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14일 일요일

로버트 그리어슨 [Robert Grierson, 1868~1965]

로버트 그리어슨 [Robert Grierson, 1868~1965]

구례선(具禮善), 캐나다장로회ㆍ캐나다연합교회 선교사. 의사. 목사
 

1868
  • 1868215일 캐나다 노바스코샤(Nova Scotia)주 헬리팩스(Halifax)에서 스코틀랜드 출신인 존 그리어슨과 메리 파레트 사이에서 출생했다.
 
1890
  • 핼리팩스대학을 거쳐 1890년 달하우지대학교(Dalhousie University)를 졸업했다.
 
1894
  • 1894년 파인힐신학교(Pine Hill College)를 졸업하였다.
 
1897
  • 1897년 달하우지 의과대학(Dalhousie Medical College)을 졸업하여 의사자격증을 받았다.
  • 달하우지대학 졸업반 때 해외선교를 위한 학생자원운동에 참여하여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캐나다장로회 해외선교부의 한국 개척선교사 모집 광고를 보고 지원하여 18972월 무렵 윌리엄 푸트(William Foote) 목사, 던컨 맥래(Duncan MacRae) 목사와 함께 선교사에 임명되었다.
 
1898
  • 1898년 목사안수를 받았다.
  • 한국으로 떠나기 직전인 1898716일 핼리팩스에서 레나 베노잇(Lena Venoit)과 결혼했다. 부인과 함께 189897일 캐나다장로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서울에서 어학공부를 하면서 922일 캐나다장로회 한국선교부를 조직하고, 회장은 푸트, 회계는 맥래, 자신은 서기를 맡았다.
  • 맥래와 함께 언더우드 목사 부부의 안내에 따라 107-19일 매켄지 선교사가 사역하였던 소래마을을 방문하고, 20일 서울로 귀환하여 장로회선교회연합공의회(The Council of Presbyterian Missions in Korea)에 참여하였다. 이 공의회는 캐나다장로회 한국선교부를 만장일치로 회원으로 추가하고, 1027일 회의에서 분명한 선교지역을 지정해 달라는 요구에 따라 스왈른(Swallen)과 게일(Gale)의 추천으로 원산항을 중심으로 하여 한반도 북동쪽인 함경도 지역을 맡기로 결정하였다.
  • 선교지역이 결정되기는 하였으나 푸트 부부는 원산으로 바로 떠난 반면, 맥래와 그리어슨 부부는 짐은 제물포항을 통해 배편으로 원산으로 먼저 보내고, 언더우드 부부와 함께 황해도 지역 순회여행을 하기로 하여 남았다. 이 순회여행은 1111일부터 1217일까지 계속되었다.
 
1899
  • 그리어슨 부부와 맥래는 서울에서 어학 공부와 선교 준비를 하다가 189926일 서울에서 출발하여 220일 원산항에 도착하였다. 원산에 도착해보니 먼저 도착한 푸트가 일방적으로 자신과 자신의 부인은 함흥으로 가고, 그리어슨과 맥래는 원산에 남는 것으로 결정해 두고 있었다. 그리어슨과 맥래는 이에 반대하여 결국 원산에 근거지를 두고 당분간 선교현장과 공동체에 친숙해지기 위해 순회여행을 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그는 원산에서 어학 공부를 하면서 진료소를 운영하고, 함흥, 성진, 북청 지역의 선교여행을 하였다.
 
1901
  • 19013월 함경북도 성진에 선교부지를 매입하여 선교부와 진료소를 설치하고 그곳을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했다. 이 진료소는 1916년 제동병원(濟東病院)으로 발전하였다.
 
1902
  • 1902년 간도와 해삼위 지역까지 여행하며 성진을 비롯한 관북지방과 동만주 일대에 교회와 학교를 설립하도록 지원하였다.
 
1905
  • 1905년 가족과 함께 안식년 휴가로 귀국했다가 1906년 성진선교부로 복귀했다.
 
