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한 1대 소열제 유비(昭烈帝 劉備, AD. 161~223년) : 재위 AD. 221~223년
【기원후 161년】 탄생
- 유비(劉備)라는 이름으로 태어났으며, 자(字)는 현덕(玄德)이다.
- 전한(前漢) 경제(景帝)의 아들인 중산정왕(中山靖王) 유승(劉勝)의 후손으로, 탁군 탁현(涿縣, 현 허베이성 줘저우시) 출신이다.
- 어려서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돗자리와 신발을 팔며 생계를 유지했다.
- 학문을 좋아하여 유가(儒家)의 대사(大師)였던 노식(盧植)에게 배웠다.
【기원후 184년】 황건적의 난 진압 참여
- 후한 말 혼란기에 황건적의 난이 발발하자, 탁현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관우(關羽)와 장비(張飛)를 만나 형제의 의(義)를 맺었다.
- 이후 군공(軍功)을 세워 안희현위(安喜縣尉), 하밀현승(下密縣丞), 고당현령(高唐縣令) 등을 역임했다.
【기원후 192년】 평원상(平原相) 역임
- 평원(平原) 지방의 군벌로 성장하여 평원상(平原相)에 올랐다.
【기원후 194년】 서주(徐州)목이 되다
- 서주목(徐州牧) 도겸(陶謙)이 병사하자, 그의 유언에 따라 서주를 이어받았다.
【기원후 196년】 여포(呂布)에게 서주를 빼앗기다
- 여포(呂布)의 공격으로 서주를 빼앗기고 소패(小沛)로 물러났다.
- 조조(曹操)에게 의탁하기도 했으나, 조조를 토벌하려는 '의대조(衣帶詔)' 사건에 연루되어 조조를 피하고 원소(袁紹)에게 의탁했다.
【기원후 201년】 형주(荊州) 유표(劉表)에게 의탁
- 원소를 떠나 여남(汝南)에서 조조에게 대항하다 패하고, 형주의 유표에게 의탁하여 신야(新野)에 주둔했다.
【기원후 207년】 삼고초려(三顧草廬)로 제갈량(諸葛亮)을 영입
- 유비는 남양(南陽)의 와룡(臥龍) 제갈량(諸葛亮)의 명성을 듣고 세 차례 직접 찾아가 그를 군사(軍師)로 초빙했다. 제갈량은 유비에게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를 제시했다.
【기원후 208년】 적벽대전(赤壁大戰) 승리
- 조조의 80만 대군이 형주를 침공하자, 유비는 오(吳)나라 손권(孫權)과 연합하여 적벽(赤壁)에서 조조군을 대파했다.
- 적벽대전 이후 형주 남부 4군을 차지하고 세력을 크게 확장했다.
【기원후 209년】 손권의 여동생과 결혼
- 오나라와의 동맹을 공고히 하기 위해 손권의 여동생(손상향 孫尙香)과 결혼했다.
【기원후 211년】 익주(益州) 진출
- 익주목(益州牧) 유장(劉璋)의 요청으로 익주로 들어가 장로(張魯) 토벌을 도왔다.
【기원후 214년】 익주 차지
- 유장과의 불화로 익주를 침공하여 성도(成都)를 점령하고 익주를 차지했다.
【기원후 219년】 한중(漢中)왕 즉위 및 관우의 죽음
- 조조군과의 한중 쟁탈전에서 승리하여 한중을 차지하고 스스로 한중왕(漢中王)에 즉위했다.
- 그러나 관우가 번성(樊城)을 공격하다 오나라 군대의 협공을 받아 죽임을 당했다.
- 일부 자료에서는 관우의 죽음을 220년으로 보기도 한다.
【기원후 221년】 촉한(蜀漢) 건국 및 황제 즉위
- 조비(曹丕)가 후한(後漢) 헌제(獻帝)에게 선양받아 위(魏)나라를 건국하자, 유비는 스스로 한실(漢室)의 정통을 계승한다 주장하며 성도(成都)에서 황제에 즉위했다.
- 국호는 한(漢)이며, 연호는 장무(章武)이다. 그는 촉한의 초대 황제로 소열제(昭烈帝)라 불린다.
【기원후 222년】 이릉대전(夷陵大戰) 패배
- 관우의 복수를 명분으로 오나라를 공격하여 이릉대전(또는 효정(猇亭) 전투)을 일으켰으나, 오나라 육손(陸遜)에게 대패했다.
【기원후 223년】 사망
- 이릉대전의 패배와 건강 악화로 백제성(白帝城)의 영안궁(永安宮)에서 향년 63세로 사망했다.
- 제갈량(諸葛亮)을 불러 유선(劉禪)의 후사를 부탁하는 영안탁고(永安託孤)를 남겼다.
- 능은 성도(成都)의 혜릉(惠陵)이다.
