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15일 월요일

던칸 머독 맥레 [Duncan Murdoch MacRae, 1868~1949] 마구례(馬求禮ㆍ馬具禮), 캐나다장로회ㆍ캐나다연합교회 선교사, 목사

던칸 머독 맥레 [Duncan Murdoch MacRae, 1868~1949]

마구례(馬求禮馬具禮), 캐나다장로회ㆍ캐나다연합교회 선교사. 목사.
 

1868
  • 18681115일 캐나다 노바스코샤주 케이프 브레튼(Cape Breton)에서 교사와 등대지기였던 레임 도널드 맥레(Lame Donald MacRae)와 메리 프레이저(Mary Fraser)의 둘째 아들로 출생했다.
 
1884
  • 16세 되던 해인 1884년 바덱(Baddeck)으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대장장이 견습공으로 있다가한 복음전도자의 전도를 받고 복음 사역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바덱아카데미에 입학하여 후에 결혼하게 될 에디스 서덜랜드(Edith Frances Sutherland, 175-1956.7.27.)를 만났다. 그러나 학교를 다마치지 못하고 피구(Pictou)에 있던 픽투아카데미로 전학하여 졸업했다.
 
1893
  • 1893년 잠시 상점 점원으로 고용되어 있다가 핼리팩스에 있던 달하우지대학교에 입학하였다.
 
1895
  • 1895년 월 파인힐 장로회신학교 출신 독립선교사 윌리엄 매켄지(William John McKenzie)의 죽음 소식을 듣고, 한국에 선교사로 갈 것을 결심했다.
 
1896
  • 고학으로 1896년 봄 문학사 학위를 받고 졸업했다.
  • 파인힐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897
  • 신학교에 들어간 189612월호 신학교 교지(The Theologue)에 럽(Alexander Francis Robb)이 기고한 머나먼 한국으로부터”(From Far-Off Korea)라는 글에서 소래교회 교인을 대표하여 서경조가 쓴 선교사 요청편지를 보고 결심을 굳히고 1897년 선교사 지원서를 제출했으나 임명되지 못했다해외선교부는 두 사람만 파송할 수 있는 재정을 가지고 있었고, 이미 그리어슨 의사와 푸트 목사를 임명해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 맥레는 나는 급여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나의 지원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동료들과 친구 학생들의 마음을 열 것을 기대하여 하나님만 바라볼 것입니다라는 편지와 함께 지원 약속 편지를 동봉하여 지원서를 냈다. 파송에 필요한 경비는 졸업식 전에 매리타임(Maritime) 지역 교회들에서 모아주었다.
 
1897
  • 1898년 신학교 졸업식에서 고별사”(Valedictory)를 할 수 있었다.
 
1898
  • 목사후보생으로 신학과 목회 훈련을 받고 1898년 졸업하였다.
  • 그 후 그리어슨과 푸트는 결혼하여 부인들과 함께 출발하게 되어 캐나다장로회 한국 파견 선교사는 5명으로 늘어나게 되었고, 이 다섯 명은 189881일 밴쿠버를 출발했다. 일본을 거쳐 189895일 부산항에, 97일 제물포항에 도착하여 1박을 하고 98일 서울에 도착했다.
  • 서울에서 어학공부를 하면서 922일 캐나다장로회 한국선교부를 조직하였는데, 회장은 푸트, 서기는 그리어슨, 회계는 맥레가 맡았다.
  • 그리어슨과 함께 언더우드 목사 부부의 안내에 따라 107-19일 매켄지 선교사가 사역하였던 소래마을을 방문하고, 20일 서울로 귀환하여 장로회선교회연합공의회(The Council of Presbyterian Missions in Korea)에 참여하였다. 이 공의회는 캐나다장로회 한국선교부를 만장일치로 회원으로 추가하고, 1027일 회의에서 분명한 선교지역을 지정해 달라는 요구에 따라 스왈른(Swallen)과 게일(Gale)의 추천으로 원산항을 중심으로 하여 한반도 북동쪽인 함경도 지역을 맡기로 결정하였다.
  • 선교지역이 결정되기는 하였으나 푸트 부부는 원산으로 바로 떠난 반면, 맥래와 그리어슨 부부는 짐은 제물포항을 통해 배편으로 원산으로 먼저 보내고, 언더우드 부부와 함께 황해도 지역 순회여행을 하기로 하여 남았다. 이 순회여행은 1111일부터 1217일까지 계속되었다.
 
