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머 베절릴 헐버트 [Homer Bezaleel Hulbert, 1863~1949]
흘법(訖法)ㆍ허흘법(許訖法)ㆍ할보(轄甫)ㆍ허할보(許轄甫), 미국미감리회 선교사, 교육가.
【1863년】
- 1863년 1월 26일 미국 버몬트주 뉴헤이븐에서 목하이며 미들베리대학(Middlebury College)의 학장이었던 캘빈 헐버트(Calvin Butler Hulbert)와 다트머스대학(Dartmouth College) 창립자 후손이자 인도선교사의 딸인 메리 우드워드(Mary Woodward) 사이의 3남 중 차남으로 출생했다.
【1886년】
- 엄격한 청교도 가정에서 자라 신학을 공부한 헐버트가 한국과 연을 맺게 된 것은 한국 최초의 근대교육기관인 육영공원의 교사로 내한하면서이다. 1882년 5월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이후 보빙사로 미국을 다녀온 민영익ㆍ홍영식 등이 서양의 신식교육기관 설치의 필요성을 고종에게 건의하였고 이에 따라 재한 미국공사인 푸트(Lucius H. Foote)에게 미국인 교사 3인의 청빙을 요청했다. 이 통보를 받은 미국 실무 교육국장 이튼(John Eaton)은 헐버트의 부친과 대학동창 관계로 평소 잘 아는 사이라 당시 유니언신학교(Union Theological Seminary)에 재학 중이던 두 아들 중 한 아들을 보낼 것을 권유하였다. 당시 형 헨리(Henry W.)는 졸업반이어서 곧 졸업하는 형을 보내려 하였으나, 2학년에 재학 중인 동생 호머가 자원하였다. 미국 정부는 1885년 4월 헐버트를 비롯하여 길모어, 벙커를 선정하여 재한공사 푸트에게 통보하였다. 그러나 갑신정변 이후라 정국이 매우 혼란하여 연기되었다가 1886년 7월 4일 내한하였다.
- 한국에 온 후 공식적인 첫 활동은 육영공원의 운영과 교육내용 및 방법 등을 정한 규약문 〈육영공원설학절목(育英公院設學節目)〉을 제정하는 일이었다. 이 작업은 헐버트 일행이 내한한 지 70여 일 만의 일이었다. 육영공원 문이 열리기 10일 전 1886년 9월 17일 〈설학절목〉을 완성하여 고종에게 제출하였다. 이 규약은 근대적 교육에 필요한 규칙서안이다. 육영공원의 운영 경비 등은 조선 왕실이 맡았으나, 교육은 전적으로 외국인 교사들에게 위임하였다. 이때 개설된 교과목은 영어ㆍ역사ㆍ과학ㆍ지리ㆍ수학 등 서구식 교과목이었다. 육영공원의 학생들은 주로 젊은 현직 관리 및 고급 양반 자제들 가운데 선발하였다.
【1888년】
- 육영공원 교사 활동 1차 계약기간이 1888년 4월로 만료되자, 3명의 교사 중 길모어는 급료인상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이유로 귀국하였으나 헐버트와 버어는 계약기간을 3년간 연장하여 1891년까지 재직하였다.
【1890년】
- 1890년 언더우드 주관아래 발간된 『한국어사전』 편찬 작업에 게일과 함께 참여하였다.
【1891년】
- 초기 학습 진도는 매우 효과적이고 빨랐으며 교과목 중 가장 흥미를 끌었던 과목은 만국지리(萬國地理)였다. 학생들이 세계지리에 큰 관심을 보이자, 헐버트는 한글판 최초의 천문도 및 세계지도를 소개한 『ᄉᆞ민필지(士民必知)』를 1891년에 펴냈다. 이렇듯 내한한 지 4년 6개월 만에 외국인으로서 순한글판 세계지리서를 편찬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남다른 한국어 실력이 큰 힘이 되었다. 앞서 내한한 언더우드와 아펠젤러는 헐버트를 가리켜 “그는 영어로 하는 것 못지않게 한국말로 훌륭히 설교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평한 바 있다.
