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17일 일요일

테오필로스(Theophilos, AD.c.812년~842) : 동로마 제국 제87대 황제(AD.829~842)

테오필로스(Theophilos, AD.c.812~842) : 동로마 제국 제87대 황제

 
  • 테오필로스(Theophilos)
  • [Greek : Θεόφιλος / romanized : Theóphilos, Theophilus]
  • 출생 : 812년 말에서 813년 초 사이
  • 사망 : 842120
  • 부친 : 미카엘 2(Michael II)
  • 모친 : 테클라(Thekla)
  • 자녀 : 콘스탄틴(Constantine), 테클라(Thekla), 안나(Anna), 아나스타시아(Anastasia), 풀케리아(Pulcheria), 마리아(Maria), 미카엘 3(Michael III)
 
요한네스 스킬리체스 연대기(John Skylitzes, Synopsis of Histories) 속 테오필로스 황제
 

1. 테오필로스 황제 : 성상 파괴의 마지막 옹호자와 비잔틴의 격동기

 
테오필로스(Theophilos, 812년경842120)는 비잔틴 제국의 중요한 통치자로, 829년부터 842년 죽을 때까지 황제로 재위했다. 그는 아모리아 왕조의 두 번째 황제이자 성상 파괴주의(Iconoclasm)를 지지한 마지막 황제였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의 재위 기간은 제국 안팎으로 많은 도전과 변화가 있었던 격동의 시기였다.
 

2. 즉위와 초기 위협

 
테오필로스는 황실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그의 아버지 미하일 2(Michael II, 770/775-829)가 통치하던 시기인 821512일에 공동 황제로 즉위했으며, 829년 단독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황위에 오른 직후, 그는 두 가지 중대한 위협에 직면했다. 하나는 소아시아 지역의 아바스 왕조(Abbasid Caliphate)였고, 다른 하나는 시칠리아 지역의 아글라브 왕조(Aghlabids)였다. 이 두 이슬람 세력은 비잔틴 제국의 국경을 끊임없이 위협하며 제국에 큰 부담을 안겨주었다.
 

3. 이슬람과의 전쟁과 아모리움 함락

 
테오필로스는 831년부터 아바스 왕조와 아글라브 왕조에 맞서 직접 군대를 이끌고 길고 힘든 전쟁을 벌였다. 그는 몇몇 순간적인 승리를 거두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이슬람 세력의 강력한 반격에 직면했다. 특히 칼리프 알-무타심(al-Mu'tasim, 재위 833842)의 보복은 제국에 치명적이었다. 838년에 발생한 아모리움(Amorion) 약탈은 테오필로스에게 가장 굴욕적인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아모리움은 그의 아모리아 왕조의 조상들의 고향이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비록 제국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주었지만, 이후 칼리프 왕조 내부의 분열이 비잔틴 제국이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전쟁은 여러 전선에서 동시에 진행되었다. 시칠리아에서는 831년 팔레르모가 1년간의 포위 끝에 함락되었고, 시칠리아 에미르국이 세워지면서 이슬람 세력이 섬 전체로 점차 확대되었다.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 알-마문(al-Ma'mun, 재위 813833)830년에 카파도키아를 침공하여 티아나를 점령했다. 테오필로스는 모프수에스티아와 타르소스를 공격했지만, 이에 대한 알-마문의 보복이었다. -마문은 831년과 832년에도 연이어 원정을 단행하며 국경 요새인 룰론을 점령했다. 하지만 833년에는 아모리온 점령에 실패했다. 카파도키아에서의 또 다른 패배 후, 테오필로스는 알-마문의 죽음 이후인 834년에 평화 협상을 체결했다. 이 협상을 통해 그는 10만 금 디나르의 공물을 바치고 7천 명의 포로를 돌려받아야 했다. 이후 알-마문의 형제이자 후계자인 알-무타심은 티아나를 포기하기도 했다.
 

