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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16일 금요일

1907년 8월 21일, 기독인 의병(정미의병), 김동수, 김남수, 김영구 처형

1907년 기독인 의병(정미의병), 김동수, 김남수, 김영구 처형

 
1907년 정미의병
 
평양 대부흥이 일어났던 1907년은 우리 민족에게 최대 비극의 해였습니다. 헤이그 밀사사건이 터졌고, 이를 빌미로 일본은 고종을 강제 퇴위시킨 후 순종 황제를 위협하여 정미7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이로써 정부 관리 임용권까지 빼앗아 갔으며 국권의 또 다른 상징인 군대마저 해산하여 우리 민족의 저항 능력을 말살하려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해산을 거부한 구한국부대가 있던 지역을 중심으로 의병운동이 일어났으니 이를 정미의병이라고 합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강하기로 소문난 해안 수비대가 있던 강화에서 일어난 의병운동이 치열했습니다.
 
강화도 지역 의병활동
 
강화는 1893년 감리교회가 선교를 시작한 이래 급속한 성장을 이룩하여 1907년 당시 이미 27개 교회에 3천 명이 넘는 교인을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강화 수비대장 출신으로 1905년 세례를 받은 이동휘는 나라를 구하려면 예수를 믿어야 한다면서 강화 전역을 돌며 전도하여 선교사들에게 강화의 바울’(Paul of Kangwha)이란 칭호를 얻었습니다. 그는 마을마다 교회 하나, 학교 하나를 세우는 일동일교’(一洞一校) 운동을 전개, 강화 전역에 30여 개 사립학교를 설립하고 군사훈련과 민족교육을 실시했습니다. 이동휘는 19078월 정미의병이 일어나자 과거 그의 부하였던 연기우, 지홍윤, 유명규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투쟁하다가 김포에서 일본군 헌병대에 체포되었습니다.
 
김동수, 김영구, 김남수 체포
 
810일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강화로 들어온 일본군 헌병대는 민가를 수색하며 의병 가담자뿐 아니라 민족주의자들도 체포했는데, 그 과정에서 잠두교회(현 강화중앙교회) 권사 김동수(1862-1907와 그의 동생 김영구(1881-1907), 사촌동생 김남수 등이 체포되었습니다. 교인들 사이에 아브라함으로 불렸던 김동수 권사는 민족의식이 투철하여 이동휘의 일동일교 운동에 적극 참여했고, 친일파 군수를 앞세워 강화에 침투하려는 일진회를 대한자강회 회원으로 종종 시국 강연을 열어 규탄했습니다. 이 일로 그는 친일파와 일진회에게 미움을 사게 되었고, 결국 의병진압군을 안내하던 일진회원의 밀고로 두 동생과 함께 체포된 것입니다.
 
김동수, 김영구, 김남수 처형
 
이후 821일 일본군은 김동수 권사 일행을 재판에 회부한다면서 끌고 나갔습니다. 재판을 받으려면 갑곶나루에서 배를 타고 인천으로 가야 하는데 갑곶나루 남쪽 1킬로미터 쯤 되는 더리미 해안으로 끌고 가 후미진 곳에 이르러 살해했습니다. 그때 김동수 권사 나이 45, 김남수 44, 김영구 23세였습니다. 의병에 참가했다는 명백한 증거도 없이 재판도 받지 못한 채 희생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흘린 피는 헛되지 않았습니다. 김동수 권사 삼형제의 희생을 계기로 강화 주민들 사이에 기독교는 나라 사랑하는 종교라는 인식이 확산되었고, 그 결과 입교인들이 늘어나 1년 만에 30개 교회에 5천여 명 교인이 출석하게 되었습니다.
 
1908년 데밍 선교사의 선교보고
 
당시 강화와 인천 지방을 관리하던 데밍 선교사의 1908년 선교 보고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강화 사업은 높이 평가받아 마땅합니다. 강화 교회는 독자적으로 장로사(지금 감리사) 한 사람이 주재하며 일을 보아야 할 정도로 커졌습니다. 이는 피의 세례(baptism of blood)의 결과입니다.” 의병운동 이후 오히려 폭발적으로 증가한 강화 지방 교회의 성장 원인을 데밍 선교사는 김동수 권사 삼형제가 흘린 피의 세례에서 찾았던 것입니다.
 
