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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1월 13일 월요일

[신라] 제3대 유리이사금, 왕위를 석탈해에게 진짜로 양보하려고 했을까?

서로 왕위를 양보한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과 석탈해
 
신라의 제3대 임금인 유리이사금이 즉위했을때, 유리이사금은 석탈해에게 왕위를 양보하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서로 왕위를 양보하는 훈훈한 미담으로 전해진다. 그것에 대해 삼국사기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유리이사금이 즉위하다 : 2409()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이 왕이 되었다. 남해(南解)의 태자(太子)이다. 어머니는 운제(雲帝) 부인이고, 왕비는 일지(日知) 갈문왕(葛文王)의 딸이다. 혹은 말하기를 왕비의 성은 박()이고, 허루왕(許婁王)의 딸이라고도 한다.
 
처음 남해왕(南解王)이 세상을 떠나자 유리(儒理)가 당연히 왕이 되어야 했는데, 대보(大輔)인 탈해(脫解)가 평소 덕망이 있어서 왕위를 그에게 양보하고자 하였다. 탈해가 말하기를, “신성한 기물은 큰 보배라서 보통 사람은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제가 듣기에 성스럽고 지혜로운 사람은 이빨이 많다고 하니 떡을 깨물어서 누가 이빨이 많은지를 알아봅시다.”라고 하였다. 유리의 잇금[齒理]이 많은 것으로 나타나니, 이에 좌우 신하들과 더불어 왕으로 받들었고, 이사금(尼師今)이라고 불렀다. 옛 전승이 이와 같은데, 김대문(金大問)은 이르기를, “이사금은 방언으로 잇금[齒理]을 일컫는 말이다. 옛날 남해왕이 죽음을 앞두고 아들인 유리와 사위인 탈해에게 내가 죽은 후에 너희 박, 석 두 성씨는 나이가 많은 자가 왕위를 잇도록 하라.’고 말하였다. 그 후 김씨 성이 일어나서 세 성씨가 이빨이 많은 것으로써 서로 왕위를 이어갔으므로, 이사금이라고 칭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에 대해서 삼국유사는 아래와 같이 전한다.
 
3대 노례왕(第三 弩禮王)
 
박 노례니질금[한편 유례왕(儒禮王)이라고도 한다.]이 처음 매부(妹夫)인 탈해(脫解)에게 왕위를 양보하려 하자 탈해가 대개 덕이 있는 사람이 이빨[]이 많다고 하니 이빨의 수로서 그것을 시험해 봅시다.”라 하였다. 이에 떡을 물어 시험해 보니 [노례]왕의 이빨이 많았으므로 먼저 즉위하였다. 이로 인하여 니질금이라 하였으며 니질금의 칭호는 이 왕 때부터 시작되었다. 유성공(劉聖公) 경시(更始) 원년 계미(癸未)에 즉위하였다. [연표에는 갑신(甲申)년에 즉위하였다고 한다.]
 
유리이사금은 당시 덕망이 있었던석탈해에게 왕위를 양보하려고 하였고, 석탈해 역시 덥석 왕위를 받지 않고 누가 이빨이 많은지 알아보자는 제안을 해서 이빨이 많은 유리이사금이 왕위에 오른 것이다.
 
석탈해는 왜 그런 제안을 했을까? 유리이사금이 좋은 의도로 왕위를 물려주려고 했었을지 몰라도, 신하들의 생각은 전혀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석탈해로서는 괜히 왕위를 물려받았다가 신하들의 불만을 감당할 수 없을 거라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유리이사금이 석탈해의 의중과 신하들의 의중을 떠보기 위해서 그런 양보의 의 의사를 밝혔을지도 모른다. 석탈해가 왕위에 욕심이 있다고 판단된다면 제거하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석탈해로서는 받을 수도, 거절할 수도 없는 난처한 상황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양측이 서로 합의한 방법으로 누가 왕위에 적합한 인물인가를 결정하는 방법을 제안한 것이라고 본다. 이런 방법으로 왕이 되면 왕이 되어서 좋을 것이고, 왕이 되지 않아도 나는 욕심이 없었다는 것을 만천하에 알리면서 나름 훗날을 기약할 수 있어서 좋을 것이다. 그런데 어쩌면 이후 석탈해로서는 적당한 선만 지키면서 적당히 욕심이 없는 척해야 하는 피곤한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괜히 조금만 튀는 행동을 했으면 신하들이 저 놈을 죽여야 합니다!’라고 게거품을 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신라] 조상의 은덕으로 나라를 지키다? (남해차차웅 원년, AD 4년)