【요약 정보】
- 이름 : 유비(劉備)
- 자(字) : 현덕(玄德)
- 묘호 : 열조(烈祖)
- 시호 : 소열황제(昭烈皇帝) : 소열제(昭烈帝)는 줄임말
- 출생 : 161년
- 출생지 : 탁군 탁현(涿縣, 현 허베이성 줘저우시)
- 사망 : 223년 (향년 63세)
- 사망지 : 백제성 영안궁(白帝城 永安宮)
- 재위 : 221년 ~ 223년 (3년)
- 전임 : (후한 헌제로부터 실질적인 권력의 단절)
- 후임 : 촉한 후주(後主) 유선(劉禪)
- 유비는 후한 말기의 혼란을 헤치고 한실 부흥을 내세워 촉한을 건국한 인물이다. 비록 삼국 통일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관우, 장비, 제갈량 등과 함께 한때 조조의 위(魏)와 손권의 오(吳)에 대항하며 대업을 펼친 영웅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일생은 인의(仁義)를 바탕으로 한 덕치(德治)와 끈질긴 의지로 점철된 파란만장한 여정이었다.
【유비의 가계】
1) 조부ㆍ부친
- 조부 : 유웅(劉雄) — 효렴으로 천거, 동군 범현 현령
- 부친 : 유홍(劉弘) — 동한 말 주ㆍ군의 하급 관리
2) 배우자
- 미부인(麋夫人) — 정실, 미축(麋竺)의 누이. 예주에서 유비가 곤궁할 때 혼인
- 손부인(孫夫人) — 계정실, 손권(孫權)의 누이. 정치혼. 유비 입촉 후 손권이 회수
- 목황후 오씨(穆皇后 吳氏) — 계정실, 오의(吳懿)의 누이, 유무(劉瑁)의 유복. 유비 입촉 후 맞아들임, 한중왕 후. 유선 즉위 때 황태후(長樂宮). 연희 8년에 병사, 유비와 합장
- 감부인(甘夫人) — 패(沛) 사람, 첩. 유선의 생모. 장판에서 조운이 구출. 후에 병사, 시호 황사부인(皇思夫人) → 추시 소열황후(昭烈皇后), 유비와 합장
- 그 밖의 정실(손부인 이전의 몇 명)은 미상. 유비가 여러 차례 정실을 잃어 내정을 감부인이 맡았다는 기록이 있음
3) 자녀
- 유봉(劉封) — 양자, 본성 구(寇). 입촉 후 장수로 등용되었으나 관우(關羽) 구원 불이행ㆍ맹달(孟達) 이반 방치 등의 책임으로 사사
- 유선(劉禪, 字 公嗣) — 장남, 후일 즉위. 유년명 아두(阿斗)
- 유영(劉永, 字 公壽) — 차남, 초루왕 → 감릉왕. 황호(黃皓)와 불화로 소원해짐. 동천 낙양, 봉거도위ㆍ향후
- 유리(劉理, 字 奉孝) — 삼남, 마초(馬超)의 사위. 초량왕 → 안평왕. 요절, 시호 도왕(悼王)
- 공주 둘 — 유비의 남천 장판 때 조순(曹純)에게 포획
4) 손자ㆍ손녀
- 유선의 자녀
- 유선(劉璿) — 장자, 비의(費祎)의 사위. 15세에 태자. 촉한 멸망 후 성도에서 종회(鍾會)의 변란 중 난병에게 피살
- 유요(劉瑤) — 차자, 촉한 멸망 후 항복
- 유종(劉琮) — 삼자
- 유찬(劉瓚) — 사자, 멸망 후 항복
- 유신(劉諶) — 오자, 북지왕. 효주(譙周)의 항위 제안에 반대. 항복일에 자살
- 유순(劉恂) — 육자, 멸망 후 항복
- 유구(劉璩) — 칠자, 멸망 후 항복
- 공주 — 제갈첨(諸葛瞻, 제갈량 독자)에게 출가
- 공주 — 비용(費恭, 비의 차자)에게 출가
- 공주 — 관통(關統, 관흥의 장자)에게 출가
- 유리(劉理)의 자녀
- 유윤(劉胤) — 장자, 안평왕 승계
- 유집(劉輯) — 차자, 마초의 외손. 동천 낙양, 봉거도위·향후
- 기타
- 유현(劉玄) — 유영(劉永)의 손자. 촉한 멸망 후 항복, 영가의 난을 피해 성도 거주
5) 증손
- 유승(劉承) — 유윤의 아들, 20세에 졸
6) 후손 관련 설
- 당대 노룡절도사 유제(劉濟)의 묘지명에 권덕여(權德輿)가 그를 유비의 21세손이라 칭함. 그러나 강위당(姜緯堂)은 신뢰하기 어렵다고 비판. 이유는 영가의 난 때 유비 후손 다수가 사망했고, 유현만이 촉으로 피신했으며, 한조(漢趙) 시기에도 유비 후손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점, 그리고 당대 문벌 숭상 풍조로 유명가문에 가탁하는 사례가 빈번했기 때문임. 구당서·신당서의 「유제전」에도 유제를 유비 후예로 보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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