1899
  • 그리어슨 부부와 맥래는 서울에서 어학 공부와 선교 준비를 하다가 189926일 서울에서 출발하여 220일 원산항에 도착하였다. 원산에 도착해보니 먼저 도착한 푸트가 일방적으로 자신과 자신의 부인은 함흥으로 가고, 그리어슨과 맥래는 원산에 남는 것으로 결정해 두고 있었다. 그리어슨과 맥래는 이에 반대하여 결국 원산에 근거지를 두고 당분간 선교현장과 공동체에 친숙해지기 위해 순회여행을 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 맥레는 원산에서 어학공부와 그리어슨의 진료소를 돕는 일을 하면서 함흥ㆍ성진ㆍ북청 지역의 선교여행을 하였다.
 
1900
  • 1900813일 일본 요코하마에서 에디스 서덜랜드와 결혼하고 부인과 함께 선교지로 다시 돌아오는 길에,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의화단사건 때문에 선교지가 한국으로 변경되어 가고 있던 매컬리(Miss Louise H. McCully)와 일본 고베에서 만나 같은 배로 916일 원산선교부로 복귀하였다. 그는 그리어슨과 함께 1900년부터 함흥ㆍ성진 지역을 순회하고 선교부의 설치를 검토하였다.
 
1904
  • 19015월 그리어슨이 가족을 데리고 성진으로 이주하여 그곳에 선교부를 개척하자 맥레도 함흥선교부 설치를 요구하여 1904년 초에 선교부가 설치되고, 이주 정착하여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하려 하였으나 마침 러일전쟁이 일어나 원산으로 철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전쟁 후에 다시 함흥으로 복귀하여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하였다.
 
1905
  • 1905년 함흥에 정착하면서 장차 교회ㆍ병원ㆍ학교를 짓기 위하여 선교부지로 함흥 성내 신창리에 있는 망덕(望德) 기지를 매입하였다. 그 땅은 원래 무당들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동네 공동 소유지였다. 이주한이라는 교인이 그 마을의 원로인 박정익과 교섭하여 600냥에 계약을 체결하고 구입하였다.
 
1906
  • 1906년 초에 재정고문관으로 부임한 일본인 가미야가 망덕 기지를 탐내고 일본군을 동원하여 그 기지에 경계 말뚝을 박아두었다가 두 채의 건물까지 지었다. 이 문제는 맥레의 항의로 영일간에 외교문제로까지 발전했다.
  • 1906년에는 맥밀한(K. McMillan) 여의사와 메어(C. F. Mair) 여선교사가 함흥선교부에 합류하였다.
 
