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17일 일요일

레오 5세 아르메니아인(Leo V the Armenian, AD.c.775~820) : 동로마 제국 제85대 황제

레오 5세 아르메니아인(Leo V the Armenian, AD.c.775~820) : 동로마 제국 제85대 황제

 
  • 레오 5세 아르메니아인(Leo V the Armenian)
  • [Greek : Λέων ὁ Ἀρμένιος / Léōn ho Arménios]
  • 출생 : 775년경
  • 사망 : 8201225
  • 부친 : 바르다스(Bardas)
  • 배우자 : 테오도시아(Theodosia)
  • 자녀 : 콘스탄틴(Constantine), 바실(Basil), 그레고리(Gregory), 테오도시오스(Theodosios), 안나(Anna)
  • 재위 : 813712~ 8201225
  • 대관식 : 813712

12세기 『마드리드 스킬리차스(Madrid Skylitzes)』에 묘사된 레오
12세기 마드리드 스킬리차스(Madrid Skylitzes)에 묘사된 레오
 

1. 레오 5세 아르메니아인 : 혼돈 속 비잔티움 제국을 이끈 실용주의 황제

 
서기 9세기 초 비잔티움 제국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내부적인 종교적 갈등과 외부적인 군사적 위협에 직면해 있었다. 이러한 격동의 시기에 뛰어난 군사적 재능과 실용적인 정치 감각으로 황위에 오르고, 제국의 안정을 위해 중요한 정책들을 펼쳤던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레오 5세 아르메니아인(Leo V the Armenian, 775820)이다. 그는 813년부터 820년까지 불과 7년간 비잔티움 제국을 통치했지만, 불가리아와의 오랜 전쟁을 끝내고 성상 파괴 정책을 재도입하며 제국의 역사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레오 5세의 통치는 제국이 직면한 현실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그의 실용주의적인 접근 방식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그의 단호한 결정과 냉철함은 결국 동지들의 배신이라는 비극적인 최후를 불러왔다.
 

2. 권력 장악 : 군사적 재능과 황위 등극

 
레오 5세는 775년경 아르메니아 태생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바르다스(Bardas) 또한 군사적 배경을 가진 인물이었다. 젊은 시절 비잔티움 제국으로 건너온 레오는 아나톨리아 테마(Anatolic Theme)의 군대에 입대하여 군사적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는 니케포로스 1(Nikephoros I) 황제 밑에서 활약하며 빠르게 승진했다. 811년에는 아르메니아 테마(Armeniac Theme)의 총독(stratēgos)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아랍 약탈로 인해 유카이타(Euchaita) 시가 함락되면서 니케포로스 황제로부터 한때 추방당하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811년 미카엘 1세 랑가베(Michael I Rhangabe, 770844)에 의해 다시 복직되었고, 아나톨리아 테마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812년 아랍과의 전쟁에서 훌륭한 활약을 보였던 레오 5세는 813년 벌어진 베르시니키아 전투(Battle of Versinikia)에서 미카엘 1세 황제와 함께 불가리아의 칸 크룸(Krum)에 맞섰다. 이 전투에서 비잔티움 군대는 참패했고, 미카엘 1세는 전장을 이탈했다. 레오 5세 또한 전장을 포기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패배를 기회 삼아 미카엘 1세에게 퇴위를 강요했다.
 
813711, 레오 5세는 미카엘 1세의 퇴위와 함께 황위에 올랐다. 그의 즉위는 혼란에 빠진 제국을 안정시키기 위한 군대의 열망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3. 제위 기간의 주요 정책 : 평화와 성상 파괴

 
레오 5세의 통치 기간 동안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정책은 불가리아와의 평화 협정 체결과 성상 숭배 정책의 재도입이었다.
 

