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魏, AD. 220~265년)의 역사와 역대 황제
1. 조조의 권력 장악과 위나라 기틀 마련
1) 배경과 형성
후한 말 권력이 붕괴하며 군벌 할거가 심화되자, 조조는 헌제를 허창으로 맞아들이고 “천자를 업고 제후를 명한다”는 정치적 우위를 확보한다. 군정 일체의 기반 위에 정예 기병인 호표기를 편성해 중원 정복의 발판을 마련한다.
2) 군사적 확장
관도대전에서 원소를 격파하고, 백랑산 전투로 오환을 토벌해 화북을 사실상 통일한다. 이어 남하를 도모하지만 적벽대전에서 손권ㆍ유비 연합군에 패해 장강 이남 진출은 좌절된다. 그럼에도 북방의 안정화와 관료체제 정비로 실질적 패권을 굳힌다.
3) 제도와 왕국 기반
한 헌제가 조조를 ‘위왕’으로 책봉하고, 위국의 관제와 작위를 정비한다. 이는 훗날 ‘한을 대신해 위를 세우는’ 정당성의 제도적 기초가 된다.
2. 조비의 즉위와 위나라 건국
1) 선양과 건국
220년 조비가 헌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즉위하고, 국호를 ‘위’로 정하며 연호를 황초로 삼고 수도를 낙양에 정한다. 조조는 추존되어 ‘위 무황제’(묘호 태조)로 올라 조위 왕조의 정통성을 공고히 한다.
2) 통치와 전개
조비ㆍ조예 대에 중앙집권과 문무 관료체계가 정비되고, 진군 제도ㆍ구품중정제 같은 제도적 혁신이 위ㆍ진대 정치문화의 틀을 만든다. 대외로는 오에 대한 원정이 반복되었으나 결정타를 만들지는 못했다.
3) 영토와 역량
위는 중원을 장악한 최대 세력으로 인구·병력에서 우위를 보였고, 촉을 멸한 263년 즈음 영토가 정점에 달한다. 행정ㆍ군사 능력의 집중이 가능했으나, 동시에 장기전 속 피로가 누적되었다.
3. 사마씨 가문의 권력 장악과 위나라 몰락
1) 권력 이양의 과정
조예 사후 조정은 조씨 일족과 사마씨ㆍ가씨 등 신흥세력의 양강 구도가 형성된다. 249년 고평릉의 변으로 사마의가 조상 세력을 축출하며 실권을 장악했고, 이후 사마사ㆍ사마소로 권력이 승계된다.
2) 반발과 제압
양주 방면의 왕릉, 관구검ㆍ문흠, 제갈탄 등 이른바 ‘수춘 삼반’이 차례로 거병했으나 진압된다. 황제 권위는 형식화되었고, 종실은 업성 등지에 사실상 구금되어 대응력이 약화되었다.
3) 조정의 붕괴 신호
260년 조모가 친정 시도로 사마소 타격을 감행했으나 성제에게 시해당하며 실패한다. 이후 조환이 옹립되지만, 국정은 전면적으로 사마씨가 장악한다.
4) 끝장 시나리오
263년 등애ㆍ종회 등이 촉을 멸망시키고 외적 명분을 확보하자, 264년 사마소가 진왕에 오르고 9수로 선양 수순을 밟는다. 266년 사마염이 조환에게서 선양을 받아 진을 세우며 위는 역사 속으로 퇴장한다. 선양 후 조환은 진류왕으로 예우되어 장기간 생존했고, 조씨 종실에 대한 금고도 상당 부분 해제되었다.
【연표 하이라이트】
- 196년 : 조조, 헌제를 허창으로 모셔와 ‘제후령’의 명분 확보 시작.
- 200년 : 관도대전 승리로 북방 헤게모니 확정.
- 208년 : 적벽 패배, 장강 남하 좌절로 북ㆍ남 세력 분립 고착.
- 220년 : 조비, 선양을 받아 위 건국(황초 개원), 수도 낙양.
- 249년 : 고평릉의 변, 사마의가 정권 장악.
- 263–266년 : 촉 멸망 → 사마소 진왕 봉작과 9수 → 266년 사마염이 선양받아 진 건국, 위 멸망.
댓글 없음:
댓글 쓰기
참고: 블로그의 회원만 댓글을 작성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