1907
  • 1907118-26일 통감부에서 파견한 마야마(間山)와 영국영사관의 영사대리 홀름즈의 합동조사 후 함흥의 철거되는 관립학교 부지와 교환하자는 타협이 이루어져 해결되었다. 이후 망덕 기지에 살던 일본인으로부터 그 기지를 다시 선교부가 사지 않겠느냐는 제안이 들어와 멕레는 기꺼이 그 제안을 받아들여 다시 매입하여 그곳에 1천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자 예배당인 신창리교회를 건축하였다.
  • 1907년 영(L. L. Young) 선교사가 함흥선교부에 합류하여 선교활동에 활기를 더했다.
  • 19076월 함흥 연포에서 주민들이 염전세를 거부하자 일본군이 출동하여 살상하고 체포하여 재판에 넘긴 사건이 일어났다. 이런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나자 주민들은 맥레 선교사의 서재에 몰려가 밤 늦게까지 그와 함께 대책을 의논하였다. 이 무렵 맥레의 심경은 고향에 보낸 1907711일자 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 “그날 저녁은 거의 지샜다. 한국인들이 학대당하고 있기 때문에 나의 마음은 무겁다... [연포]...는 며칠 전에 일본인의 기병과 포병과 보병과 경찰로 폐허가 되었다... 사격이 끝나고 칼이 흘린 피로 엉겨붙었을 때 걸을 수 있는 자들은 읍으로 끌어가고, 상처 입은 사람들은 그들의 핏속에 몸부림치도록 남겨졌다... 선교사들을 원치 않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그런 잔인한 대학살에서 편들어 줄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과 함께 괴로워해야 한다. 그것을 폭로하라. 하늘이 억압받은 자의 부르짖음에 반향할 때까지 그것을 폭로하라... 마치 나의 펜에서 피가 떨어지는 것 같다. 나의 마음은 무겁다. 사람은 무엇인가 하기에 너무 무력하다.” 마침 이 사건이 일어났을 무렵 캐나다장로회 해외선교부 총무 맥캐이(Dr. G. L. McKay)가 한국을 방문하여 원산지역을 돌아보고 있어서, 맥레는 원산으로 그를 찾아가 그 사건을 보고하고 함께 함흥지역을 돌아보기 위해서 함흥에 왔다. 이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맥캐이는 당시 영국인 베델이 경영하던 대한매일신보영자신문인 The Korea Daily News 1907710일자에 사건의 전말을 폭로하여 함흥에서의 무서운 대량 학살”(Terrible Massacre at Hamheung)이라는 제목으로 보도하였다.
 
1908
  • 190823일 첫 딸인 엘리자베스 펄(Elizabeth Pearl, 1908-1966)을 낳았고 이 해에 안식년 휴가로 귀국하였다.
 
1909
  • 일제 헌병 경찰들이 선교사들과 기독교인들의 집회를 조사하고 있던 1909131일부터 21일까지 맥레가 시무하던 함흥읍교회에서 집회가 열렸다. 이때 강사는 1907년 그 교회 초대 장로로 장립되어 맥레의 조사를 맡고 있던 김창보가 맥레의 한국어 어학선생인 조희림이 맡았다. 명분은 교회의 연설회였지만 예언자적 목소리로 민족적 위기를 경고하고 민족의식의 각성을 촉구한 애국계몽운동이었다. 이에 일제 경무국장 마쓰이가 226일자로 이를 통감부 소네 부통감에게 보고하였다.
  • 190911월 함흥선교부로 귀환하였다.
 
1910
  • 1910227일 둘째 딸 헬렌 프레이저(Helen Fraser, 1910-2001)를 낳았다.
 
1913
  • 19137월 회령에서 열린 제15회 연례회의에서 함흥선교부에 배정되어 청해리교회에서 목회하면서 함흥 남부구역을 맡아 그 구역의 조사ㆍ권서들을 감독하며 함흥읍과 남부구역의 초등학교들도 감독을 했다.
  • 19136월 부인이 홀로 된 어머니와 함께 지내기 위해 캐나다로 돌아갔다. 같은 해 10월 어머니의 부음을 들었으나 선교사역 때문에 귀국하지 못하였다.
 
1914
  •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에 휴가를 얻어 중국과 러시아를 거쳐 캐나다로 귀국하였다.
 
1917
  • 191783년만에 다시 부인과 함께 함흥선교부로 귀환하였다.
 
1918
  • 19187월 원산에서 열린 제20회 연례회의에서 함흥 남부지역 목회를 책임지고, 신창리교회에 협동목사로 있으면서 영생학교와 사경회, 원산성경학원을 돕고 블라디보스토크 선교를 돌아보기도 했다. 부인은 신창리교회에서 여성사역을 맡고 사경회와 전도부인 감독하였다.
 