1) 불가리아와의 평화 체결

 
레오 5세가 즉위할 당시 비잔티움 제국은 불가리아의 강력한 압박을 받고 있었다. 불가리아 칸 크룸은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하며 제국을 위협했다. 레오 5세는 우선 크룸의 콘스탄티노플 봉쇄를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815, 크룸이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레오 5세는 크룸의 후계자인 오무르타그(Omurtag)와 평화 협상을 시작했다. 이 협상을 통해 비잔티움 제국과 불가리아는 30년간의 평화 협정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발칸 반도의 국경을 재설정하고, 비잔티움 제국이 오랫동안 시달려왔던 북부 국경의 위협을 일시적으로나마 제거함으로써 제국이 내부 문제에 집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2) 성상 파괴 정책 재도입

 
레오 5세의 또 다른 중요한 정책은 815년 성상 파괴 정책을 재도입한 것이었다. 이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니케포로스(Nikephoros I of Constantinople)를 해임하고 이전 성상 파괴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5(Constantine V)의 정책을 다시 따르는 것이었다. 이러한 결정의 배경에는 제국의 군사적 패배가 신의 노여움 때문이라는 인식이 있었을 수 있으며, 성상 숭배를 통한 우상 숭배가 제국의 불운을 초래했다는 믿음이 작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성상 파괴 정책은 제국 내부에 큰 종교적 논란과 갈등을 불러일으켰지만, 레오 5세는 이를 단호하게 밀어붙였다.
 

4. 비극적인 최후 : 동지들의 배신

 
레오 5세의 강력한 통치와 정책들은 많은 지지를 받았지만, 동시에 그의 강경한 성격과 주변 인물들에 대한 불신은 결국 비극을 초래했다. 특히 그를 황위에 오르게 한 핵심 인물 중 한 명이자 그의 가장 신뢰하는 장군이었던 미카엘 아모리아인(Michael the Amorian, 770829)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미카엘 아모리아인은 레오 5세의 가장 친한 친구 중 한 명이었으나, 레오 5세는 그의 충성심을 의심하게 되었다. 820, 레오 5세는 미카엘 아모리아인을 반역 혐의로 체포하고 처형을 명령했다. 그러나 처형은 크리스마스 아침으로 미뤄졌다.
 
8201225일 크리스마스 날 이른 아침, 황궁의 예배당에서 미사를 드리는 동안, 미카엘 아모리아인의 추종자들이 수도사로 변장하여 황궁에 침입했다. 이들은 제단을 지키던 근위병을 제압하고 황제 레오 5세를 습격했다. 레오 5세는 자신의 검으로 용감하게 저항했으나, 수적으로 열세였던 그는 결국 살해당했다. 그의 시신은 궁전에서 끌려 나와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레오 5세의 암살 이후 미카엘 아모리아인은 감옥에서 풀려나 즉시 황제에 즉위했다. 그는 황제 미카엘 2(Michael II)가 되었고, 이로써 새로운 아모리아 왕조(Amorian dynasty)가 시작되었다.
 

5. 레오 5세의 유산

 
레오 5세 아르메니아인의 통치는 비록 짧았고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지만, 그는 비잔티움 제국 역사에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다.
 
  • 외교적 안정 : 불가리아와의 평화는 제국의 숨통을 트이게 하고, 발칸 반도에서의 오랜 소모전을 끝내는 데 기여했다. 이는 제국이 다른 위협에 대처하고 내부를 다지는 데 필요한 시간을 벌어주었다.
  • 종교 정책의 재확립 : 성상 파괴 정책의 재도입은 당시 비잔티움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그의 재위 기간은 2차 성상 파괴 논쟁의 시작점이 되었으며, 이는 9세기 비잔티움 역사의 주요 쟁점이 된다.
  • 군사적 리더십 : 그는 군사적 위협이 끊이지 않던 시기에 제국을 이끌었던 유능한 장군 출신 황제였다. 그의 전술적, 전략적 능력은 혼란에 빠진 제국의 군사력을 재건하는 데 기여했다.
 
레오 5세 아르메니아인은 냉철한 현실주의자이자 강력한 지도자였지만, 그의 권력 유지 방식은 결국 그의 파멸을 불러왔다. 그의 이야기는 비잔티움 황제의 자리가 얼마나 위험하고 불안정하며, 권력의 속성이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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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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