1908
  • 1908113일본군 하마타 상등병을 구타하였다. 자신이 전도하여 믿게 된 함남 단천군 원덕리교회 문성기 장로의 아들 주례를 서기 위해서 말을 타고 하루에 30마일씩 150마일의 산악길을 여행하여 1908113일에 그곳에 도착했다. 도착해보니 일행은 이미 신부집으로 가고 없어 지칠 대로 지친 말 두필을 교회당으로 쓰는 문성기 장로집 앞 말뚝에 매어두고 몇 마일 더 거슬러 올라가 겨우 시간 전에 신부집에 도착했다. 잔치가 한참인데 한 사람이 숨을 헐떡이며 달려와 일본 군인들이 그의 말들을 붙잡아 무자비하게 거리를 달리게 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자 채찍 막대를 가지고 그곳에 도착해보니 4명의 일본군 병사들이 말 두 마리를 번갈아 타고 있었다.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가까이 있던 일본군 병사를 말에서 끌어 내리고, 나머지 병사에게 손으로 잡고 있던 대나무로 된 채찍 막대로 머리를 후려쳤다. 그러자 그 병사는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이 채찍에 맞아 상처를 입은 병사는 일본군 덕원장 헌병분견소에 근무하는 상등병 하마타였다. 이 사건은 결국 덕원군 헌병분견소장 고바야시가 개입하여 일본군 측에서 사과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1909
  • 강화도와 서울지역에서 국권회복운동을 하던 이동휘1908년부터 고향인 함경북도 지역에서 학교를 설립하고 순회강연을 하며 국권회복운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갈수록 일제의 감시와 탄압이 심해지자 이를 피하기 위해 1909년 봄 성진의 그리어슨을 찾아와 관할 구역 내 설교자로 임명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는 이동휘가 국권회복운동을 하고 있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를 기꺼이 성서 매서인으로 임명하고, 1년 후에는 조사로 임명하여 자유롭게 그가 국권회복운동을 하도록 후원하였다.
  • 190910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사건으로 이동휘가 안창호와 함께 용산헌병대에 구금되었을 때 그를 찾아가 면회하였다.
 
1910
  • 19101월 이동휘가 석방되자 다시 함경도 지역에서 조사로 일하게 하였다. 일제 헌병들이 이동휘의 애국강연 활동을 상세히 보고하면서도 함부로 체포할 수 없었던 것은 그 배후에 일본과 동맹국 국민인 그리어슨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동휘는 191083일에 성진에서 한일합방반대 혐의로 체포되어 서울 경무총감부에 구금되었다가 829일 병탄조약이 공포된 후에야 석방되었다.
 
1911
  • 이동휘는 19113월에도 안명근 사건에 연루되어 대무의도로 유배당했다가 풀려난 후에도 함경도 지역에서 그리어슨과 함께 사역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가 심하여 도저히 국내 활동이 불가능하자 국외로 망명을 꾀하려는 이동휘의 국외 망명도 도와주었다.
 
1912
  • 1912년 원산에서 함경노회가 조직될 때 원산, 함흥, 함북대리회 중 함북대리회를 맡았다.
  • 1912년 조수로 의료사역을 담당했던 김영배를 의학공부를 위해 세브란스의학교에 보내고, 진료소를 새로지었다.
 
1913
  • 1913년에는 의료사업에 시간을 집중하여 8천 건을 치료하고 1만여 명에게 복음을 전했다.
  • 191311월 부인과 함께 안식년 휴가로 귀국했다.
 
1914
  • 휴가기간 중이던 1914년 미국 뉴욕에 가서 대학원 공부를 하면서 의료기구와 난방, 조명 장비 등을 구입하고 새 병원 건축을 위한 7천 달러를 모금하였다.
 
1916
  • 19166월 성진선교부로 복귀했다.
  • 19168월 함경노회에서 스코트(William Scott) 선교사, 박창영 목사와 함께 성진 회령 지역을 맡았다.
 
1917
  • 1917년 병원을 30개 병상의 시실로 완공하였다.
 
1918
  • 19183월 함남노회가 조직되고 같은 해 8월 원산 상동교회에서 열린 제2회 함남노회에서 노회장으로 선임되었다.
  • 1918년 여름 자신이 원장으로 있던 제동병원의 간호원들을 대동하고 3주일 동안 이원교회에 출장하여 환자 500여 명을 치료하고 백내장, 낭수종, 복부 등 여러 가지 수술을 실시하여 칭송을 받았다.
 