조상의 은덕으로 나라를 지키다(?)
 
남해차차웅 원년에 낙랑이 침입하였다. 이것에 대해 삼국사기는 이렇게 전한다.
 
원년(4) 가을 7월에 낙랑(樂浪) 병사들이 와서 금성(金城)을 여러 겹으로 에워쌌다. 왕이 좌우 신하에게 말하기를, “두 성인이 나라를 버리시고 내가 국인들의 추대로 왕위에 그릇되게 거하게 되어 위태롭고 두렵기가 마치 하천의 물을 건너는 것 같다. 지금 이웃 나라가 침략해 온 것은 나의 부덕이라 하겠으니, 어찌하면 되겠는가?”라고 하니, 좌우 신하들이 대답하기를, “적들이 우리에게 상()이 있음을 다행으로 여기고 망령되게 병사를 동원하여 왔으니 하늘이 반드시 도와주지 않을 것입니다.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적이 얼마 있지 않아 물러나 돌아갔다.
 
대부분 왕이 교체되는 시점에 주변의 적국이 쳐들어오는 것은 쉽게 예상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에 대한 대비를 제대로 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되어있지 않아서 당시의 상황을 제대로 살펴볼 수는 없지만, 낙랑이 쳐들어온 이후에 대한 신하들과 왕의 대화 및 대처를 보면 얼마나 국방을 대충 생각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기껏 외국의 침략을 자신의 부덕의 소치라고 말하는 수준의 임금과 하늘이 낙랑을 도와주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은 그야말로 한심하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사실 저런 상황에서 신하가 예 임금님의 부덕의 소치가 맞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신하가 고금을 통틀어서 몇 명이나 될 것인가!
 
이런 개떡같은 대처에 대해서 낙랑은 얼마 있지 않아서 물러갔다고 기록에 전하고 있다. 전쟁이 동네 닭싸움도 아니고, 승리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다는 판단에서 쳐들어왔는데 아무런 소득이 없이 물러갔다는 것은 (신라의) 바보같은 대책에 대한 (낙랑의) 멍청한 행동이 아닐 수 없다고 본다.

[신라] 제2대 남해차차웅의 부인은 한명? 두명? 누이?

남해차차웅의 부인은 한명? 두명? 누이?
 
남해차차웅의 부인은 운제부인인데으로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지금 영일현(迎日縣) 서쪽에는 운제산 성모가 있어 가물 때에 기도를 드리면 영험이 있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삼국사기가 일설로 전하는 아루부인이 운제부인과 동일인인지는 알 수가 없다. 삼국사기32 잡지1 제사조를 보면, 신라의 시조묘에 대해 기술하면서 남해왕 대에 시조 혁거세의 사당[]을 세우고 친누이 아로(阿老)’로 하여금 제사를 주관하게 했다고 되어 있는데, 아루부인은 이 아로와 음이 통하여 양자가 같은 인물일 가능성도 고려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아로부인은 남해차차웅의 친누이였을지도 모른다)
 
확실치는 않지만 신라시대에는 근친혼이 성행했기 때문에 친누이이면서도 아내였을 가능성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신라] 제2대 남해차차웅(AD 4~24년)은 ‘무당’인가?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신라 제2대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 AD 4~24)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이 왕이 되었다. [‘차차웅은 혹은 자충(慈充)’이라고도 한다. 김대문(金大問)이 이르기를, “방언으로 무당을 일컫는다. 세상 사람들은 무당이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받들기 때문에 두려워하고 공경하였다. 그래서 존장자(尊長者)를 칭하여 자충이라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혁거세(赫居世)의 적자이다. 신장이 크고, 성격이 침착하며 온후하고, 지략이 많았다. 어머니는 알영(閼英) 부인이다. 왕비는 운제(雲帝) 부인이다. [일설에는 아루(阿婁) 부인이라고도 한다.] 아버지를 계승하여 왕위에 올라 원년을 칭하였다.
 
