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17일 일요일

미카엘 2세(Michael II, AD.770~829) : 동로마 제국 제86대 황제(820~829)

미카엘 2(Michael II, AD.770~829) : 동로마 제국 제86대 황제(820~829)

 
  • 미카엘 2(Michael II)
  • [Greek : Μιχαλ / Mikhaḗl]
  • 아모리아인[the Amorian, ὁ ἐξ μορίου, ho ex Amoríou]
  • 말더듬이[the Stammerer / ὁ Τραυλός, ho Travlós / ὁ Ψελλός, ho Psellós]
  • 출생 : 770
  • 사망 : 829102
  • 배우자 : 테클라(Thekla), 에우프로시네(Euphrosyne)
  • 자녀 : 테오필로스(Theophilos)
  • 재위 : 820년 12월 12일 ~ 829년 10월 2일

『마드리드 스킬리차스(Madrid Skylitzes)』에 등장하는 미카엘 2세.
마드리드 스킬리차스(Madrid Skylitzes)에 등장하는 미카엘 2.
 

1. 미카엘 2: 반란으로 황위에 올라 비잔티움 제국의 운명을 바꾼 황제

 
서기 9세기 초, 비잔티움 제국은 내부적으로는 황위 다툼과 종교적 갈등으로 혼란스러웠고, 외부적으로는 이슬람 세력의 확장과 슬라브족의 압박이라는 거대한 도전에 직면해 있었다. 이러한 격동의 시기에 하찮은 출신으로 황위에 올라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고 제국의 중요한 전환점을 제시한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미카엘 2(Michael II, 770829)이다. 그는 820년부터 829년까지 비잔티움 제국을 통치하며, ‘아모리아인(the Amorian)’ 또는 말더듬이(the Stammerer)’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의 재위 기간은 혼란의 연속이었지만, 그는 위기를 극복하고 아모리아 왕조(Amorian dynasty)의 기틀을 다져 이후 200년 이상 제국을 통치하는 데 기반을 마련했다.
 

2. 아모리움 출신 장군의 등장 : 황위로 가는 길

 
미카엘 2세는 770년 프리기아(Phrygia)의 아모리움(Amorium)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나톨리아 테마(Anatolic Theme) 출신으로, 역시 이 지역 출신의 장군 레오 5세 아르메니아인(Leo V the Armenian, 775820)과 동료이자 절친한 친구였다. 이들은 함께 군 생활을 하며 공을 세웠고, 니케포로스 1(Nikephoros I) 황제 휘하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았다. 레오 5세가 미카엘 1세 랑가베(Michael I Rangabe)를 폐위하고 황위에 오를 때, 미카엘 2세는 레오 5세의 강력한 지지자 중 한 명이었으며, 이로 인해 높은 지위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황제가 된 레오 5세는 점차 미카엘 2세를 불신하게 되었다. 결국 820, 레오 5세는 미카엘 2세를 반역 혐의로 체포하고 크리스마스 당일에 처형을 명령했다.
 

3. 피로 얼룩진 즉위 : 레오 5세의 암살 (820)

 
운명의 날인 8201225일 크리스마스 아침, 미카엘 2세는 감옥에 갇힌 채 자신의 처형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를 지지하던 추종자들이 수도사로 변장하고 황궁 예배당에 침입하여 미사를 드리던 황제 레오 5세를 암살하는 데 성공했다.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미카엘 2세는 감옥에서 풀려나 즉시 황제에 즉위했다. 그러나 즉위 과정은 매끄럽지 못했다. 아직 발에 족쇄가 채워진 채로 황제로 선포되었고, 심지어 감옥에 있던 상태에서 대관식을 올렸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이렇게 극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황위에 오른 미카엘 2세는 새로운 아모리아 왕조의 첫 번째 황제가 되었다.
 

4. 내전의 소용돌이 : 토마스 슬라브의 반란 (821-824)

 
미카엘 2세의 즉위는 곧바로 거대한 내전을 불러왔다. 그의 옛 동료이자 역시 아나톨리아 출신이었던 토마스 슬라브(Thomas the Slav, ?823)가 미카엘의 황위 찬탈에 반대하며 대규모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토마스는 자신이 콘스탄티누스 6(Constantine VI)라고 주장하며 제국 내 다양한 계층과 종교적 배경을 가진 이들의 지지를 얻었다. 아시아 소아시아 지역의 테마 대부분과 동방 교회, 심지어 아바스 왕조 칼리프의 지원까지 받아 그의 세력은 막강했다.
 