- 1891년 2차 계약기간이 끝날 무렵 원생들의 학습에 대한 열기도 식어가고 육영공원 운영비와 외국인 교사급료 축소에 따라 조선 왕실은 교사 1명만을 고용키로 하였다. 이에 헐버트는 사임하고 1891년 12월 말 부인 메이 한나(May Belle Hanna, 1866-1948.9.25.)와 유럽을 거쳐 귀국하였다. 한국을 떠나기 전날 밤 아펜젤러가 찾아와 함께 계속 활동할 것을 권유했으나 그는 “조선 왕실의 부패와 무지를 지적하며 왕실을 위해서 일한다는 것은 무익하다”고 하였다고 한다.
【1892년】
- 1892년 1월 「한국유기(韓國留記, 朝鮮消息, The Korean Repository」 창간호에 “한국어”(The Korean Alphabet) 논문을 발표할 만큼 한국어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1893년】
- 1893년 9월 미국 미감리회 선교사 자격으로 가족이 함께 다시 내한함으로 한국에서의 2차 활동을 하였는데, 이때부터는 주로 출판을 통한 문서선교 활동을 하였다. 그의 활동은 교파를 초월하였는데, 감리교 소속 선교사였으나 언더우드가 주관하던 장로교 새문안교회에서 설교를 맡기도 하였고, 동대문 밖에 새로 세워진 볼드윈 기념예배당 일을 주관하는 한편 문서선교활동을 주로 하였다.
- 1890년 배재학당 내에 한국 최초의 근대적 인쇄출판소인 삼문출판사가 설립되면서 그의 문서선교는 더욱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삼문출판사의 책임은 본래 올링거(F. Ohlinger) 목사가 맡고 있었으나 1893년 8월 싱가포르로 떠나면서 헐버트가 책임을 맡게 되었다. 삼문출판사의 책임을 맡자, 상하이에서 타자기를 여러 대 구입하는 등 인쇄소 설비를 확대하였다. 책임을 맡은 지 9개월 만에 1백만여 장의 전도지와 전도 문서를 인쇄ㆍ출판하였으며, 출판사 운영일체의 비용도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 만큼 일정한 궤도에 올려놓았다. 1896년 4월 창간된 「독립신문」도 삼문출판사에서 인쇄되었다.
【1895년】
-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에 참여하였다. 당시 ‘국왕탈취미수사건’이라 불렸던 이 사건은 바로 앞서 있었던 명성황후 시해사건(1895.10.8.) 이후 고종의 불안한 신변을 교대로 보호하던 언더우드, 에비슨, 헐버트 등 미국인 선교사들과 친미적 ‘정동파’ 인사들이 중심되어 임금을 미국공사관으로 옮기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 사건의 진위는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1901년】
- 1901년부터 본인이 직접 발간 책임을 맡았던 The Korea Review(「韓國評論」)에 거의 매호마다 한국 관련 논문을 발표하여 본격적인 한국학 연구활동을 하였다. 1906년 12월 정간될 때까지 한국민족의 기원 및 민속ㆍ풍습ㆍ역사ㆍ언어ㆍ교육ㆍ재원ㆍ종교ㆍ산업ㆍ예술 등 한국에 관한 전 분야를 폭넓게 영문으로 발표하여 한국을 세계에 알렸다.
【1903년】
- 1903년 『대동기년』을 출판하였다.
- 1903년 10월 3일 창립된 한국YMCA 초대 회장에 선임되어 한국YMCA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1905년】
- 고종의 두터운 신임을 받은 헐버트는 이후 한국 정치문제에 더욱 깊이 관여하였다. 그는 러일전쟁이 종전에 접어들면서 한국에 대한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의 실체가 드러나자, 반일 입장으로 선회하였다. 특히 가쓰라ㆍ태프트 밀약(1905.7.29.)과 제2차 영일동맹(1905.8), 포츠머스조약(1905.9) 체결 이후 한국이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될 위기를 체감하면서였다. 고종황제도 위기감을 절감하며 조미수호통상조약 제1조에 “제3국으로부터 불공경모(不公輕侮)를 당할 때는 거중조정 함으로써 원만한 협의를 이룩하고 그 우의를 표시한다”는 조항에 따라 미국이 나서줄 때라고 판단하였다. 이러한 판단에 따라 이 뜻을 미국 정부에 전할 밀사로 헐버트를 지목, 비밀리에 파견하였다. 1905년 11월 18일 새벽 을사늑약이 체결되던 바로 이날 헐버트는 워싱턴에 도착, 백악관으로 직행하여 황제의 친서를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전달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 사안은 국가 간의 외교문제이므로 국무성에 전달하라고 하여 국무성을 찾아갔으나 장관이 만나주지 않아 다시 백악관을 찾아 사정의 중요성을 말하고 대통령 면회를 간청하자 비서는 “헐버트씨! 우리는 이미 그 친서의 모든 내용을 알고 있소. 당신은 이미 국무성에 가보라는 지시를 받았으므로 여기서는 아무 것도 할 일이 없소”라고 했다. 훗날 헐버트는 미국 정부의 이상과 같은 행위를 가리켜 “미굿은 굿바이 한마디 없이 가장 모욕적인 방법으로 한국 민족을 배신했다”고 비판하였다.
