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2대 명제 조예(明帝 曹叡, AD. 205~239년) : 재위 AD. 226~239년
【기원후 205년】
- 조예(曹叡)라는 이름으로 태어났으며, 자(字)는 원중(元仲)이다.
- 일부 자료에서는 204년 또는 206년에 태어났다고도 한다.
- 아버지는 위(魏)의 초대 황제 조비(曹丕)이고, 어머니는 문소황후(文昭皇后) 견씨(甄氏)이다.
- 하지만 그의 친자 관계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견씨는 원래 원소(袁紹)의 아들 원희(袁熙)의 아내였는데, 조비가 그녀를 아내로 맞은 지 8개월 만에 조예를 낳아 실제로는 원희의 아들일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다만 조조(曹操)와 조비는 조예를 자신의 아들로 여겼다.
【어린 시절】 조조의 총애와 견씨의 비극
- 어려서부터 용모가 뛰어나고 위엄이 있었으며,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특히 법률 연구에 관심을 기울였다.
- 할아버지 조조(曹操)는 그를 매우 사랑하여 항상 곁에 두었으며, “나의 가족 기반은 너로 인해 3대까지 이어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기원후 220년】 무덕후(武德侯)에 봉해짐
- 아버지 조비가 위왕이 된 후, 조예는 무덕후(武德侯)에 봉해졌다.
【기원후 221년】 평원후(平原侯)로 강등
- 조비가 자신의 어머니 견씨를 강압적으로 자살하게 만들자, 조예는 평원후(平原侯)로 강등되었다. 이로 인해 조예는 아버지 조비에 대해 불만을 품고 황태자로 책봉되지 못하기도 했다.
【기원후 222년】 평원왕 책봉
- 조비가 그의 작위를 다시 회복시켜 평원왕(平原王)에 봉했다.
- 이 시기에 조비와 함께 사냥을 나갔다가 조비가 어미 사슴을 쏘아 죽이고 어린 조예에게 새끼 사슴을 죽이도록 명령하자, 조예는 눈물을 흘리며 “폐하께서 이미 어미를 죽이셨는데, 차마 새끼까지 죽일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조비는 이 말에 감동하여 활을 던지고 그를 태자로 세울 마음을 굳혔다고 한다.
【기원후 226년】 황제 즉위
- 5월, 아버지 조비가 병에 걸려 황태자로 책봉된 후, 6월 29일(양력) 아버지 조비가 사망하자 23세의 나이로 황제에 즉위했다.
- 그는 위(魏)의 2대 황제로, 흔히 명제(明帝)로 불린다.
- 재위 기간은 226년 6월 29일부터 239년 1월 22일까지이다.
【치세】 뛰어난 통치력과 말년의 사치
- 명민한 군사 전략 : 뛰어난 결단력과 정확한 전황 예측으로 촉한(蜀漢)과 오(吳)의 침공을 효과적으로 방어했다.
- 226년 오의 손권이 강하를 공격했을 때, 손권의 의도를 정확히 예측하고 방어에 성공했다.
- 238년 요동의 공손연(公孫淵)이 반란을 일으키자 사마의(司馬懿)를 보내 조기 진압하는 등 탁월한 군사 지도력을 보였다.
- 내정 개혁 : 법률 정비에 큰 관심을 보여 가혹한 형벌을 줄이고 사형 조문을 검토하여 많은 부분을 삭제했다. 재판에도 직접 참여했으며, 229년 진군(陳羣) 등에게 한(漢)나라의 법률을 정비하여 신법률(《魏律》)을 제정하도록 지시했다.
- 민생 안정 : 적전 의식(籍田儀式)을 통해 농업을 장려하고, 관의 창고를 열어 자립할 수 없는 자들을 구제하며, 233년에는 자립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세금을 면제해주었다.
- 인사 정책 : 아버지와 달리 간언하는 인물들에게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고, 능력 있는 자를 선발했다. 허황된 인물들을 증오하여 관직에서 배제했다.
- 친족 통제 : 어머니 견씨의 명예 회복을 위해 문소황후(文昭皇后)로 추존하고, 235년에는 견씨를 모함하여 죽게 만든 문덕황후(文德皇后)를 사사했다.