신라 제2대 왕인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은 혁거세거서간의 아들로 서기 4년에 즉위하여 21년간 나라를 다스린 후 서기 24년에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삼국유사에서는 거서간으로도 표기하고 있다.
 
차차웅은 남해왕에게 붙여졌던 신라 고유의 왕호로 자충(慈充)’으로도 표기되었었다. 자충이라는 단어에서 불교의 이 나왔다고 하는 주장도 있기에 불교의 승려를 세속에서 중이라고 부른 것도 승려가 지녔던 무속적인 성격에서 유래했다고 보기도 한다.
 
통일신라 시대 초반에 활동했던 역사가 김대문이 전하는 바로는 신라에서 ()’를 일컫는 말이었다고 한다. 이를 받아들인다면, 차차웅은 본디 제사장을 뜻하는 신라말로서, 신라 초기의 왕이 제사장으로서의 성격을 지녔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신라 왕호로서 차차웅은 남해왕에게만 해당하고, 그 뒤로는 이사금이라는 왕호가 사용되었다.
 
김대문(金大問)은 신라 중대의 역사가이며 진골 출신으로 성덕왕 시대에 한산주 도독을 지냈다. 주요 저술로는 계림잡전(鷄林雜傳), 화랑세기(花郞世記), 고승전(高僧傳), 한산기(漢山記), 악본(樂本)등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 책들은 삼국사기가 편찬될 때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었다.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차차웅에 대한 김대문의 설명은 계림잡전에서 인용되었을 것으로 본다.

[신라] 혁거세거서간 죽음의 미스테리 (혁거세거서간 재위 61년, AD 4년)

혁거세거서간 죽음의 미스테리
 
삼국사기는 혁거세거서간이 죽은 해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혁거세거서간이 죽다 : 403()
 
61(4) 3월에 거서간이 승하(升遐)하였다. 사릉(蛇陵)에 장사 지내니, 담암사(曇巖寺)의 북쪽에 위치해 있다.
 
이것에 대해서 삼국유사는 조금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 만에 왕이 하늘로 올라갔는데 이레 뒤에 유해가 땅에 흩어져 떨어졌으며 왕후도 역시 죽었다고 한다. 국인들이 합장을 하려고 했더니 큰 뱀이 나와서 내쫓아 못하게 하므로 5(五體)5(五陵)에 각각 장사지내고 역시 이름을 사릉(蛇陵)이라고도 하니 담엄사 북쪽 왕릉이 바로 이것이다. 태자 남해왕(南解王)이 왕위를 계승하였다.
 
삼국사기와는 달리 삼국유사는 혁거세거서간의 죽음 이후에 뭔가 자연스럽지 않는 상황을 암시하고 있다. 살해당했다는 설도 있고, 이에 대해 농경민의 바램을 담은 신화적 해석도 있다.
 