- 1905년 『한국사』(The History of Korea, 2 vols)을 출판하였다.
【1906년】
- 1906년 『대한제국의 멸망(The Passing of Korea)』를 단행본으로 출판하였다.
- 워싱턴 밀사 활동이 무위로 끝난 1906년 6월 8일경 3차 내한, 또 다시 한국 정부를 위해 활동할 기회를 맞이했는데 바로 헤이그 특사 사건이다. 1907년 6월 제2차 세계평화회의가 헤이그에서 개최된다는 사실을 알고 내한한 그는 이 정보를 고종에게 알리자, 헐버트를 일본을 제외한 모든 조약 국가의 특명전권대사에 임명하려 했다. 그러나 헐버트는 미국인 민간인 신부이기에 조언자 역할을 할 수 있을 뿐이니 한국인을 대표로 파송할 것을 조언하였다.
【1907년】
- 1907년 4월 헐버트는 가족과 귀국한다는 명목으로 스위스를 거쳐 베를린에 건너가, 스테드(W. T. Stead) 기자를 만나 한국의 처지를 호소하였다. 밀사로 임명받은 이상설 등 명도 6월 24일에 헤이그에 도착 합류하였다. 도착 즉시 각국 대표에게 한국의 사정을 호소하는 호소문을 배부하였는데 이 호소문 또한 헐버트에 의하여 사전에 불어로 번역되었다. 이 호소문은 6월 30일자 Courrier지에 전문이 게재되었으며, 이어 각국 신문을 통해 여론이 확산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항의와 압력을 받은 대회 의장 닐리도프(M. Nelidov)는 현재 한국은 일본의 보호국이기 때문에 참가 자격이 없다는 유권해석을 내렸다. 이로써 헐버트의 헤이그 특사 막후 활동 또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1909년】
- 1909년 8월에 4차 내한한 헐버트는 고종에게 상하이 독일은행에 예치해 둔 25만 달러 상당의 예금을 찾아줄 것을 부탁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마침 딸 매덜린(Medeleine)이 중태라는 전보를 받고 서둘러 본국으로 귀국해야 했다. 귀국한 후에도 그는 한국문제에 늘 관심을 갖고 순회강연 등을 통해 한국의 입장을 호소하였다.
【1916년】
- 1916년 3월 5일자 뉴욕타임즈에 “한국과 벨지움에서의 미국정책”(American Policy in the Case of Korea and Belgium)이라는 제하의 글을 통해 다시 한번 과거 루즈벨트에 대한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이외에도 3ㆍ1독립운동 당시 필라델피아에서 서재필에 의해 간행되고 있던 The Korea Review에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는 글을 계속 기고한 바 있다.
【1919년】
- 1919년 8월에는 미국 상원 외교관계위원회에 “한국을 어찌할 것인가?”(What about Korea?)라는 한국 독립 호소문을 제출하여 미국 조야에 한국문제에 관한 관심을 재차 불러일으켰다.
【1949년】
- 광복 후 1949년 7월 29일에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국빈 자격으로 내한하였다. 그러나 86세의 고령에 장기간의 여행으로 쇄약해져 내한 즉시 청량리 위생병원에 입원한 후 1주일만인 8월 5일에 별세하였다. 장례는 8월 11일 사회장으로 거행되었고, 유해는 “미국의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에 따라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안장되었다.
【기타】
- 부인 메이는 1948년 9월에 81세로 별세하여 코네티컷주 올드사이드브룩의 사이프레스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 1950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
- 2014년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
- 2015년 제1회 서울 아리랑상
[참고] 『내한선교사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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