[참고] 이덕주, 한국교회 처음 이야기(서울: 홍성사, 2006), 212-213

2024년 2월 13일 화요일

주문모(周文謨, 1752-1801)

주문모(周文謨, 1752-1801)

 
한국에 입국한 최초의 신부. 순교자. 중국인으로 세례명은 야고보. 포르투갈 이름은 벨로조(Vellozo).
 

1752년 중국 강남 소주(蘇州)의 곤산현(崑山縣)에서 태어났다. 소주 지역은 17세기 초 이래 천주교가 융성하던 곳으로, 주문모가 태어날 당시에는 신자수가 3만 명에 이르렀다. 이러한 지역적인 배경과 주문모가 어려서부터 천주교를 접하였다는 사실은 그의 집안 사람들도 천주교 신자였을 것으로 추정하게 한다. 주문모는 7세에 모친을 잃고 8세에는 부친마저 사망하면서 고모 밑에서 가난하게 자랐다. 그의 고모는 낱에는 수를 놓아 생활비를 벌었고 밤에는 주문모에게 글을 가르쳤다. 그런 가운데 20세가 되어 결혼을 하였으나 3년 만에 상처(喪妻)하고 다시는 결혼하지 않았다. 그는 청년기에 글을 읽으며 과거를 준비하였는데 여러 번 낙방하자 폐기하였고, 장년이 되어서는 북경으로 가 북경교구 신학교를 졸업하고 1791-1794년 사이에 구베아(A. de Gouvea) 주교로부터 사제 서품을 받았다.
 
한편 이승훈을 비롯한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은 1786년 평신도를 사제로 임명하여 성사를 집전케 하는 가성직자단을 조직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 이의 부당성을 깨달은 지도급 신자들은 성사의 집전과 교회의 유지를 위하여 북경 교회에 선교사의 파송을 요청하였다. 이에 윤유일이 1789년과 1790년 두 차레에 걸쳐 북경에 파견되었고, 당시 북경교구장이던 구베아 주교로부터 선교사의 파견을 약속받았다. 이 과정에서 최초의 조선 선교사로 임명된 사람은 중국인 오() 요한 신부(포르투갈 이름은 도스 레메디오스)였다. 구베아 주교가 오 신부를 선택한 이유는 북경에 서양인 선교사가 부족한 현실과 또 박해의 위험을 감안하여 외모가 조선인과 비슷한 중국인 신부의 파견을 결정하였기 때문이다. 오 신부는 1791년 북경을 떠나 국경으로 갔으나 조선 신자들을 만나지 못하였고, 결국 1793년 북경에서 사망하였다. 그 사이 1791년 조상 제사 문제로 진산사건을 겪은 조선 신자들은 1793년에 다시 선교사의 영입을 위해 지황과 박요한을 북경에 파견하였다. 이때 구베아 주교는 오 신부의 후임으로 주문모 신부를 조선 선교사로 임명하였다.
 
구베아 주교로부터 사도직 수행에 필요한 제반 권한을 받은 주문모 신부는 17942월에 북경을 떠나 20여일 후 책문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압록강의 얼음이 풀려 조선에 잠입하기 어렵게 되자, 겨울이 되기를 기다리기로 하고 10개월 동안 만주 교회를 순회하였다. 그러다가 17941224일 드디어 지황 등의 안내를 받아 의주로 입국하였고, 179514일 경에는 서울에 도착하여 계동의 최인길 집에 머물렀다.
 