4. 정의로운 통치자와 건축 사업

 
전쟁의 어려움 속에서도 테오필로스는 정의로운 통치자로서의 명성을 확고히 했다. 심지어 그에게 적대적이었던 아모리아 왕조에 대한 연대기에도 그의 정의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레오 5(Leo V the Armenian, 재위 813820) 황제처럼, 그는 백성에게 가까이 다가가 관리들의 불의로부터 그들을 보호하려 노력했다고 평가된다.
 
그는 레오 5세나 미하일 2세보다 훨씬 적극적인 건축 및 재건 사업의 후원자였다. 콘스탄티노플 성벽과 해상 성벽을 강화했고, 하자르(Khazar) 지역의 돈 강변에 사르켈(Sarkel) 요새를 건설했으며, 체르손(Cherson)과 찰디아(Chaldia) 테마()를 신설했다. 또한, 비잔틴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존재했던 병원을 세우기도 했다. 그의 이름은 콘스탄티노플 성벽의 비문에서 다른 어떤 황제보다도 자주 언급될 정도로, 그의 건설 의지는 강력했다.
 
테오필로스의 가장 가까운 동맹 중 한 명은 학식이 깊고 국제적인 존 더 그래머리언(John the Grammarian)이었다. 두 사람은 칼리프 왕조와의 관계를 개선하고 아랍 문화를 높이 평가했다. 또한, 그는 세르비아 공국에 대한 명목상의 종주권을 확보하여 공통의 적이었던 제1차 불가리아 제국에 대항하기도 했다 .
 

5. 가족 관계와 계승

 
테오필로스는 83065일에 황후 테오도라(Theodora)와 결혼했다. 이는 의붓어머니인 에우프로시네(Euphrosyne, 9세기경)의 조언 또는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테오필로스와 테오도라 사이에는 두 명의 아들과 다섯 명의 딸을 포함해 총 일곱 명의 자녀가 있었다.
 
자녀들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
  • 테클라(Thekla, 831년경867년 이후) : 미하일 3세에 의해 가스트리아로 유배되었으나 866년 바실리우스 1세 황제(Basil I)의 연인이 되었다.
  • 안나(Anna, 832년경 출생)
  • 아나스타시아(Anastasia, 833년경 출생)
  • 콘스탄티노스(Constantine, 834년경835년경) : 블라헤르나에 저수지에서 익사했다.
  • 마리아(Maria, 835년경839년경) : 836년 카이사르 알렉시오스 모셀레(Alexios Mosele)와 약혼했다.
  • 풀케리아(Pulcheria, 836년경839년경)
  • 미하일 3(Michael III, 840867) : 테오필로스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
 
에우프로시네는 결혼 후 가스트리아 수도원으로 은퇴했으나, 그곳에서 테오도라와 협력하여 딸들에게 성상 파괴주의자인 테오필로스의 뜻과는 다르게 성상 숭배를 가르쳤다. 857, 아들 미하일 3세는 어머니 테오도라와 누이들을 가스트리아로 유폐하여 수녀가 되게 했다.
 

6. 테오필로스의 유산

 
테오필로스 황제는 그의 재위 기간 동안 이슬람 세력과의 끊임없는 전쟁, 성상 파괴주의의 마지막 옹호라는 종교적 입장, 그리고 대규모 건축 사업으로 비잔틴 제국의 역사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그는 비록 모든 전쟁에서 승리하지는 못했지만, 제국의 방어를 위해 헌신했고,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을 강화하는 등 중요한 인프라를 구축했다. 또한, 법과 정의를 중시하는 통치자로서 백성들에게 긍정적인 인상을 남겼으며, 그의 정의로운 이미지는 후대 문학 작품인 티마리온(Timarion)에도 반영되어 지하 세계의 심판자 중 한 명으로 등장할 정도였다. 그의 통치는 다음 세대의 황제 미하일 3세의 시대와 마케도니아 왕조의 번영을 위한 중요한 기반을 마련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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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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