1919
  • 191933일 함흥만세시위가 일어나 6일까지 이어지자 맥레는 일본 무장경찰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시위현장을 찾아가 일제의 폭력을 감시하고 체포된 사람들을 풀어주도록 일경을 압박하였다. 함흥 만세시위에서 일제의 가혹한 탄압을 목격한 그는 이를 영국영사관에 알리고 조선총독부에 항의하기 위해서 서울에 와서 1919320일자로 상세한 진술서를 실명으로 발표하였다.
 
1920
  • 192010월 부인의 일시적 시력 상실과 질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휴가를 내고 수술할 병원이 있던 미국 로체스터로 건너갔다. 메이요병원에 입원하여 수술과 치료를 받은 후 19217월 퇴원하였다. 그러나 선교현장에 돌아올 만큼 건강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부인과 아이들은 캐나다에서 친정 어머니와 함께 지내게 하고 그해 말경 홀로 선교현장에 돌아왔다.
 
1922
  • 19226월 원산에서 열린 제24회 연례회의에서 함흥선교부에 배정되어 홍원지역 목회를 책임지고, 함흥 제혜병원의 재정과 건축물 감독을 맡았으며 성경학원을 도왔다.
 
1923
  • 19239월 부인은 가족과 함께 선교지로 귀환하였다.
 
1924
  • 19247월 원산에서 열린 제26회 연례회의에서 함흥선교부에 배정되어 영생여학교와 여성경학원을 돕고, 함흥선교부의 총무를 맡아 활동하게 되었다.
 
1928
  • 1928년 가을 안식년 휴가로 가족과 함께 유럽을 거쳐 귀국하였다.
 
1930
  • 19304월 가족을 캐나다에 남기고 홀로 선교현장에 복귀하였다. 그 무렵 성진교회에서 선교사와 교회 청년들 사이에 분규가 발생하여 심각한 상태에 있었다. 그는 이문제의 화해위원으로도 활동했다.
 
1930년대
  • 1920년대 중반부터 논의되던 기독교학교의 한국인 이양에 대해 찬성하였으나, 총독부에 등록하는 학교인가(승격)운동에 대해서는 극구 반대하였다.
  • 1930년대에 일어난 조선총독부의 신사참배 강요에 대해서는 절대로 타협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여, 타협해서라도 학교의 존속을 추구하자던 젊은 선교사들과 자주 대립하였다.
 
1935
  • 부인에게 1935228일자 편지에서 “2년전(1933) 학교의 학생들에게 비행기를 모금하라는 명령이 발표되었소. 우리 여학교가 모금했었소. 이제 학교의 교사들에게 신사를 세우기 위한 돈을 기부하라는 명령이 나왔소... 관리들은 모두 사람들을 신도주의로 개종하도록 하고 신사들을 개선하는 데 열중하고 있소라고 쓰고 있다.
 
1937
  • 그는 19371월 은퇴하고 같은 해 봄에 귀국하여 한국의 신사참배 문제의 심각성을 알리려 노력하였다. 그는 귀국 후 193765일자 암스트롱(A. E.Armstrong) 총무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신사참배 문제는 심각하고 긴급합니다. 해외선교위원회는 이것에 대해 그들이 무엇을 하려고 하든 곧 결정해야 합니다. 이것은 또한 여선교회위원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다면 내가 그냥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썼다.
 
1938
  • 1938년 강연에서 선교사들이 실제로 이교의 사당에서 예배하고 있으며 일본인 관리들과 타협하고 있다는 요지의 주장을 하여 선교를 후원하던 한 여성의 항의를 받기도 하였다.
 
1949
  • 그는 노바스코샤주 바덱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9491281세로 별세하여 바덱의 세인트앤드루 공원묘원에 안장되었다.
  • 1956년 별세한 부인도 남편 옆에 묻혔다. 첫째 딸 엘리자베스 펄은 캐나다에서 베이컨(Roland Clinton Bacon) 목사와 결혼한 후 남편과 함께 1931년 캐나다연합교회 선교사로 내한하여 회령선교부에서 활동하였다.
 
[참고] 내한선교사사전,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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