주문모 신부는 우선 가능한 한 빨리 성직을 수행하기 위해 조선 말 공부에 전념하였고, 여러 지도급 신자들을 접촉하며 조선 교회의 사정도 파악해 갔다. 그런 가운데 성주간이 되자 신자들에게 세례와 보례(補禮)를 주었고, 필담으로 고해성사를 주었으며, 부활절에는 조선에서 최초로 미사를 봉헌하였다. 이렇듯 입국 후 몇 개월 동안은 아무런 어려움 없이 성직을 수행할 수 있었다. 그리고 17954()에는 이존창과 유관검의 안내로 양근의 유유일 집을 거쳐 고산의 이존창과 전주의 유관검 집을 방문한 뒤 상경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7954() 신입 교우인 진사 한영익이 신부의 입국 사실과 거쳐 그리고 인상 등을 이벽의 동생인 이석에게 밀고하였다. 이석은 이 내용을 좌의정 채제공에게 알렸고, 채제공은 다시 정조에게 보고함으로써 주문모 신부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졌다. 다행히 이 사실은 신자들에게 탐지되어 신부는 피할 수 있었지만, 대신 최인길ㆍ윤유일ㆍ지황이 체포되어 1795628(512) 포도청에서 장살(杖殺)되었다.
 
최인길의 집을 떠난 주문모 신부는 강완숙 등 몇몇 교우 집에서 며칠을 보낸 후 지방으로 피신하였다. 그리하여 경기도 양근의 권가 집에서 3일을 머물렀고, 충청도 연산의 이보현 집에서 2개월 가량 머무는 등 1년 정도 지방에서 생활하며 전교 활동을 하다가 17965()에 서울로 돌아왔다. 서울에서는 주로 강완숙의 집에서 거처하였지만, 이후에도 박해를 피해 여러 차례 지방으로 피신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1798년에는 반년간 피신하였다가 이듬해에 상경하였고, 1799년 겨울에 다시 지방으로 내려갔다가 18004()에 서울로 돌아왔다.
 
주문모 신부는 교회의 조직화를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예를 들어 최창현을 총회장에, 강완숙을 여회장에 임명하는 등 회장제(會長制)를 설정하여 교회를 효율적으로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기틀을 마련하였으며, 특히 여회장을 임명한 것은 여성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반영한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리고 1797년경에는 교리 교육과 전교를 목적으로 명도회를 설립하고 정약종을 회장에 임명하였다. 명도회는 북경에 있던 단체를 모범으로 조직된 일종의 비밀결사로, 박해 시대 조선 교회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아울러 1796년 황심(黃沁, 토마스)을 북경에 파견한 이래 거의 매년 북경교구와 연락을 유지하였으며, 서양 선교사의 영입에도 관여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주문모 신부의 입국 직전 4천 명이었던 신자수는 1801년에 1만 명으로 증가하는 성장을 이룩하였다.
 
한편 18004()에 상경하여 여러 사람의 집을 전전하던 주문모 신부는, 이듬해 신유박해가일어나자 2()에 박동(礡洞)의 양제궁(良娣宮)3일간 머물다가 황해도 황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자신을 체포하려는 과정에서 무고한 신자들이 고통을 받게 되자, 다시 돌아와 424(312) 의금부에 자수하였으며, 포도청 의금부에서 신문을 받은 뒤 531(419)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수원교구 어농리 성지(경기도 이천군 모가면 어농리 풍덕 마을)에 그의 가묘가 조성되어 있다.
 
[참고] 한국가톨릭대사전

윤유일(尹有一), 1760~1795

윤유일(尹有一), 1760~1795

 
을묘박해 순교자. 한국 교회 최초의 밀사. 세례명은 바오로. 또 다른 이름은 윤인박.
 

1760년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금사2리 점들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 윤장(尹鏘)을 따라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 한강개로 이사하였다. 그는 한 마을에 살던 권철신의 문하에 출입하였고, 권일신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1786년 이승훈 등 교회의 지도자들은 가성직제도를 만들어 평신도가 성사를 집전하고 있었다. 그런데 유항검에 이해 평신도의 성사 집전이 교리에 위배된다는 의문이 제기되자, 이승훈 등은 이 문제를 북경 주교에게 문의하기로 하고, 1789년 예비 신자였던 윤유일을 북경에 파견할 밀사로 선정하였다.
 