821년 말, 토마스는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반란은 미카엘 2세에게 거의 왕위를 잃게 할 정도로 심각한 위협이었고, 제국 역사상 가장 격렬한 내전 중 하나로 기록된다. 미카엘 2세는 북쪽 국경의 적대국인 불가리아 칸 오무르타그(Omurtag)의 도움을 받는 파격적인 결정을 내려 토마스군을 격퇴했다. 오무르타그는 비잔티움과 평화 조약을 맺은 상태였고, 비잔티움 제국의 내전은 불가리아의 발칸반도 확장에 유리한 상황을 제공할 수 있었기에 미카엘을 지원했다.
 
수년간의 전투 끝에 토마스 슬라브의 반란은 824년 봄이 되어서야 완전히 진압되었다. 이 내전은 제국의 경제와 사회에 막대한 피해를 입혔으며, 특히 콘스탄티노플 주변 지역은 심하게 황폐화되었다.
 

5. 재위 후반기의 군사적 재앙 : 크레타와 시칠리아 상실

 
토마스 슬라브의 반란 진압 이후 미카엘 2세의 재위 후반기는 두 가지 중대한 군사적 재앙으로 점철된다. 이 사건들은 비잔티움 제국에 장기적인 악영향을 미쳤다.
 
  • 크레타 상실(824) : 824, -안달루스(al-Andalus)에서 추방된 아랍 해적들이 크레타 섬을 침공하여 점령했다. 크레타는 에게 해의 핵심적인 전략적 요충지였으며, 이곳을 상실함으로써 비잔티움 제국은 남부 에게 해의 해상 통제권을 잃게 되었다. 크레타는 이후 수십 년 동안 지중해 연안 지역에 대한 아랍 해적들의 거점으로 활용되었다.
  • 시칠리아 상실 시작(827) : 827년에는 이프리키야(Ifriqiya)의 아글라브 왕조(Aghlabids)가 시칠리아(Sicily) 침공을 시작했다. 시칠리아는 비잔티움 제국의 중요한 곡창지대였으며, 이 지역을 상실함으로써 제국은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시칠리아는 완전히 정복되는 데 수십 년이 걸렸지만, 미카엘 2세의 재위 기간에 그 상실이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큰 전략적 실패였다.
 
이 두 사건은 제국이 내전으로 인해 얼마나 약화되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동시에, 비잔티움 해군력이 아랍의 해상 세력에 비해 얼마나 취약했는지를 드러냈다.
 

6. 국내 정책과 유산 : 온건한 성상 파괴 정책

 
미카엘 2세는 그의 전임 황제 레오 5세의 성상 파괴 정책을 이어갔지만, 그의 접근 방식은 이전의 강경한 성상 파괴주의자들과는 달랐다. 그는 성상 숭배자들을 우상 숭배로 고발하지 않았고, 교회의 높은 곳에 매달린 성상들은 그대로 두도록 허용했다. 이러한 온건한 입장은 종교적 갈등을 완전히 해소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극심한 박해를 피하고 교회를 안정화하려는 노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의 니케포로스 총대주교(Nikephoros I of Constantinople)와 같은 주요 성상 숭배자들은 그의 정책에 강력히 반대했고, 미카엘의 재위 기간에도 성상 파괴 논쟁은 계속되었다.
 
역사가들은 미카엘 2세를 종종 무지하고 교육받지 못한 농부로 묘사하곤 했다. 이는 아마도 그의 비천한 출신과 성상 파괴 정책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혼란스러운 제국을 안정시키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은 유능한 통치자였다. 그는 제국의 정부 시스템과 군사력을 재건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그의 손자 미카엘 3(Michael III) 대에 이르러 아바스 왕조(Abbasids)와의 싸움에서 비잔티움이 우위를 점하고 황궁 내의 모든 격변을 견뎌낼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미카엘 2세의 직접적인 후손인 아모리아 왕조는 그의 아들 테오필로스(Theophilos)와 손자 미카엘 3세로 이어졌으며, 이후 마케도니아 왕조(Macedonian dynasty)로 이어지며 2세기 이상 제국을 통치했다. 이는 9세기와 10세기의 비잔티움 르네상스(Byzantine Renaissance)’를 이끌어내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미카엘 2세는 8291025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아들 테오필로스가 제위를 계승했다. 미카엘 2세는 자신의 부족한 배경에도 불구하고 비잔티움 제국의 재건과 장기적인 안정에 기여한 복합적인 인물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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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Wikimedia Commons |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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