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17일 일요일

미카엘 3세(Michael III, AD.840~867) : 동로마 제국 제88대 황제(AD.842~867)

미카엘 3(Michael III, AD.840~867) : 동로마 제국 제88대 황제(AD.842~867)

 
  • 미카엘 3(Michael III)
  • [Ancient Greek : Μιχαήλ / romanized : Michaḗl]
  • 주정뱅이”(Michael the Drunkard)
  • 출생 : 84019/10
  • 사망 : 867924
  • 배우자 : 에우도키아 데카폴리티사(Eudokia Dekapolitissa)
  • 자녀 : 레오 6(Leo VI, 스테판 1(Stephen I of Constantinople)
  • 재위 : 842120~ 867924
  • 대관식 : 804516
  • 공동통치 :
    테오필로스 : 840~842
    테오도라 : 842~856(섭정)
    테클라 : 842~856(공동 황후)
    바르다스 : 862~866(Caesar)
    바실 1: 866~867(공동황제)
 
12세기 마드리드 스킬리체스(Madrid Skylitzes) 사본에 묘사된 미카엘 3세
12세기 마드리드 스킬리체스(Madrid Skylitzes) 사본에 묘사된 미카엘 3
 

1. 미카엘 3세 황제 : ‘주정뱅이오명 속 비잔틴 제국의 중흥을 이끌다

 
미카엘 3(Michael III, 84019/10867924)842년부터 867년까지 비잔틴 제국을 통치했던 황제였다. 그는 아모리아 왕조(Amorian dynasty)의 세 번째이자 전통적으로 마지막 황제였으며, 그의 시대에 비잔틴 제국은 9세기 비잔틴의 부흥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현대 역사가들은 평가한다. 미카엘 3세는 또한 제국 역사상 가장 어린 나이에 황제가 되었고, 최연소로 단독 황위에 오른 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후대 마케도니아 왕조(Macedonian dynasty)의 적대적인 역사가들로부터 주정뱅이(ὁ Μέθυσος)’라는 경멸적인 별명을 얻었지만, 오늘날의 역사 연구는 그의 평판을 어느 정도 회복시켜 놓았다. 그는 결국 867년에 그의 후계자인 바실리우스 1(Basil I, 811886)에 의해 암살당했다.
 

2. 어린 시절과 섭정기

 
미카엘 3세는 황제 테오필로스(Theophilos, 812년경842120)와 황후 테오도라(Theodora, 815867) 사이에서 태어난 막내 아들이었다. 그의 정확한 출생일은 불확실하지만, 840년 초, 아마도 19일 또는 10일로 추정된다. 그는 같은 해 516일 공동 황제로 즉위했으며, 아버지가 사망했을 때 두 살에 불과했던 미카엘은 842120일 단독 황제로 제위를 계승했다.
 
어린 황제가 성장하는 동안, 궁정 대신들은 권력 투쟁을 벌였다. 섭정은 미카엘의 어머니인 황후 테오도라와 환관 테오크티스토스(Theoktistos, 9세기)가 이끌었지만, 황제는 곧 자신의 삼촌인 바르다스(Bardas, 9세기)에게 마음을 두었다. 바르다스는 미카엘의 환심을 얻기 위해 테오크티스토스를 암살하려는 음모를 부추겼다. 855, 테오크티스토스는 콘스탄티노플의 대궁전에서 살해당했고, 이로써 섭정 체제가 붕괴되었다. 그리고 857, 테오도라는 정부에서 배제되어 딸들과 함께 수도원에 유폐되었다.
 

3. 정치적 동반자들과 권력의 재편

 
테오도라와 테오크티스토스가 실각한 후, 바르다스가 실질적인 권력을 잡고 카이사르(Caesar)’ 칭호를 받았다. 그는 미카엘 3세의 유능한 조언자이자 공동 통치자로 활동하며, 제국 재건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바르다스와 미카엘 3세의 관계는 이후 새로운 권력자인 바실리우스 1세의 등장으로 복잡해진다. 866, 바실리우스는 미카엘 3세의 암묵적인 동의 하에 바르다스를 암살하고 공동 황제로 즉위했다. 이러한 복잡한 권력의 역학 관계는 미카엘 3세 시대의 특징 중 하나이다.
 

4. 군사적 및 외교적 활동

 
제국 내부의 안정화에도 불구하고 국경 지역은 여전히 불안정했다. 아바스 칼리프국(Abbasid Caliphate)은 더 이상 대규모 침공을 벌이지는 않았지만, 아나톨리아에서는 지역 아미르들이 약탈을 감행했다. 비잔틴군은 팜필리아(Pamphylia), 크레타(Crete), 시리아(Syria) 국경 지역에서 아바스 왕조에 패배하기도 했지만, 85385척의 비잔틴 함대가 아랍군을 상대로 승리했다. 또한 에게해와 시리아 연안에서는 300척에 달하는 최소 3개 이상의 함대가 작전을 펼쳤고, 853년에는 이집트의 다미에타(Damietta)를 성공적으로 공격하기도 했다.
 