1) 살해당했다는 설
 
신라 시조 혁거세왕은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 되는 해에 하늘로 올라갔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하늘로 올라갔다는 것이지 죽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런데 7일 후 왕의 죽은 육체가 땅에 흩어져 떨어졌고 왕후도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살아서 승천한 왕이 죽어서 몸만 돌아왔다. 문제는 온전히 내려온 것도 아니라 흩어져서 떨어져 내려왔다. 시신을 수습하는 것만도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해도 많이 이상하다. 어쩌면 누군가에게 살해당한 후 시체 은닉까지 당한 것인가? 일주일 만에 시신을 찾았는데 차마 봐줄 수 없을 정도로 손상되어 있었던 것인가? 왕후 즉 왕비도 세상을 떠났다고 하니, 잉꼬부부처럼 볼 수도 있지만, 왕비 역시 살해당한 것은 아닐까? 아니면 왕의 살해에 왕비가 관여된 것은 아닐까? 왕실 특히 장수한 왕의 죽음에 관여된 일이기에 더욱 의심스럽지 않을 수 없다. 다만, 건국신화라고 해서 의심을 덜 받는듯하다. 하지만, 이와 같이 상해 당해서 죽은 것이라면 아무리 오래 살았다고 해도 참으로 원통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범인은 누군지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이 살인 즉, 시해 사건 역시 제일 이익 본 사람은 범인과 무관하지 않을 듯하다. 하지만 오래 살지 못한 아들 남해왕이기보다는 그의 사위인 탈해왕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
 
2) 농경민족의 바램을 담은 신화적 해석
 
승천 뒤 벌어진 주검의 해체와 지상 하강은 건국신화의 논리를 벗어난다. 혁거세의 토막난 사체를 사체화생(死體化生) 유형의 곡물기원신화와 연관짓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큰 뱀(大蛇)이 토막 난 사체의 합체를 막았다! 이브를 유혹한 뱀 때문에 뱀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만연해 있지만 뱀이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신화적 동물이라는 것은 신화학의 상식이다. 대지를 기어다니고 허물을 벗어놓는 뱀, 무척이나 남근을 닮은 뱀의 모습이 그런 상상을 낳고 상징을 마련했을 것이다. 이런 상징을 지닌 큰 뱀이 합체를 막았다면 혁거세의 분해된 사체에서 뭔가 풍요로운 생명이 출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흩어져 여러 곳에 뿌려질수록 풍요로운 수확을 얻을 수 있는 것. 그게 바로 농업 재배민들의 곡물이다. 그렇다면 하필 다섯 덩이인 까닭은? 이는 물론 사방과 중앙이라는 동아시아의 오방(五方) 관념과 무관치 않을 테지만 더 직접적으로는 모든 곡물을 상징하는 오곡(五穀) 관념의 소산일 것이다.

[신라] 남의 국가의 불행을 이용하지 않는 것이 어진일? (혁거세거서간 재위 39년, BC 19년)

남의 국가의 불행을 이용하지 않는 것이 어진일?
 
혁거세거서간 재위 39년에 마한왕이 죽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39(B.C. 19)에 마한왕이 죽었다. 혹자가 왕에게 설득하기를, “서한(西韓)의 왕이 지난번 우리 사신에게 모욕을 주었는데 지금 그 상을 당하였으니 그 나라를 정벌하면 넉넉히 평정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남의 재앙을 다행으로 삼는 것은 어질지 않은 일이다.”라며 따르지 않고,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위로하였다.
 
물론 삼국사기의 기록은 혁거세거서간의 군자스러움을 강조하기 위한 기록이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한 국가의 책임자로서 이러저러한 것을 모두 따진다면 결코 국가를 키울 수 없기 때문에 오늘날로 따지면 멍청한 행동이라고 비판을 받아 마땅한 것이다. 물론 단지 복수심으로 남의 나라를 정벌하려는 것은 위험요소가 있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다. 그런데 삼국사기의 기록에 언급된 남의 재앙이 어떤 상황인지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남의 나라의 재앙은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극단적인 생각일지 모르지만 상대방의 국력이 약해진 것도 남의 재앙을 다행으로 삼는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정신상태라면 도저히 남의 나라를 쳐들어갈 명분을 만들 수 없을 것이다

모우리(Eli Miller Mowry, 1878-1971) 한국명 모의리(牟義理),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ㆍ목사

모우리 (Eli Miller Mowry, 1878-1971) 한국명 모의리 ( 牟義理 )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ㆍ목사 .   【 1878 년 】 미국 오하이오주 벨빌 (Bellville) 근교에서 사무엘 모우리 (Samuel Mowry, 1850-1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