북경에 도착한 윤유일은 1790130일 이승훈에게 세례를 주었던 그랑몽 신부를 만나기 위해 북당(北堂)으로 갔다. 그러나 예수회가 중국에서 철수하게 되어 그랑몽 신부는 이미 광동으로 떠나고 없었다. 윤유일은 대신 라자로회의 선교 단장인 로(Raux, 羅廣祥) 신부를 만났고, 이어 남당(南堂)으로 가 구베아(Gouvea, 湯士選) 북경 주교에게 이승훈의 편지와 함께 조선 교회의 탄생 소식을 알렸다. 윤유일은 북경에 머무는 179029, 북당에서 로 신부로부터 조건부 세례를 받았고, 같은 날 구베아 주교로부터 견진성사도 받았다. 대부는 예수회원이며 화가인 판지(Panzi) 수사였는데, 그는 윤유일의 모습을 그려 로마로 보내기도 하였다.
 
17907월 윤유일은 다시 한번 북경에 파견되었다. 구베아 주교의 사목 서한을 받은 조선 교회에서는 성직자를 영입하기 위해 재차 윤유일을 북경으로 보냈던 것이다. 그리하여 오()라는 예비 신자와 함께 성절사겸 사은사(聖節使兼謝恩使) 일행을 따라 북경에 간 그는 구베아 주교를 만나 신부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조선 선교에 관심이 많았던 구베아 주교는 윤유일의 두 번째 방문을 받고 마침내 조선에 선교사를 파견하기로 약속하였다. 이에 윤유일은 1791년 봄 동지사행이 돌아가는 길에 책문(柵門)에서 만날 것을 약속하고, 179011월 미사 경본ㆍ성작ㆍ제의 등과 포도주 담그는 법을 배워 귀국하였다.
 
한편 구베아 주교는 17913월 도스 레메디오스(dos Remedios) 신부를 최초의 조선 선교사로 선발하였다. 1791년 봄 윤유일은 약속대로 레메디오스 신부를 맞이하기 위해 책문까지 갔으나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런 가운데 1793년 말 조선 교회 지도자들은 신부 영입을 위해 다시 한번 지황(池璜)과 백요한(혹은 박요한)을 북경에 파견하였다. 그 결과 1794년 말 주문모 신부가 파견되었는데, 이때 윤유일은 의주까지 마중을 나갔고, 지황ㆍ최인길 등과 함께 주문모 신부를 안내하여 179514일 서울에 도착하였다.
 
서울에 도착한 주문모 신부는 179545일 부활축일에 조선에서는 처음으로 미사를 봉헌했고, 윤유일ㆍ최인길 등과 함께 양근ㆍ전주ㆍ내포 지방을 여행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주문모 신부의 입국 사실이 한영익(韓永益)의 고발로 조정에 알려지자, 비밀리에 신부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졌다. 하지만 주문모 신부는 교우들의 연락을 받고 강완숙의 집으로 피신했으며, 그를 대신해 윤유일ㆍ지황ㆍ최인길이 체포되었다. 결국 윤유일 등 3명은 1795628일 포청에서 비밀리에 장살된 뒤 강물에 버려졌다. 현재 어농리 성지(경기도 이천군 모가면 어농리 풍덕마을)에 그의 가묘가 세워져 있다.
 
[참고] 한국가톨릭대사전

김범우(金範禹, 1751-1787)

김범우(金範禹, 1751-1787)

 
한국 천주교회의 첫 희생자인 김범우(토마)와 아우인 이우(履禹, 바르나바, ?-1801), 현우(顯禹, 마태오, ?-1801). 김범우의 자는 정지(正之), 본관은 경주. 이우와 현우는 김범우의 서제(庶弟)로 여섯째와 일곱째였다.
 