1919
  • 191937일 성진지역에서 서울과 연계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하던 사람들에게 자신의 집을 비밀 회합 장소로 제공하였다. 이어 39일 주일에는 하나님의 인도에 대한 희망을 설교하며 교인들을 격려하였다. 310성진 만세시위 때 캐나다장로회에서 운영하는 제동병원 앞에서 시위가 시작되어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부르고 관공서, 경찰서가 있는 시내로 확산되었다. 그러자 다음 날 이른 아침부터 일제 군경과 소방대가 출동하여 한국인을 무차별 구타하고 총을 난사하여 부상자가 속출하자 이들을 치료해 주었다. 가슴에 관통상을 입은 한 사람은 병원에서 사망했다. 이날 아침 일찍 성진경찰서에서 로스(Ross)와 함께 호출이 있었으나 밀려든 환자들을 돌보느라 저녁 식사 후에야 경찰서에 가서 취조를 받았다. 그날 이후 담임하던 교회 모든 장로와 많은 교인이 체포 투옥되어 316일 주일 예배에는 참석자가 적었다. 그날 감옥에 갇혀있는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 교회 종을 오랫동안 쳤다. 일제는 이러한 그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겨 매일신보315일자에 성진 소요의 주모자는 야소교 선교사 영국인 크레-인데 백성들은 화근을 없애려고 영국인을 죽인다고 떠들며 분개한다더라고 허위로 보도하였다. 그리어슨은 옥고를 치르는 사람들을 면회하고 교회 여신도들을 교대로 보내 면회하고 사식을 제공하게 했다.
  • 19197월 안식년으로 가족과 함께 귀국하게 되자 교인들이 성진 욱정예배당에서 성대한 송별회를 열어주고 715일 부두까지 배웅하였다.
 
1920
  • 192010월 휴가를 마치고 단독으로 내한하였으나 12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부인이 별세하였다. 장례를 위해 귀국하였다.
 
1921
  • 19213월 세 딸과 함께 돌아와 성진선교부에서 활동을 계속했다. 같은 해 10월 회령ㆍ성진ㆍ해삼위를 관장하는 함북노회 부노회장에 피임되었다.
 
1922
  • 1922년 같은 선교부의 핑글랜드(Mary Howitt Fingland)와 재혼했다.
 
1924
  • 19247월 원산에서 열린 제26회 연례회의에서 종전대로 성진선교부에 배정되어 제동병원 원장과 전지역 의료선교를 담당하고, 보신학교 교장과 성진군 내 교회들을 맡았으며, 성경학원과 주일학교도 도왔다. 성진선교부 총무도 맡았다.
 
1926
  • 1926년 여름 안식년 휴가로 가족과 함께 러시아와 독일, 영국을 거쳐 귀국했다.
 
1927
  • 이때 토론토 웨스턴에 살던 난로주조공장을 운영하는 선교후원자로부터 1천 달러의 기부를 받아 포드 자동차를 구입하여 제동병원에서 사용할 앰뷸런스로 개조해 가지고 19279월 성진선교부로 복귀했다.
  • 19271022일 세 살 먹은 딸 캐슬린(Kathleen)이 사망했다.
 
1930
  • 이 무렵 성진 보신학교 교장을 겸하고 있었는데, 총독부에서 보신학교에 자격있는 교사가 없는 것을 문제삼자, 교사들 가운데 가장 신임하던 김세위를 정식 교사과정을 밟게 하고 비용은 학교가 부담하며, 정식교사가 된 후 적어도 1년은 보신학교에서 근무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김세위는 교사 자격증을 받고 돌아와 보신학교보다 보수가 많은 (회령)공립보통학교 교사로 가게 되었다. 그리어슨이 그에 대해 깊은 배신감을 느끼던 차에 19301월 그가 찾아와 면담을 요청했으나 무시하고 못 본 척하다가 언쟁 끝에 주먹으로 턱을 한 대 쳤다. 김세위는 경찰에 고발했고, 이것이 서양인 선교사가 한국인 교사를 구타한 사건으로 확대되어 언론에 알려지고 동료 선교사와 교회 안에서도 그리어슨을 배척하는 사람들이 일어나 교회 분규 사건으로까지 발전했다.
 
1931
  • 특히 그가 출석하던 욱정교회에서는 선교사와 청년층에 마찰이 생겨 결국 1931년 강희원ㆍ홍순욱ㆍ전홍규ㆍ이면건ㆍ신옥규ㆍ이준산 등 교인 일부가 성진중앙교회로 분립해 나갔다. 함중노회와 선교회에서도 이것을 문제삼기도 했다.
 
1934
  • 1934년 안식년 휴가로 귀국했다가 1935년 은퇴했다.
 
1965
  • 토론토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65598세로 별세하였다.
  • 대한민국 정부는 정부는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참고] 내한선교사사전,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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