- 말년의 사치 : 재위 기간 동안 많은 궁전과 조묘(祖廟)를 건설하고 수천 명의 후궁을 두는 등 사치스러운 생활로 국고를 탕진했다는 비판도 있다. 이로 인해 농번기에 농민들을 징용하여 농촌 황폐화를 초래했다. 조선 정조대왕도 조예가 사치와 황음으로 나라를 망칠 뻔했음에도 요동을 평정한 것은 “하늘이 빼앗아 그 병을 더한 것”이라고 비판했다는 기록도 있다.
- 재위 기간의 연호 :
태화(太和) : 227년 ~ 233년
청룡(青龍) : 233년 ~ 237년
경초(景初) : 237년 ~ 239년
【기원후 239년】 사망
- 1월 22일, 34세 또는 35세의 나이로 낙양(洛陽)에서 병사했다.
- 그는 친아들이 없었으므로, 양자 조방(曹芳)에게 황위를 물려주었다.
- 사마의(司馬懿)와 조상(曹爽)에게 어린 조방의 보좌를 위탁했으나, 이는 훗날 사마의가 조씨 일족의 권력을 찬탈하는 계기가 되는 치명적인 실책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 능은 고평릉(高平陵)이다.
【요약 정보】
- 이름 : 조예(曹叡)
- 자(字) : 원중(元仲)
- 묘호 : 열조(烈祖)
- 시호 : 명황제(明皇帝) : 명제(明帝)는 줄임말
- 출생 : 204년 또는 205년 (일부 자료에서는 204년 또는 206년)
- 출생지 : (명확한 기록 없음)
- 사망 : 239년 1월 22일 (향년 34세 또는 35세)
- 사망지 : 낙양(洛陽)
- 재위 : 226년 6월 29일 ~ 239년 1월 22일 (12년 208일)
- 전임 : 위 문제(文帝) 조비(曹丕)
- 후임 : 위 소제(少帝) 조방(曹芳)
- 조예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뛰어난 군사적, 행정적 능력을 보여 위나라의 기반을 안정시켰지만, 말년의 사치와 후계자 선정에서의 실책으로 인해 삼국시대 후반부 위나라가 사마씨에게 넘어가게 되는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조예의 가계】
[부모ㆍ누이]
- 부친 : 조비(曹丕) — 위나라 초대 황제, 시호 문황제(文皇帝)
- 모친 : 견씨(甄氏) — 조비의 정실, 시호 문소황후(文昭皇后)
- 누이 : 동향공주(东乡公主) — 같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친여동생
[배우자]
- 모황후(毛皇后) : 조예의 정비, 슬하에 아들 조은을 낳음
- 곽황후(郭皇后) : 후에 황후로 책봉, 조예 사후 황태후로 존숭됨
- 유첩여(刘婕妤) : 후궁
- 장차인(张才人) : 조예 사후, 조상에게 헌납됨
- 하차인(何才人) : 장차인과 함께 조상에게 보내짐
- 석영(石英) : 출처 불분명, 측실로 언급됨
[자녀]
- 친자
- 조경(曹冏) : 226년 청하왕에 봉해졌으나 곧 사망
- 조목(曹穆) : 228년 번양왕에 봉해졌으나 229년 사망
- 조은(曹殷) : 정비 모황후 소생, 231년 출생, 232년 사망
- 양자
- 조순(曹詢) : 235년 진왕에 봉해짐, 244년 사망
- 조방(曹芳) : 《魏氏春秋》에 따르면 조개(曹楷)의 아들. 239년 즉위하여 황제(위 제3대)로 올랐으나 254년 폐위됨
- 조모(曹髦) : 조예의 이복동생 조림의 아들, 조방 폐위 후 입양되어 즉위. 260년 시마소에게 살해됨
- 조환(曹奂) : 조예의 숙부 조우(曹宇)의 아들, 조모 사후 즉위하여 위나라 마지막 황제가 됨
- 딸
- 조숙(曹淑) : 곽황후 소생, 232년 사망, 시호 평원의공주(平原懿公主)
- 제장공주(齊長公主) : 중서령 이풍의 아들 이도, 이후 임개에게 재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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