결하여 국가 수입을 늘렸다. 또한, 농업을 장려하고 상업 활동을 지원하여 경제 성장을 촉진했다. 그의 정책 덕분에 비잔틴 제국의 경제는 활력을 되찾았으며, 이는 군사적 성공과 법률 개혁의 재정적 기반이 되었다.
 
행정 측면에서도 바실리우스는 효율적인 통치를 위해 노력했다. 그는 중앙 정부의 통제력을 강화하고 지방 행정을 감독하여 제국 전역의 질서와 안정을 유지했다. 이러한 노력은 제국의 내부 결속을 다지고, 외세의 침략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
 

8. 가족과 계승

 
바실리우스 1세는 두 번 결혼했다. 첫 번째 부인은 마케도니아 지역의 여성으로 추정되는 마리아(Maria, 생몰년 미상)였으며, 이 결혼에서 딸 아나스타시아(Anastasia, 생몰년 미상)를 두었다. 두 번째 부인은 미카엘 3세의 정부였던 에우도키아 인게리나(Eudokia Ingerina, 9세기)였다. 바실리우스는 에우도키아와 결혼하기 위해 첫 번째 부인을 강제로 수녀원에 보내기도 했다.
 
에우도키아 인게리나는 레오 6(Leo VI the Wise, 866912)와 알렉산드로스(Alexander, 870913), 그리고 콘스탄티노플 대주교 스테파노스 1(Stephen I of Constantinople, 867893) 등 세 아들을 낳았다. 이들 중 레오 6세와 스테파노스 1세의 생몰년은 바실리우스 1세와 에우도키아 인게리나의 결혼 시기보다 이전이거나 직후이기 때문에, 이들의 친부가 미카엘 3세라는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바실리우스는 공식적으로 이들을 자신의 아들로 인정하고 황위 계승자로 삼았다. 특히 레오 6세는 바실리우스 1세의 뒤를 이어 제국을 통치하게 되며, 그의 법률 개혁 작업을 완성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말년에 바실리우스 1세는 아들 레오 6세와의 관계에서 갈등을 겪었다. 레오 6세는 포티오스 대주교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바실리우스 1세는 포티오스를 신뢰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부자간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886년 사냥 중 발생한 사고로 심한 부상을 입은 바실리우스 1세는 아들을 의심하며 829일에 사망했다.
 

9. 유산과 역사적 평가

 
바실리우스 1세는 비잔틴 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황제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통치는 마케도니아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제국의 황금기를 열었다. 그는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제국의 영토를 확장하고 안정시켰으며, 법률 개혁을 통해 제국의 행정 시스템을 개선했다. 또한, 경제 부흥과 문화적 발전을 위한 기반을 다졌다.
 
미천한 출신에도 불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라 비잔틴 제국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은 그의 삶은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비록 권력을 잡는 과정에서 폭력과 암살이라는 그림자가 있었지만, 그의 업적은 비잔틴 제국이 이후 몇 세기 동안 번영할 수 있는 강력한 토대를 마련했다. 그의 마케도니아 왕조는 이후 200여 년간 비잔틴 제국을 통치하며 제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따라서 바실리우스 1세는 단순한 왕조의 창시자를 넘어, 비잔틴 제국의 장기적인 발전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위대한 통치자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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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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