김범우는 1751(영조 27) 서울 남부의 명례방(明禮坊, 현 명동 성당 부근)에서 중인 역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래 그의 집안은 대대로 무관을 역임했으나, 부친 의서(義瑞)가 역관 시험에 합격하여 사역원의 역원 판관(譯院判官)에 오르면서 역관 집안으로 이름을 내게 되었다.
 
김범우는 집안의 장남으로 16세 되던 1767년에 천녕(川寧) 현씨 집안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이듬해 인고(仁考)를 낳았다. 그리고 1773년 역과 증광시에 합격하여 종6품인 漢學偶語別主簿)에 올랐으며, 1783년에는 셋째 아우 적우(績禹)가 역과 식년시에 합격하였다. 이 무렵부터 그는 이벽, 이승훈 등 초기의 천주교 신자들과 가깝게 지냈으며,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를 받고 돌아온 해 가을에 수표교 인근에 있던 이벽의 집에서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고 입교하였다. 이 세례는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이라고 설명되는 9()의 세례식에 이어 두 번째로 이루어진 것이었는데, 그와 함께 세례를 받은 사람은 이존창, 최창현, 최인길, 지홍(池洪) 등이었다.
 
세례를 받은 뒤 김범우는 즉시 윤지충, 최필공, 김종교, 홍익만, 변득중, 허속 등에게 교리를 전하거나 교회 서적을 빌려 주었다. 또 아우인 이우와 현우에게도 교리를 가르쳐 입교시켰으며, 스스로 교리를 철저히 실천하였다. 뿐만 아니라 1784년 겨울부터는 자신의 집을 신자들의 집회소로 제공함으로써 명례방 공동체가 탄생하도록 하였다. 이후 초기 신자들은 이곳에서 정기적으로 집회를 갖게 되었다. 그러다가 1785년 봄 이벽의 주도로 집회를 갖던 이승훈, 정약전ㆍ정약용 형제, 권일신ㆍ권상문 부자, 김범우 등은 형조의 사령들에게 발각되어 형조로 압송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을사 추조 적발 사건이다.
 
당시의 형조판서 김화진은 압송되어 온 사람들이 대부분 남인 양반 집안의 자제들인 것을 알고는 대부분 훈방 조치하였지만, 중인인 김범우만은 그대로 투옥하고 형벌로 배교를 강요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권일신은 아들과 이윤하, 이총억, 정섭 등과 함께 형조판서 앞에 나가 압수한 성상을 돌려주고 김범우와 함께 자신들을 처벌해 달라고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또 최인길은 천주교 신자임을 고백하였으나 형조에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 형조판서는 김범우가 끝까지 배교하지 않자 유배형을 언도하였다.
 
당시 김범우의 유배지로 결정된 곳은 충청도 단양(또는 경상도 밀양의 단양)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유배 생활을 하면서도 공공연히 신앙을 실천하며 전교하다가 1786년 가을(혹은 1787년 초) 형조에서 받은 형벌의 여독으로 사망함으로써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희생자가 되었다.
 
한편 그의 아들 인고는 경상도 밀양군 삼량진읍 굴암리로 이주하여 살았다. 한편 김이우는 장성한 뒤에도 혼인하지 않고 최필제, 이용겸, 손경윤, 현계흠 등과 교류하면서 전교 활동에 노력하였으며, 1794년 말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뒤에는 아우 김현우와 함께 그를 만나 성사를 받고, 주 신부가 지방으로 피신하기 전에는 얼마 동안 자신의 집에 피신처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형제가 함께 체포되었는데, 이후 이우는 포청의 옥에서 문초를 당하다가 장사(杖死) 순교하였고, 현우는 72(522) 강완숙, 강경복, 문영인 등 8명과 함께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참고] 한국가톨릭대사전

모우리(Eli Miller Mowry, 1878-1971) 한국명 모의리(牟義理),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ㆍ목사

모우리 (Eli Miller Mowry, 1878-1971) 한국명 모의리 ( 牟義理 )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ㆍ목사 .   【 1878 년 】 미국 오하이오주 벨빌 (Bellville) 근교에서 사무엘 모우리 (Samuel Mowry, 1850-1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