크레타는 820년대에 안달루시아(Andalusia) 아랍 해적에게 점령당했으며, 테오크티스토스는 섭정 첫 해에 이 섬을 되찾으려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바르다스도 크레타로 원정을 떠날 계획이었으나, 866년 바실리우스의 사주로 암살당했다. 크레타는 미카엘 3세의 재위 기간이 끝난 지 한참 후인 961년에야 비로소 재탈환되었다.
 

5. 내정과 종교 정책

 
미카엘 3세의 재위는 성상 숭배 논쟁이 종식된 시기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그의 초기 섭정기(843)에 성상 숭배가 복원되었고, 이는 비잔틴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성상 파괴 시대가 종말을 고하면서 종교적인 평화와 함께 정교회 및 전례가 확립되었으며, 황제가 더 이상 이에 간섭하지 않게 되었다.
 
내정 면에서도 미카엘 3세는 상당한 업적을 남겼다. 그는 콘스탄티노플 성벽을 수리하는 데 매우 적극적이었다. 비잔틴 연대기 작가들은 미카엘이 군인 명부 관리를 소홀히 하여 바실리우스가 대규모 징병을 해야 했다고 비난하지만, 이는 단순한 노화 과정의 결과일 수도 있다.
 
미카엘 3세는 돈을 낭비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알려졌지만, 그의 통치 기간 동안 경제는 안정되었고, 850년까지 제국의 연간 수입은 330만 노미스마타(nomismata)로 증가했다. 성상 파괴주의의 종식은 예상대로 시각 예술의 르네상스를 가져왔다. 제국은 내부 조직과 종교적 통합에서 상당한 발전을 이루었으며, 아바스 칼리프국에 맞서 자신들의 영토를 지켜냈다. 가장 중요하게는 불가리아가 비잔티움의 종교적, 문화적 위성국으로 변모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업적의 많은 부분은 855년까지는 테오도라와 테오크티스토에게, 그 이후로는 바르다스와 페트로누스(Petronas)에게 돌아가야 할 것이다.
 

6. 평가와 유산

 
미카엘 3세의 통치와 개인적인 성격은 바실리우스 1(재위 867886)와 그의 후계자들 아래에서 활동했던 비잔틴 저술가들의 적대적인 기록 때문에 평가하기 어렵다. 비잔틴 기록들은 미카엘의 습관적인 술 취함, 전차 경주에 대한 집착, 그리고 교회의 행렬과 의식을 조롱하는 공개적인 행위들을 묘사한다. 그의 궁정 정치는 바르다스, 테오크티스토스의 암살, 그리고 그의 아내 에우도키아 데카폴리티사(Eudokia Dekapolitissa, 9세기), 정부 에우도키아 인게리나(Eudokia Ingerina, 9세기), 그리고 바실리우스의 정부였던 미카엘 자신의 누이 테클라(Thekla, 831867년 이후)와의 기이한 관계를 포함한 스캔들로 특징지어진다. 그리고 마침내 미카엘 자신의 측근 바실리우스의 손에 암살당한다.
 
그러나 아랍 출처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인상은 미카엘이 능동적이고 종종 성공적인 군사 지휘관이었다는 것이다. 출처들의 편향에도 불구하고, 미카엘과 바실리우스 사이에는 정책의 명확한 연속성이 있었다. 이는 아바스 칼리프국과 제1차 불가리아 제국(First Bulgarian Empire)과의 국경 안보, 그리고 모라비아인(Moravians), 아르메니아인(Armenians), 루스인(Rus')에 대한 기회주의적인 정책에 나타난다.
 
결론적으로, 미카엘 3세는 비잔틴 제국의 안정과 부흥에 기여한 중요한 황제였다. 그의 통치는 마케도니아 왕조 시대의 번영을 위한 기반을 마련했으며, 비록 후대의 편향된 기록으로 인해 저평가되었지만, 현대 연구는 그의 재평가를 시도하고 있다. 그의 재위 기간은 격동과 변화 속에서도 제국의 미래를 밝힌 시기로 기억되어야 한다.
 

7. 가족 관계

 
미카엘 3세의 가족 관계는 다소 복잡했다.
  • 아내 : 에우도키아 데카폴리티사(Eudokia Dekapolitissa, 9세기). 미카엘은 자신의 정부였던 에우도키아 인게리나를 더 선호했으나, 궁정의 압력으로 에우도키아 데카폴리티사와 결혼해야 했다.
  • 자녀 : 레오 6(Leo VI the Wise, 866912)와 콘스탄티노플의 스테파노스 1(Stephen I of Constantinople, 867893)가 있었으나, 이들의 친자 관계는 확실치 않으며 바실리우스 1세의 자녀일 가능성도 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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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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